〈 50화 〉굴절
검은 하늘 밑의 오염된 땅.
이곳저곳이 격렬한 전투 때문에 황폐해져 있고.
마치 거대한 괴수가 지나간 흔적처럼
이곳저곳에 검에 의해 움푹 파인 대지의 상처가 보인다.
성검을 잡은 채 살기를 뿜어대며 눈을 번뜩이는 탈체크.
잠시, 루베라와 클레온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더니.
이윽고, 클레온의 몸이 축 처진다.
"뭐냐. 그 녀석... 기절한 거냐?`
탈체크가 김이 빠진다는 듯 한쪽 눈을 반쯤 감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잡은 검에서 힘을 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와 클레온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루베라를 어느 곳을 베어내야 할까.
찬찬히 살피고 있는 듯했다.
"네, 뭐. 그런 겁니다."
반대되는 루베라는 검을 검집으로 되돌리고 손잡이에 오른손을 올린 채.
탈체크가 다가온다면 어떻게 받아쳐야 할까.
그것만을 전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클레온과 둘이 힘을 합쳐서 겨우 틀어막고 있던 검성의 전력.
과연 나 혼자서 받아낼 수 있을까.
슬쩍, 이 매정한 남자의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의식이 완전히 몸에서 벗어난 탓인가?
조용히 눈을 감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얼굴이.
어딘가 조금 바보 같아 보여서.
자신도모르게 웃어버린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답지 않게 약속까지 해버렸군요."
그리고 탈체크를 노려보며 허리를 낮추었다.
거합술의 자세.
"루베라라고 했던가. 역시 특이한 검술이구만. 어디서 배웠지?"
탈체크는 그런 그녀의 검술에도 흥미가 동했는지, 루베라에게 넌지시 물어온다.
루베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야기했다.
"휴즈 후작이 혹시라도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일이 있을까, 암살검의 스승을 불러 저에게 배우게 한 것입니다."
"하. 그걸로 설마 자신이 죽게 될 줄은 몰랐겠지."
탈체크는 재미있다는 듯 이야기 하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전에 제국에서 그런 검술을 사용하던녀석과 붙은 적이 있었지. 가면을 쓴 여자였다."
"호오…. 그건 우연이네요. 제 검술 스승도 가면을 썼었는데."
잠시 이어지는 침묵.
그리고 탈체크가 순식간에 루베라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 괴력과 함께 오른손으로 성검을 휘둘러왔다.
루베라는 그것을 예측하였다는 듯 순식간에 검을 뽑아낸다.
`그림자 얽기.`
검집 안에서 마력을 방출하며 초고속으로 뽑아져 나오는 거합술.
아무리 검성 탈체크라고 하더라도 이 검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실제로 탈체크는 루베라의 검이 뽑히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대로 검을 휘둘러왔다.
하지만.
"뭣…!"
루베라는 경악한다.
자신의 검이 막혔다.
하지만, 성검이 아니었다.
탈체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아직 검집 안에서 뽑히지 않은 붉은검.
루베라의 공격을`눈`으로 보지 않고.
`몸`만이 반응하여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다음 순간, 성검이 루베라의 몸을 베어낸다.
자신의 공격이 막혔으니 탈체크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고.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깊은 상처가벌어진다.
"크윽...!"
순식간에 튀어 오르는 선혈.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빼지 않았다면, 그대로 심장을 베였으리라.
즉사에 이르진 않았지만, 충분히치명상이라고 불릴 상처였다.
탈체크는 성검을 휘둘러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자신이 왼손에 들고 있는 검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랑 똑같군. 다만, 그때는 그 가면 여자가 쓰러졌지만."
루베라는 혀를 차며 지혈을 하기 위해 챙겨두었던 포션을 들이부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자신과 스승의 검은 암살검.
단 하나. 사람을 죽이기 위해 특화된 검술이다.
그런 스승과 마주하여 저 남자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남자가 스승을 쓰러트렸다는 것이다.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많아지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다리나 팔에 들어가는 힘이 줄어든다.
오염된 검은 대지가, 마치 백작의 방에 있는 푹신한 침대처럼 보인다.
휴즈 후작에 대한 복수는 마쳤다.
유스테스는 죽일 가치조차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쓰러져서 잠들어도 되지 않을까?
달콤한 유혹이 상처 입은 몸을 감싼다.
"하하하! 넋 놓고 있을 시간은 없다고!"
하지만 저 고릴라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완전히 루베라를 자신의 밑으로 보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가까이 오며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러댄다.
유스테스가 우스꽝스럽게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이 정돈되지 않은 궤적.
하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이 검성 탈체크라면.
형태가 잡히지 않은 참격이라도 하나하나가 목숨을 위협해온다.
루베라는 아랫입술을 꽉 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탈체크는 언제라도 자신이나 클레온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단순했다.
이 남자는 검을 부딪치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게 된 클레온을 바로 죽이지 않고 루베라를 짓밟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루베라가 검을 놓는다고 해서 이 남자가 자비를 베풀 리는 없다.
자신이 죽거나 포기하는 순간.
클레온도 자신도 거리낌 없이 베어버릴 것이다.
귀를 찢는 검의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려 퍼졌다.
그때 마다 루베라의 팔에서 근육이 상하고, 뼈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울린다.
"크크 대견하구먼. 그런 몸으로 나와 승부를 계속해 주다니."
"...지금 당장에라도그만두고 싶은 게 본심입니다만…."
멈추지 않는 검과 팔.
부족한 속도와 힘은 마력으로 보충하고.
그것으로 팔에 들어오는 부담을 최대한으로 줄인다고 하지만.
그 라일라마저도 마력에 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루베라 역시 신체 강화에 사용할 마력이 서서히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탈체크 역시, 검을 마주할 때 마다 저항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보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간다.
입꼬리가 아래를 향하고, 재미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된다.
"뭐야. 마력 고갈인가. 이래서 마검사 놈들은…."
탈체크는 한숨을 내쉬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늦춰주진 않는다.
"마법도사용할 줄 알고, 마검이라는 명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중간하단 말이지."
물론, 그것은 용사도 마찬가지다.
여러 역할이 가능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탈체크나 라일라처럼 하나의 역할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실력을 낼 수 없다는 것.
클레온은 마법에서 라일라에게 뒤처지고.
루베라는 검술에서 탈체크에게 뒤처진다.
물론, 이것은 비교 대상인 둘이 대륙에서도 손으로 꼽히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라는 것도 있다.
오랜 세월에 걸려 쌓아올린 지고의 영역.
어쭙잖게 마법과 검술 양쪽을 잡으려고 하면 이 영역을 지닌 이와 부딪혔을 때.
상대를 무력화시킬 비책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승리하기는 어렵다.
클레온이 라일라에게 승리할 수 있던 것은 그가 1년 동안 라일라를 관찰하면서 얻은 정보가 있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루베라의 머릿속이 점점 비워져 간다.
이 고릴라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조금씩 이해가 되지 않는다.
팔에서 느껴진 충격이 머리까지 와버린 걸까.
[루베라...]
하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여자아이의 목소리.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검의 소리나.
결국, 한계를 넘어서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의 감촉.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도발하고, 무시하는 탈체크의 말소리.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지워내는 그 목소리는.
자신이 손에 쥐고있는 검에게서 느껴졌다.
[루베라.]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는 마검.
루베라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름을 부르지 말고, 할 수 있는 걸 좀 해보세요."
평생을 함께해온, 그리고 이제부터도 평생을 함께할 파트너에게 하기에는 너무나도 매정한 말이었다.
탈체크는 갑자기 영문 모를 말을 하는 루베라를 보며 순간적으로 검을 멈추었다.
[너, 너무해…! 겨우 깨어났는데!]
"다시 잠들고 싶지 않다면. 하는 겁니다."
루베라가 그렇게 명령하자, 검이 스스로움직였다.
"각성한 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탈체크가 재밌는듯이 웃음을 지으며 검을 휘두르면.
스스로 움직인 바리사다가 그대로 탈체크의 검을 튕겨낸 뒤
어느 샌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검이 한 번 움직인 궤도를 따라 그리듯 움직이며.
이번에는 탈체크의 오른팔을 베어낸다.
피가 솟아오르며, 탈체크의 팔에 새겨지는 검상.
"크으…! 마력으로 팔을 강화해서 순식간에 움직인 건가…! 마력도 없을 텐데, 잘도 그런 걸 만들어내는군…!`
"가속이 아닙니다."
"뭐라고…?"
다음 순간, 탈체크는 자신의 앞에 있던 루베라의 모습이 일그러지며.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
재빠르게 몸을 틀어 위를 방어해 내려고 하면.
다시 한 번 몸이 일그러지며, 이번에는 바로 전에까지 서 있던 곳에 돌아와 있었다.
"바람 연못."
이번에는 정확하게 무방비해진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
원래라면 조금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마력의 검날이
이번에는 동시에 탈체크의 목을 노린다.
탈체크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꺾어 그 공격을 피해내지만.
이어지는 루베라의 발차기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확실히, 가속이 아니야."
폭발적인 가속에는 예비동작이 존재한다.
루베라의 모습이 이동할 때마다, 탈체크는 그녀에게서 그런 가속의 전조를 느끼지 못했다.
루베라는 조용히 검을 들었다.
마력이 거의 고갈된 자신의 몸에, 바리사다가 18년 동안 모아두었던 마력이 돌아오며.
조금씩이지만 정신이 맑아지고 있었다.
루베라는 클레온의 능력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마검사가 타인을 지배하는 것은 모두가 가능한 일이다.
각성한 루베라라도 다른 이에게 같은 일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배한 대상을 각인으로부터 힘을 끌어와서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이전에 그런 힘을 발휘한 이는 없었다.
즉. 그 능력은 클레온 고유의 능력.
바리사다가 각성하면서, 루베라는 이 검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았다.
자신의 뒤틀린 성격에 꼭 맞는 능력이었다.
[굴절]
자신에게 달려드는 탈체크를 응시하자.
바리사다가 자연스럽게 능력을 사용한다.
이 검이 비트는 것은 빛이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다.
루베라와 관련된 사상을관측하고 비트는 것이다.
순간, 루베라의 몸이 방금 전과 같이 공중으로 이동했다.
루베라가 지상에 있다는 현 상황을 굴절시켜.
루베라가 공중에 있다는 사상으로 현실을 변경시킨 것이다.
"또 머리 위냐!"
탈체크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검을 위로 찌른다.
그럼, 루베라는 이번에는 탈체크와 자신의 위치관계를 굴절시킨다.
루베라는 탈체크의 위에 있다.
루베라는 탈체크의 아래에 있다.
순식간에 탈체크의 아래로 이동한 루베라가, 검을 위로 베어 올리면.
이번에는 탈체크도 배나 가슴을 공격당하여 피를 뿜어댔다.
"큭, 하아…!"
물론 루베라에게도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접전에서는 무적인 것 같은 능력이지만.
마력의 소모가 크고, 간섭할 수 있는 것도 루베라와 바리사다의 몸에 관련된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효과 범위도 좁아서 먼 거리를 순식간에 순간 이동하는 듯의 활용은 불가능하다.
[괘, 괜찮아!?]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에 루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하지만 정말로 사용하기 어렵군요.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대로 마력이 증발할것 같아."
[미안...]
"크크, 크크크크..."
뒤로 물러났던 탈체크의 몸에 신성마력이 퍼져나가면
그의 몸의 상처가 다시 회복하기 시작한다.
"재밌구만…! 이렇게 나와야지! 너희들 마검사들은 늘 벼랑 끝까지 몰려야 조금은 상대할 맛이 나는 녀석들이 된다고!"
"흥…. 완전히 악역이 정착했군요."
눈앞에 있는 것은 영웅.
그것도 폭정과 악행을 일삼던 마검 황제를 용사와 함께 쓰러트린 남자이다.
다만, 따지고 보자면.
흑마의 일족은 그 마검 황제가 지배하던 제국의 잔당이자 같은 핏줄이다.
클레온도 그렇고, 루베라도 그렇고.
그들의 인생이 크게 뒤틀린 데에는 레시아와 이 남자의 지분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복수심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제국은 세계를 멸망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듯하니.
그대로 둘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저.
지금 루베라에게 있는 감정은 두 가지.
첫 번째는이 괴물 같은 고릴라 남자를 이기고 싶다는무인으로서의 호승심.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무지막지한 인간을 자신에게 맡기고 이오나를 구하러 간 클레온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책임감.
주변에서 그녀에게 약속을 지키려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자신만큼은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루베라의 심정이었다.
"덤비세요. 검성. 저는 제 스승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드리죠."
"그거 기대되는군…!"
다시 한 번, 두 검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001
"맥스웰...!"
숨에찬 목소리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의 팔과 다리는 이미 완전히 나무로 변해 있었지만.
얼굴만큼은 아직 아슬아슬하게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허허…. 이럴 수가. 유스테스 도련님이 설마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맥스웰은 사람 좋은 얼굴을 보이며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두려움으로 다리를 조금씩 떨지만.
그래도 도망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그 자리에 머무는.
어리석은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유스테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맥스웰의 곁에 있는푸른머리의 성직자.
티오에게로 옮겨진다.
"너는…. 티오?! 너도 회귀자였던 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여자가설마 테러리스트의 일원이었을 줄이야.
유스테스는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을 감시하기 위해 제 쪽에서 보내두었었죠. 물론, 죽지 않게 하는 것도 일이었습니다만."
"... ..."
티오는 유스테스의 시선을 피하고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어째서 온 겁니까? 당신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와 네가 하려는 일을 멈추려 온 거다…. 그런 짓을 하면 도시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지 않느냐!"
유스테스는 손가락을 들어 맥스웰을 가리킨다.
그러자, 유스테스는 참지 못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하하하! 사람들의 희생이라. 놀랍군요. 설마 당신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이야!"
"뭐, 뭐가 우스워!"
맥스웰은 자신의 몸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할 정도로 웃어 재꼈다.
"그야 그렇지요. 지금까지 당신의 아버지가 타인을 희생시켜서 얻어온 것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지내던 인간이. 무슨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러는 겁니까?"
정확한 지적에 유스테스는 `큭….`하는 소리를 내며 분함을 느꼈다.
"하는 말은 훌륭합니다. 정말 용사 후보 같군요. 하지만 인정하시지요. 당신이 그런 어엿한 사상에 따라 이곳에 왔을 리가 없습니다."
"뭐라고…?"
맥스웰의 말에 동요하는 유스테스.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인간이 이틀 정도 고생했다고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지 않습니까."
"나는…!"
"본인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저, 그런 역할에 취했을 뿐입니다. 당신에게는 책임감도, 용기도, 사려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충동에 맡겨 움직일 뿐."
맥스웰의 눈이 초승달처럼 구부러졌다.
"깨달음을 얻은 척하지만 얼마나 얕습니까? 검성과 조금 단련을 해서 강해진 듯한 착각을 하고. 평소에도 불만이 있던 아버지의 악행에 분노하는 척하면 다른 이들도 당신에게 관심을 두겠지요."
"시, 시끄러워!"
유스테스의 얼굴이창백해진다.
맥스웰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절대 틀리지 않았다고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마저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착각에 빠져 생을 낭비하고 있는 인간은."
"큭…. 맥스웰!!!"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유스테스가 그에게 달려든다.
한 손 검을 들고 경갑을 입고 이전보다 조금은 자세가 나아졌지만.
아직도 너무나도 부족한 경험, 실력, 기초적인 능력치.
맥스웰이 팔을 휘둘러오는 것을 어떻게든 요행에 가깝게 몸을 숙여 피해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곧바로 치고 들어오며 그 복부를 꿰뚫으려 하는 다른 쪽 팔의 줄기는 절대로 그가 피할 수없는 방향으로 파고 들어왔다.
탈체크와의 훈련에서 아주 약간이지만 동체시력이 좋아진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배가 뚫리는 장면을 그대로 봤어야 하니까.
"제, 젠장...!"
다음 순간.
유스테스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이런….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윽…."
`쿨럭` 하고 튀어나오는 검붉은 피.
"무, 뭐야. 어째서 또…."
유스테스 역시 얼굴을 창백히 한 채.
눈앞에서 자신 대신에 공격을 맞은 여성.
티오를 바라보았다.
맥스웰의 가시가 뽑혀 나가면,티오는 손을 뻗더니 갑작스럽게 맥스웰을 향해 신성마력의 충격파를 발산했다.
그러자, 맥스웰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자신의 몸을 나무줄기로 감싸 보호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커흑…."
마력사용으로 인해 몸이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출혈양도 많아졌다.
유스테스는 티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지만.
이윽고 가져온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그 상처에 들이부었다.
이미 내장이 망가진 것이 상처 구멍 너머로 보이지만.
"너, 너는 맥스웰의 명령으로 날 살려줬던 게…."
"맞아요…. 하지만 살릴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피가 멈추지 않는 티오가 유스테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 이유를 입에 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