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숙적
휴즈후작은 요 십수 년사이에 갑작스럽게 그 부를 늘린 상인이었다.
귀족의 작위 역시 돈을 이용해서 산 것.
원래의 성도 우드녹커 따위가 아니겠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그가 어디선가 흑마의 일족의 노예들을 잔뜩 데려와.
그것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기 했다고 한다.
휴즈 후작은 수많은 여자를 데리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자신의 옆에 가깝게 두었던 것은
성자의 가호 교단에서도 용사의 혈족을 지닌 아름다운 성직자였다.
성자의 가호 교단과 우드녹커 가문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휴즈 후작은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중으로부터의 존경이나 사회적 명망이 부족했다.
교단은 늘 많은 후원자를 필요로 했고 그들이 가진 자금을 원했다.
그렇기에 그 둘 사이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던 것이다.
휴즈 후작은 그 성직자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교단에 많은 후원금을 내어 교단의 힘을빌려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강화해 나갔다.
그가 정말로 자신의 아내를 사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는 휴즈 후작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후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그 아이가 5살이 되던 해.
휴즈 후작의 아내는 몰래 저택에서 도망치려다가
그녀를 침입자로 오해한 경비의 손에 살해당했다.
용사의 후예라는 간판이 울고 갈 정도로 어이없는 죽음.
우드녹커 가문에서도, 교단 내에서도 이 일을 없던 것으로 취급했다.
그저. 잘 이어져 온 가문과 교단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일을 어둠 속에 묻은 것이다.
어린 나이의 유스테스는 이때의 일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늦은 밤.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자신을 데리고 나가려 했던 어머니.
하지만 당시 너무나도 어렸던 유스테스에게.
부족함 없이 지내던 아버지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붙잡는 어머니의 팔을 뿌리치고.
그런 그녀가 꼭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며 방을 나서는 모습.
그것이 그녀를 본마지막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치러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의 아버지가
`선인`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 하더라도
어머니와 같은 꼴이 되는 것은 싫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로부터 도망치며
그저 가까운 곳에 있는 즐거움에 목을매듯 살아왔다.
숨이 찰 정도로 쉬지 않고 저택에서 달려 모험가 길드에 도착한다.
"...뭐지, 이건."
안에는, 모험가들이 편을 갈라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어라? 당신은…."
그 사태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성진 들 중
유스테스를 눈치 챈 것은 `사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으음….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긴데…."
사샤는 최대한 간략하게 유스테스에게 미개척 영역과 회귀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 그렇다면. 지금 미개척 영역에는 맥스웰이…."
"하지만 괜찮아요. 이미 회귀자들을 막기 위해서 클…. 아니,강한 모험가분들이 가셨거든요."
유스테스는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강한 모험가들이라고?
이런 변방의 모험가들이 강해 봤자….
"검성의 상대는 되지 않아…."
"잠깐, 무슨 소리죠?"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루티가, 유스테스의 말에 반응했다.
"검성 탈체크는 회귀자들과 한패다. 사람을 검으로 바꾸더니 아버지의 측근과 함께 미개척 영역으로 갔어."
"...! 탈체크, 그 고릴라가 드디어…!"
루티의 눈이 순식간에 세로로 찢어졌다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왔다.
"...제가 클레온에게 갈게요."
쿠온이 그렇게 말하자 루티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숲에서 좋지 않은 기운이 몰려오고 있어. 도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하지만…."
루티는 자신이 가는 것도 생각했지만, 자신이 이곳을 떠나게 되면
모험가들 사이에서 어떤 충돌이 일어날지 모른다.
누군가가 이곳에 남아 이들의 고삐를 잡고 있어야 했다.
옛 상처가 욱신거린다.
탈체크에게는 한 번 패배한 적이 있다.
물론 그때는 용사 레시아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걸려있는 맹약 탓에 이전과도 같은 강함은 남아있지 않았다.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루티가손톱을 물어뜯는다.
그러자 사샤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제가 갈게요."
"사샤."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쿠온씨나 루티씨에 비해서 적어요. 조금이라도클레온씨의 도움이 되고 싶어요."
확실히, 숲은 레인저의 무대이다.
나무 위를 지나다닐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숲길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하지만 각인을 봉인한 것을 핑계로 라일라가 그녀를 배려해 이곳에 사샤를 남겨놓았다는 것을.
루티는 알고 있었다.
라일라의 의지를 존중하는가.
사샤의 각오를 받아들이는가.
루티가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면, 사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용한 결의가 깃든 눈으로 그녀와눈을 마주치는 것이었다.
그 눈은, 루티가 잘 알고 있는 눈이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로 쓰러트릴 수 없다 여겨지는 최강의 마물. 드래곤.
그런 자신을 앞에 두고 초연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
그녀의 눈과 지금의 사샤의 눈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그럼, 루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알았어. 하지만 정말로 조심해야 해. 탈체크는…. 괴물이야. 용사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 한계에 도달한 존재."
그렇게 말하며 루티는 자신의 작은 힘을 나누어 사샤에게 더해주었다.
일종의 보조 마법이지만, 바람의 원소가 그녀의 몸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리라.
사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비를 챙겨 길드를 나서려고 하자.
"잠깐…! 나도 가겠다!"
유스테스가 그녀를 따라가려 한다.
"아니! 너는 안 돼. 너정도의 실력자가 따라가 봤자 짐이 될 뿐이야."
루티는 얼굴을 찌푸리며 유스테스를 말리지만.
유스테스 역시 루티를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 사태의 원흉 중 하나가 내 아버지 휴즈 후작이라면…. 나 역시 그 책임을 져야 해."
유스테스의 말에 루티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언제부터 그렇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했다는 거야?"
"그런 게 아냐. 그저…. 더는 도망치는 자신이 싫은 것뿐."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럼 루티는 유스테스에게도, 사샤와 같은 보조 마법을 걸어준다.
"말려도 소용없겠지. 솔직히, 기분은 내키지 않지만."
"... ..."
"그렇다면 사샤를 방해하지는 마. 그녀의 각오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루티가 유스테스를 노려보며 이야기하자, 유스테스는 고개를 떨어뜨린 뒤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레오나가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사나이 유스테스는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전해줘."
비장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며 건물을 나서는 유스테스.
루티와 쿠온은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아직 레오나의 정체는 모르나 본데요…?"
"바보는 조금성장해도 바보라는건가…?"
001
미개척영역의 최심부.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길목은 완전히 황폐해져 그 주변에 나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자갈과, 검은 흙으로 뒤덮인 지면만이.
수천 년 전,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끔찍한 오염의 흔적만이 과거의 사건을 상상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강해지는 이차원의 마력.
그리고 낭떠러지와 검은 땅의 사이를 가로막듯이 펼쳐진.
무지갯빛의 장막식 결계가.
외부인이 쉽게 봉인의 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맥스웰!"
사제 맥스웰과 성직자 티오.
그리고, 휴즈 후작은 그곳에 서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맥스웰이 천천히 돌아보면.
그곳에는 클레온과 루베라가 적의를 품은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루베라? 살아있었나."
루베라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한 휴즈 후작.
"네. 당신의 바보 같은 아들이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이렇게 멀쩡히."
"흥. 유스테스 녀석…. 뭐 좋다.지금이라도 가문으로 돌아올건가?"
그 뻔뻔한 태도에, 루베라는 코웃음을 쳤다.
"설마. 멍청하게 착취당하며 얕은 희망에 매달리는 것은 그만둘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제 손으로."
"과연, 마왕의 후예인 흑마의 일족답군."
비릿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젓는 휴즈 후작.
그리고 클레온은 맥스웰을 바라보고자세를 잡았다.
"너에게는 말로 설득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지."
"하하…. 잘 알고 계시는 군요. 저희의 구원을 향한 의지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습니다."
맥스웰의말에 클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이오나는 탈체크와 함께 있다. 너희가 성검을 이용하려는 계획은 실현 불가능해. 이 상황에서 절계수를 불러봤자 개죽음이다."
그 말에 맥스웰은 눈을 잠시 크게 떴다.
"놀랍군요. 설마, 거기까지 눈치 챌 줄이야. 역시, 한 번은 동료였던 용사를 자신의 손으로 쓰러트린 남자입니까."
클레온은 이윽고, 뛰쳐나가기 위해 다리에 힘을 넣었다.
"포기해라……. 라고 말해도 듣지 않을 테니. 여기서 베어주마."
다음 순간, 동시에 튀어나가는 루베라와 클레온.
루베라는 휴즈 후작에게, 클레온은맥스웰에게 쇄도한다.
마치 화살과 같은 빠르기로 다가가는 그들.
다음 순간, 티오가 가지고있던 검의 핵이 다시 한 번 결계를 펼친다.
검의 기능을정지시키는 공간.
하지만 클레온은 이미 한 번 당한 수에 다시 당할 정도로
대책 없이 행동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결계가 펼쳐져 그 효과가 완벽하게 정착되기 직전.
갈라테아에 대량의 마력을 머금어
검게 물든 도신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다음 순간.
참(斬)!
완벽한 일직선의 베기로 결계 자체를 베어낸다.
깔끔하고 완벽한 일섬.
완성되지 못한 결계가 그대로 어긋나며 흩어지고.
티오가 들고있던 검의 핵에 금이 간다.
"히 히익...!"
믿고 있던 티오의 결계가 부서지자,비명을 내지르는 휴즈.
하지만 맥스웰의 몸이 이형으로 비틀리며 뻗어 나온 나무줄기가.
그대로 클레온과 루베라의 검을 틀어막았다.
"놀랍군요…. 마검사로서는 물론이고, 순수한 검사로서도 검성과 비슷한 경지입니까."
"그 몸은…."
맥스웰의 피부 위에 나무와같은 표면이 올라왔다.
로브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손과 다리 역시 인간의 것과는 다른
나무줄기와 같이 변해 있었다.
"슈라드셀의 축복이지요. 저는 오랜 세월 그를 이 세계에 불러들이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숲에서 튀어나오는 권속의 그것과 같았다.
이 남자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너…. 그 녀석에게 영혼을 판 건가…."
"저는 오직 인류의 구원에만 제 영혼을 바칩니다."
클레온은 얼굴을 찌푸리며 나무줄기를 베어내려 하지만.
맥스웰이 그 줄기를 채찍처럼 휘두르자 강력한 충격파가 퍼지면서 두 사람을 뒤로 날려버린다.
"큭…!"
루베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세를고쳐 잡았다.
휴즈 후작은 맥스웰의 모습을 보더니 크게 웃어 보인다.
"그게 바로 인간을 초월한 모습인가…! 하하…! 기대되는군! 나도 빨리그 몸이 되고 싶어…!"
"... 그런 게 목적이었습니까? 멍청하군요…."
휴즈 후작의 너무나도 작은 그릇에 루베라는 어이가 없다는듯 고개를 저었다.
"큭큭…. 멍청한 건 네년이지. 인간을 초월하면 모든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상처나 병, 심지어 죽음에서까지 말이야!"
"그거를 위해 나무가 되어 살아간다는 겁니까?"
이렇게나 어리석을 줄이야.
루베라는 자신이 13년간의 세월을 바치며 이 남자의 곁에 있었단 사실이 너무나도 바보 같아졌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한계에 머물러 있는 한 파멸은 반드시 찾아온다. 너희 흑마의 일족처럼 말이야."
"... ..."
휴즈 후작의 말에 동시에 얼굴을 찌푸리는 클레온과 루베라.
"제국의 잔당으로써, 외부인의 도움 없이는 마을을 유지하지도 못하던 녀석들…. 그 가치는 노예로 쓰이는 것이 그나마 유용한 사용법이지."
두 사람의 머릿속에, 악몽의 밤이 떠오른다.
루베라가 바리사다를 쥐는 손이 강해졌다.
클레온의 손에, 마력이 둘러싸여 진다.
맥스웰은 조용히 휴즈 후작을 바라본다.
"마을의 위치를 알린 식량 배달부를 아직도 찾고 있나? 루베라. 하나 알려주지, 네가 스무 살이 되더라도 그 녀석을 알아서 목을 베는 날은 찾아오지 않았을 거다. 왜냐하면, 그건 바로-"
다음 순간 참격이있었다.
공간 째로 베이는 일격.
검집에서 뽑혀나간 바리사다의 날에서 발현한 것은.
마치, 하늘을 날 듯 쇄도하는 참격이었다.
휴즈 후작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여전히 비열한 웃음을지은 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채였다.
"여기까지 오면 그게 누군지 명확하죠. 당신의 입에서 확인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검을 되돌리는 루베라.
맥스웰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마검, 바리사다를 바라보았다.
"반쯤은 이미 눈을 뜬 상태군요. 아쉽습니다. 새롭게 각성한 마검을 보는 것에도 흥미가 있습니다만."
"그럼 이쪽을 봐라."
다음 순간, 클레온에게서 뻗어져 나오는 4개의 화염 가시.
라일라로부터 빌려온 플레어 스파이크가 그 나무줄기를 꿰뚫자 화염이 퍼져 나간다.
하지만 맥스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불이 붙은 곳을 잘라내며
그 뒤에 있는 결계 너머에서 기운을 흡수하여 몸을 재생하는 것이었다.
"... 성가신 몸이 되었군. 재생력은 권속이나 플랜트 골렘이상인가."
클레온은 잠시 루베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바리사다에 손을 올린 채로 멈춰 있었다.
"복수는 끝났나."
"...네. 쾌감은 잠시. 그리고 허무하군요. 이게 당신이 느낀 감각이었습니까?"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어둠이 담겨 있었다.
"당신의 덕분에복수는 끝났습니다. 조금 더 어울려 드리죠."
"...하. 그거 고마운걸."
맥스웰을 향해 다시 한 번 자세를 잡는 루베라.
맥스웰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의미한 싸움은 그만하도록 하죠. 저는 죽지 않습니다. 이 고깃덩어리처럼 목이 잘려나가더라도 금방 재생할 뿐입니다."
루베라는 그 말을 듣더니 잠시 뒤쪽을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라일라를 깨워서 데려올까요."
"피도 눈물도 없는 거냐고. 그만둬."
"그렇게나 싸울 기력이 넘쳐나신다면, 그에 알맞은 상대가 필요하겠군요."
맥스웰이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자 클레온과 루베라는 동시에 앞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뒤쪽에서 다가오는 섬뜩한 느낌에.
동시에 몸을 굴려, 무언가를 피한다.
그러자, 거대한 일섬이 그들의 위를 지나가며.
그 너머에 있는 결계마저 베어냈다.
"크크…. 재밌게 놀고 있었나? 클레온."
"탈...체크...!"
자세를 잡고 제자리에 서는 클레온과 루베라.
탈체크는 손에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성검 슈발리에를 잡은 채.
맥스웰과 두 사람 사이에 선다.
그리고 열린 결계 너머로 맥스웰이 들어가려고 하면, 클레온이 그 뒤를 쫓으려 하지만.
"어이쿠. 오랜만의 대련이지 않느냐. 조금만 더 어울려 달라고."
"이 미친 고릴라가…!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오나! 정신 차려!"
클레온이 분노하여 목소리를 높이지만, 슈발리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검성 탈체크. 배신한 겁니까? 클레온을."
"배신? 조금 이상한 단어 선택인걸. 나는 애초에 이쪽 편이었다. 이차원의 틈의 괴물을 불러내는 데에 협력하는 쪽."
그 말에 클레온과 루베라는 눈을 크게 뜬다.
그러면 이내 클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정말로 미친 거냐. 탈체크."
"검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을 베어온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거냐 클레온?"
전에 없는 진지한 목소리.
클레온은 이내 한숨을 내쉬고 탈체크를 노려보았다.
얼굴의 분노는 사라졌지만, 그것은 전부 눈동자에 응축되어.
눈앞의 적만을꿰뚫어 보고 있었다.
"좋은 눈이구먼. 그게 네가적을 바라보는 눈이냐?"
"레시아 때문인가."
그 말에 탈체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크게 웃었다.
"뭐야.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지 않으냐."
"멍청이가…! 대체 이런 걸해서 뭐가 된다는 거냐…! 메모리아 큐브도 거짓인가?!"
그러면 탈체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성검을 붙잡아 클레온에게 겨누었다.
"글쎄다."
"탈체크!!"
실망, 분노. 그리고 어딘가 조금은 슬픔이 섞인 외침.
하지만, 탈체크는 대답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왔다.
루베라 역시, 이 고릴라를 죽이지 않으면 저 너머로 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클레온에게 가세하여 탈체크에게 달려들었다.
002
숲을 달리는 사샤와 유스테스.
루티로부터 받은 바람 원소의 보조마법 덕분인지.
평소보다도 빠르고 가볍게 발을움직일 수 있었다.
사샤는 나무 위를 사뿐히, 마치 요정의 발걸음처럼 달리지만.
유스테스는 마법의 힘이 없었으면 진작에 그곳에서 떨어졌겠지.
"자, 잠깐. 조금만 천천히..."
"안 돼요. 속도를 늦출수록 모두가 더 위험해져요."
유스테스를 두고 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맞춰서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곳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검성 탈체크의 길에는.
수북이 권속들의 잔해가 쌓여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비교적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클레온씨를 따라잡을 수 있겠어. 조금이라도 그를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어둠의 너머에서 날아오는 마력의 화살이 사샤의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스테스는 갑자기 자신 머리 위에 날아들어 와 나무에 박힌 화살을 보며
`히익!`하고 소리를 울리고 나무에서 떨어질 뻔 한다.
"...이건..."
"이봐 동족. 주인을 따라온 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초록색 로브의 사냥꾼.
미카시아 루펜볼프.
"큭…."
설마, 여기서 그를 만날 줄이야.
사샤들의 추적을눈치 채고 탈체크를 먼저 보내 자신은 이곳에 남은 것인가.
"응…? 각인은 어쨌지?"
사샤의 눈에 각인의 문양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일까.
미카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 당신에게 탐지당하지 않기 위해서 봉인했어요. 저도 당신의 존재를 느끼고 싶지 않았거든요."
"아아. 그래서 갑자기 기척이 사라진 거였나…. 재밌군. 고작 그런 이유로 스스로 약해지다니."
마치 비웃는 듯한 미카시아의 말투에, 사샤는 활을 꺼내 들었다.
"저는…. 약해져도 상관없어요. 그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면."
"멍청하군. 결국, 약하기 때문에 자기 목을 조이는 거다. 사냥꾼이 힘을 잃으면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어."
다음 순간, 빠르게 날아오는 화살이 사샤가 서 있는 곳을 꿰뚫는다.
사샤는 루티의 바람 마법 덕분에 평소보다도 높게 점프하여 그 화살을 피해내지만.
각인의 힘이 없는 상태에선, 공중에서 활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반격하지 못하는 건가?"
"큭…."
사샤는 땅에 착지한 뒤, 아직 나무 위에 있는 유스테스에게 말한다.
"먼저 가세요!"
"뭐, 뭐어? 하지만…."
"땅의 잔해들을 따라 움직이면 돼요. 저는, 이 사람과 결판을 내겠습니다."
사샤의 각오가 목소리를 통해 전해졌다.
미카시아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고.
유스테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무 위를 지나간다.
"저 바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 그런 건 상관 안 해요. ...하지만작은 힘이라도 필요할 곳이 있죠."
클레온이 했던 말이떠오른다.
각인은 사샤 스스로의 힘.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봉인을 해방하라고 했던 말.
그녀의 안에 갈등이 생긴다.
분명,봉인을 풀면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각인의 마력이 터져 나와.
순식간에 각인의 힘에 먹혀버리고 말 것이다.
짐승이 된다.
그 의미는 아직 모른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활을 잡았다.
그 눈에, 각인은 떠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은. 아직은 아냐."
숙적을 바라보는 조용한 투지가 그녀를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