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흑백
모든 것을 떠올린 이오나는 몸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타인에 비해 몸의 강도에는 자신이 있었다.
몸에 남은 상처는 타박상뿐 출혈도 없고 골절도 없다.
"...그 나무줄기…. 어디에서."
그렇게 몸을 일으킨 이오나가 가까이 간 것은 옆에 쓰러져 있던 루베라였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몸에는 어떻게 서든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전신을 이용해 지키고 있던 마검이 보였다.
이오나의 시선이 순간 그 마검으로 향한다.
자신들을 끌어당겼던 나무줄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주변에 마물의 기색도 없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 마검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면.
"... 읏…!"
동시에 루베라가 몸을 움츠러트리며 눈을 떴다.
이오나는 서둘러 자신의 손을 되돌리고 루베라의 상태를 살핀다.
"여긴…. 도련님은…."
아직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루베라.
이오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가져간다.
그리고 가볍게 마력을 발하면서 치유의 주문을 사용하면.
서서히 루베라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큭…. 당신은…. 이오나 슈발리에…."
"네. 역시 알고 있었군요."
시력이 되돌아와서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 누군지 확인한 루베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모시는 휴즈 후작을 조사하려고 하는 왕궁의 인물들.
말하자면 주인의 적이었다.
유스테스와 동행할 때 묘한 기색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였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루베라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몸을 일으키지만 다친 곳은 머리뿐만이 아닌 듯했다.
다리의 골절을 비롯하여 몸을 제대로 움직이려면 이곳저곳을 고쳐야 했다.
"글쎄요. 저도 일어나 보니까 당신이 옆에 있던 것을 확인했는데. 혹시 저처럼 나무줄기에 끌려갔나요?"
이오나는 농담이라도 하는 듯 이야기하지만 루베라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이들은?"
"없어요. 바보…. 아니, 당신의 주인은 다른 모험가들과 함께 바로 도망갔습니다."
"... 그 정도의 판단력은 있어서 다행이군요."
루베라는 안심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쉰다.
이오나로서는 적어도 자신의 뒤를쫓아온 클레온과 다르게 그대로 도망친 유스테스가 야속하기만 하다고 느껴졌지만.
당사자로서는 지켜야 할 인물이 괜한 위험에 몸을 던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침묵하며 몸 전체를 치료하는 두 사람.
이윽고 문제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된 루베라가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마검을 허리에 되돌린다.
"아까 전….마검을 만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 아뇨. 그랬었나...?"
서투르게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 하는 이오나.
그런 이오나를 바라보며 루베라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 ... 치유 주문을 걸어주셨으니 그 일에 대해선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후.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이오나.
이제 중요한 것은 휴즈후작이라던가.
유스테스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
"...미개척 영역입니까? 여기는."
"네. 그런 것 같네요."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확실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햇볕도 제대로 들어오고 있고 주변의 식물들에 위화감은 없다.
하지만. 어딘가 가슴 한편을 옥좨는 듯한 감각.
이오나는 불안한 느낌에 주변의 기척을살피지만 역시 마물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위로 올라갈 방법은 있을까요. 치유 주문을 사용하시던데 비행 주문은?"
"...미안하지만 그런 마법은 없네요. 저한테 물어보신다는 건 물론 루베라씨도..."
루베라도 고개를 끄덕인다.
가장 빠른 방법이라면 날아서 저 위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절벽을 타고 올라가기에는 너무나도 가파르고, 높은 곳이었다.
"다른 곳으로 올라갈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이미 여러 번 탐색의 시도가 있었던 만큼 길 자체는 존재할 겁니다."
이오나의 말에 루베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눈치였다.
주인의 적과 동행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무장이 없으신 것 같은데."
그러면서 무기 하나 들고 있지 않은 이오나의 차림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그건…. 급하게 당신들을 따라오느라. 하지만 마법은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신성마력을 모아 광탄을 만들어 발사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성 마력. 성직자?아니, 성기사입니까."
"그냥 기사에요. 신성마력은 타고났을 뿐."
루베라는그 말에 잠시 얼굴을 찌푸린다.
신성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성검에 선택받은 용사, 고위 성직자, 그리고 오랜 수련을 거친 성기사.
그런 것을 태어났을 때부터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자랑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루베라의 그런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오나는 마력을 갈무리하고 가방에서 지도를 꺼낸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지도 전체를 살핀 뒤 다시 그것을 가방으로 되돌렸다.
"아쉽지만 지도에도 미개척 영역은 나와 있지 않네요. 지도가 존재한다면미개척이 아니기도 하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루베라는 장갑을 벗은 뒤, 주머니에서 작은 반지를 꺼내 끼웠다.
반지는 은색의 몸통에 검은 보석이 박혀 있는 투박한 물건으로 장식품보다는 실용성 있는 마도구라는 느낌이었다.
착용한 반지에 마력을 주입하면 보석이 은은하게 빛을 내며 그 위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날개처럼 생긴 화살표가 떠오른다.
"이거…. 편익의 반지인가요?"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이오나는 잠시 입을 가렸다.
편익의 반지라는 것은 고대의 마도구로 지금이야 재현 가능한 `추적 마법`이 부여된 물건이지만.
발굴된 원본의 정도는 상당해서 추적해야 하는 대상과의 거리와 방향은 물론,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최단 경로를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추적하는 물건은 페어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편익의 반지.
대상의 보호를 위해 호위와 주인이 하나씩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사용법이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용도에 관한 이야기.
출처에 대한 것으로 따지게 되면 조금 복잡해진다.
그녀가 사용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원본이었다.
모조품의 반지는 좀 더 장식이 화려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마력의 효율소모가 나쁘다.
원본은 오직 유물의 발굴로밖에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물건.
당연히 발견된 수도 적다.
그렇기에 좀더 귀중하게 여겨지고 왕족이나 공작 이상의 귀족 정도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고가의 물건이기도 하다.
후작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나도희귀한 물건이었다.
그런 것을 시종이 가지고 있다는 것.
유물을 도굴하거나 강탈하는 `회귀자`와의 연결고리가 살짝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이 시종이 그러한 전모에 대해 알고 있을까.
후작으로부터 아들의 뺨을 갈겨도 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다면 어쩌면….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것에 대해 추궁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에요. 원본을 본 것은 처음이라."
"그렇습니까? 후작님께서도 두 쌍 더 가지고 계신지라."
"... ..."
거의 확정.
그 반지만으로도 왕실에 제출한다면 휴즈 후작의 뒷배에 대한 커다란 증거가 되리라.
미개척영역에 떨어진 것은 불행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정도 전화위복이 가능했다.
"방향은…. 이쪽이군요."
루베라가가리키는 방향은 역시 절벽. 그리고 그 아래를따라 나 있는 숲길.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짐승의 길이지만 어떻게든 그 사이를 헤쳐 나가야 했다.
당연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신뢰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실력만을 의지해서 그곳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001
"큭…. 하앗!"
순백의 외날 검이 빠르게 휘둘러진다.
녹색의 피- 아니 수액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보아도 정상적인 마물이 아닌 그 녀석은 잘려나간 부위를 빠르게 재생하며 킬킬대고 웃고 있었다.
이 녀석과 조우 한 것은 숲 속에 들어가고나서 10분 정도를 나아간 후였다.
그동안계속해서 무언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지만.
먼저 참을성의 바닥을 드러낸 것은 상대 쪽이었다.
처음 보는 마물이었다.
인간과 비슷하게 이족보행을 하고 있지만, 몸 전체는 나무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크기는 170cm 정도. 인간으로 치면 눈이나 입이 있어야 할 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이 모습을 바꾸거나,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는 것으로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 신축을 자유자재로 하고 강철과도 비슷한 강도.
아무리 마검이라고 하지만 베어낼 때마다 손에 전해지는 충격이 남달랐다.
루베라는 혀를 차면서 자신에게 뻗어오는 줄기의 창을 쳐낸다.
벌써 5분이 넘게 이 녀석과 2:1로 싸우고 있지만 베어도 재생하고 베어도 재생하는 것을 반복하기에 결판이 나질 않고 있었다.
"화염 마법은…. 아니, 가능했다면 진즉에 썼겠죠."
"그런 거예요.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이오나는 뒤에서 치유 주문에 집중하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루베라는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유지한 채 식물의 마물과 간격을 좁힌다.
언제까지고 버티기만 해선 체력이 먼저 고갈되는 것은 이쪽이다.
그렇다면 단번에 충격을 주어 틈을 만든다!
"...바람 연못."
검끝이 마물을 향한다.
양손을 얼굴의 옆. 후방에 가까운 어깨의 위로.
수평으로 고정된 도신에 마력이머금어지면.
한 호흡.
그다음에는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순식간에 마물의 품에 파고든다.
인간형의 마물이라면 누구라도 머리와 몸통을 연결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 그곳을 약점으로 한다.
"하앗!"
먼저 목의 오른쪽 부위를 노리는 첫 번째 일격.
마물은 재빠르게 팔을 들어 검으로부터 자신의 급소를 막는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마치 환영과도 같이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 날만이 튀어나와.
그대로 루베라의 몸을 통과한 뒤.
마물의왼쪽 목을 베어낸다.
콰직!
나무의 껍질이 부서지며, 안에 있는 수액에 뿜어져 나온다.
그 머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루베라는 우선 거기서 떨어지려 하지만….
자신의 검을 붙잡고 있는 녀석의 오른손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뭣…! 머리를 베어냈는데!"
당황한 루베라. 하지만 그사이, 여전히 움직이는 녀석의 다른 손이 루베라의 복부를 향해 날아든다.
창과 같이 날카로운 첨단.
이 굵기로 관통당하면 틀림없이 죽는다.
하지만 루베라는 검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됐다!"
순간,자신의 머리 옆을 스치고 무언가가날아가는 감각을 받은 루베라.
뒤쪽에서 날아와 마물의 몸에 부딪힌 것은-
"...종이 비행기...?"
루베라도, 마물도 잠시 그 정체에 당황하여 움직임을 멈춘 다음 순간.
마물과 종이비행기가 부딪친 곳에서 맹렬한 화염이 솟아올랐다.
그 화염은 마물의 겉이 아니라 속으로 파고들며, 안에서부터 태운다.
결국,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그 녀석은 마검을 잡고 있던 손마저 놓아버린 채
땅에 쓰러지는 것이다.
"...화염 마법은 쓰지 못하는 것 아니었나요?"
"맞아요! 그래서 화염 마법의 스크롤을 만들어서 던진 거죠. 즉석에서 만들었지만 나쁘지 않죠?"
이오나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는 펜과 잉크를 보여준다.
그 잉크는... 붉은색. 아무리 봐도 평범한 먹물은 아니다.
"자기 피를 병에 담아서 가지고 다니는 겁니까? 기사는 특이하군요."
"그, 그렇게 말하면 모든 왕국기사가 이러는 것같지만. 저뿐이에요."
이오나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며, 펜과 잉크를 가방에 담았다.
"...이동하기 전에 몇 장 더 작성해 놓는 게 좋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방금처럼 평범한 종이를 스크롤로 만들면 유지시간이 너무 짧아서요."
"...그 말은 즉. 앞으로도 제가 앞에서 방패를 하고 당신이 그 스크롤을 만들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거군요?"
루베라는 조금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훌륭한 검술이던데요. 저희 고릴라만큼은 아니지만."
"고릴라…. 아아, 탈체크님이십니까. 물론, 검성에 비하면 저따위의 검술 따위."
겸손을 표하는 루베라이지만 이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당신 같은 실력자가 휴즈 후작의 밑에…. 기사단으로 들어오면 분명 더욱 활약할 수 있었을 텐데."
"... 개인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법이죠."
이오나의 떠보는 듯한 말에 루베라는 몸을 돌리고 검을 허리춤으로 되돌렸다.
그 표정은 조금 불편한 듯했다.
`...방금 발언은 지뢰였나.`
이오나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캐내서앞으로의 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002
어느 샌가 해가 어둑해졌다.
확실하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앞으로 갈수록 마물이 튀어나오는 빈도가 늘어난다.
한 번에 한 마리씩만 튀어나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하아... 하아..."
슬슬 한계를 보이는 루베라의 체력.
하나하나를 상대할 때마다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스크롤을 작성하는 시간은 익숙해져서 오히려 단축되었는데.
마치,매번 전 개체의 실패를 학습해서 다시 나타나는 듯한 마물들은.
이전에는 통했던 방법을 다음에는 대처하고.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면, 다음 녀석이 그것을 봉쇄한다.
텅 비어버린 잉크통에 피를 보충하기 위해 상처를 낸 지 몇 번.
아무리 회복마법이 있다지만. 상처를 멎게 하는 것일 뿐이지몸내의 피의 양을 되돌려 주는 것은 아주 조금이었다.
거기에, 마력마저 고갈하기 시작한다.
"이걸로 몇 마리째죠…."
"저는 10마리부터 세는 것을 멈췄습니다…."
완전히 지쳐 방금 쓰러트린 나무의 옆에 주저앉는 두 사람.
위험하다.
이 이상 나아가더라도,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이 마물들은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한 마리. 한 마리. 차례대로 나타나며.
자신들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절망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미개척 영역…. 대체 변방의 도시에 왜 이런 곳이…."
이오나는 그 와중에도 수첩에 자신이 보고 느낀 점을 적어간다.
이 마물들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았다.
무언가가 원인으로 식물을 변형 혹은 변형된 종자가 뿌려져.
거기서부터 자라나는 것이리라.
재생이 가능한 것은 이 토지 자체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
그렇게 생각하면 이 근처에이들을 만들어내는 본체가 있으리라.
"... 하지만 문제는…. 그 본체가 얼마나 강할지 모른다는 점…."
생각을 정리하며 중얼거리는 이오나.
그런 이오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루베라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주인의 적과 같이 죽게 될 줄이야."
"아직 죽을 거라고 확정된 게 아니잖아요? 조금만 더 가요. 분명 클…. 아니. 제 동료가 저희를 찾고 있을 거예요."
"... ..."
루베라는 잠시 고개를 떨어뜨린다.
이오나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유스테스가 자신을 찾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했으니까.
"당신의 동료라는 것은…. 이곳으로 내려와 저희 모두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까?"
"...그건, 저도. 확실하게 대답 드릴 수는 없지만."
이오나는 아까 전의 싸움을 생각한다.
우두머리 곰.
마수를상대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정면에서 검술만을 사용해 대등하게 싸우던 클레온의 모습을.
오히려 어딘가 대등한 자와의 싸움을 즐기는 듯한 그 모습은 자신의 양아버지인 `탈체크`의 태도와도 비슷했다.
"그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대답했다.
이오나로서도 클레온의 전력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그가 아버지와 같은 부류라면.
믿을 수 있다.
그렇게 판단했다.
"... ..."
그런 이오나의 표정을 보고 루베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렇습니까."
딱히 무언가의 감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쓸쓸한 듯한 목소리.
이오나역시 그 이상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때-
쿵... 쿵...
땅을 울리며 다가오는 무언가.
두 사람은 전신에 돋는 소름에 몸을 움츠렸다.
마력압이었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사물들에 위압을 가하는 강자의 존재감.
나무들로 가려진 시야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플랜트 골렘이었다.
[KURRRRAAA!]
그 크기가 약 5m. 팔이나 다리 하나나 거한에 가까운 크기.
당연하지만 이녀석의 몸통에 루베라의 마검이 틀어박힐 것 같지도 않다.
루베라가 앞에서 막지 않으면 자신도 화염 마법의 스크롤을 생성할 수 없다.
그 마물은 두 사람의 `죽음` 그 자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이를 꽉 물었다.
아직 여기서 쓰러지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동시에 생각했다.
"스크롤은 움직이면서 작성할 수 있습니까?"
"힘들긴 하겠지만…. 불가능하진 않죠. 늘 걸어 다니면서 수첩에 필기하던 게 도움이 될 줄이야."
이오나가 던진 농담에 루베라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정면에서 녀석을막아낼 수 없습니다. 나무 위를 뛰어다니면서 신경을 쓰게 만들고 가지를 쳐내는 정도밖에."
"얼마나 가능하죠?"
"...2분."
한계에 다다른 체력.
압도적인 전력 차.
그 상황에서 2분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루베라 본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아까와 같은 위력의 화염 마법 한 번으로 저 골렘을 쓰러트리는 것은 무리였다.
이오나는 조용히 남은 종이와 잉크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응.무리네요."
깔끔한 포기 선언.
루베라도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포기입니까. 조금 전의 기세는."
"아뇨. 제가 무리라고 한 것은 `스크롤`을 사용했을 때요."
"...그렇다면?"
이오나는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 보다가 팔을 단검으로 그었다.
다시 한 번 흘러나오는 신성마력을머금은 피가 병으로 쏟아진다.
순식간에 차오른 병을 루베라에게 건네면 이오나는 빈혈이 온 것인지비틀거렸다.
치유 마법으로 피가 멎었지만 여전히 너무 많은 양을 사용한 것에는 다름이 없었다.
"...병의 피를... 검에.."
조용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이오나.
루베라는 비틀 거리는 그녀를 부축한 뒤 그 이야기를 듣고 눈을 크게 떴다.
"...가능…. 한 겁니까? 그게?"
"그거 알아요…? 종이는 원래 나무로 만든다는 거."
잠시 비릿한 웃음을 짓는 이오나를 나무에 기대게 내려놓은 뒤.
루베라는 병의 뚜껑을 열어 그것을 자신의 마검에 흘려 넣는다.
두근... 두근... 하는 맥박과도 같은 것이 검에서 느껴지는 착각.
그리고 검에 마력을 두르면 마검에 머금어진 피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검에 매달린 채 유지된다.
남은 마력을 전부 다리와 검의 강도를 유지하는 데에 사용한다.
이윽고 골렘과 대치하는 루베라.
골렘은 그런 루베라를 보자마자 그 커다란 팔로 납작하게 만들려 한다.
하늘에서 건물의 기둥이 떨어지는 듯한 일격.
루베라는 재빠르게 땅을 박차고 움직여 골렘의 팔에서 벗어난다.
이어지는 것은 도약. 팔을 밟고 그 위로 올라타 검을 휘두른다.
어찌 보기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난도질.
급소를 노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관절을 절단하려는 것도 아니다.
부족한 위력으로 껍질에 흠집을 내는 것이 전부.
플랜트 골렘은그런 루베라의 움직임이 짜증났는지, 다른 팔로 루베라를 쳐내려 하지만.
루베라는 다시 한 번 뛰어올라, 이번에는골렘의 등 뒤로 간다.
이것을 수 번 반복하면, 루베라의 전신에서 땀이 쏟아져 나오고 숨은 가팔라져 간다.
하지만 골렘에게는 별다른 피해도 없을 뿐.
그저 잔 상처와 거기에 발려진 이오나의 피만이 남아있었다.
등이나 머리 뒤, 그리고 다리나 팔의 곳곳에 흠집이 난 골렘은 이제 루베라의 움직임에 익숙해졌다는 듯.
땅으로 착지하는 틈을 노려, 주먹을 휘둘렀다.
"큿...!!"
마검으로 재빠르게 몸에 직격 하는 것을 막지만.
그대로 충격 때문에 날아가는 몸뚱아리.
결국, 나무에 처박히며탈진한 루베라는 서서히 고개를 떨어뜨린다.
다음 순간.
그런 루베라에 신경이 팔려있던 골렘의 다리에 이오나가 어느새 다가와 붙잡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신성 마력의 금빛이 잠시 스쳐 지나가면.
"발동...!"
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골렘에묻어있던 이오나의 피에서 화염이솟아오른다.
강력한 화염이 기둥처럼 솟아올라,하늘에까지 그 기세를 뻗었다.
루베라가 골렘의 전신에 새겨 넣은 것은, 스크롤에 적히는 영창의 문자였다.
골렘은 순식간에 겉면이 타들어 감과 동시에 안으로 침투하는 화염에 불타오르며.
그 자리에서 거대한 몸집을 쓰러트렸다.
"하아... 하아..."
빈혈과 피로. 그리고 마력의 소모가 이오나의 전신을 덮친다.
그런데도 가까스로 루베라에게 다가가, 방금 받은 충격이나 피해를 지우기 위해 회복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골렘은..."
"됐어요. 세기의 명필이에요 당신."
이오나의 말에 작게 미소를 짓는 루베라.
"...그렇습니까."
이렇게 또 한 번.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두사람은 알고 있었다.
다음은 없다.
또다시 이 골렘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바로 직후에 현실이 된다.
쿵... 쿵... 하고 울리는 소리.
멀리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땅의 진동.
다시 한 번 단검을뽑아드는 이오나.
하지만 루베라는 그런 이오나를 막으며 마검으로 몸을 지탱한 채 일어섰다.
"더는 피를 뽑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얌전히 쉬고 계세요."
"... ..."
한계까지도달한 루베라의 몸 상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아마전신이 짓눌리는 듯한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플랜트 골렘.
이오나도 루베라도 남은 모든 것을 쏟아 부을 각오로 자리에 선 다음 순간.
"그대,천상에서 강탈된 신들의 위용을 보라! 이것은 세계를 시작하는 원초의 문이니!"
창공에 울려 퍼지는 마법의 영창.
그리고 머리 위를 뒤덮는 거대한 붉은 마법진.
마치 문과 같은 것이 그려진 마법진이 말 그대로 열리면.
그 안에서, 수십, 수백, 수천의 화염의 창이 나타나. 비처럼 내린다.
"프로메테우스 게이트!"
대마법사의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 사용하는 4티어의 마법.
플랜트 골렘의 전신을 꿰뚫으며 순식간에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화염의 마법.
이오나와 루베라가 동시에 위를 바라보면.
지팡이를 겨눈 채 하늘을 떠 있는.
붉은 머리의 마법사를 보았다.
"...휴..."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그녀가 손을 움직이자.
루베라와 이오나 양쪽 모두 부유 마법에 의해 올라온다.
"라일라 플레임워치양…."
이오나는 조용히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바라본다.
"인사는 나중에. 아까 그 마법 나중에 나한테도이야기해 줘야 해."
"아까…? 아아. 그거군요. 알겠습니다. 그보다도…. 그 사람은?"
"...아마 다른 쪽을 찾는 중. 나를 여기로 부른 것도 그 녀석이니까."
이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베라를 바라본다.
그녀는 이미 완전히 힘이 빠져 기절에 가까운 상태였다.
"저택으로갈 수 있을까요?"
"안 돼. 당신이라면 모를까 이 녀석은 논외야."
라일라는 냉정하게 이야기하지만, 이오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마을의신전까지는 보내줄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라일라는 조용히 두사람을 데리고 하늘을 날아간다.
동시에 염화로 클레온을 불러 두 사람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003
도시의 신전.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부상자를 사제들이 서둘러 치료하고 나면.
이오나와 루베라는 조용히 완치된 몸을 이끌고 신전의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 ..."
"... ..."
어색한 침묵.
미개척 영역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힘을합쳤다지만 잘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아직 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 난 직후이니 여기서 언성을 높이거나 할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늘의 일은…. 서로 묻어두는 거로 하죠."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오나였다.
그럼 루베라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저희는 적일 테니."
루베라의 말에 이오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헤어지기 전.
이오나는 참을 수 없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당신의 글씨... 마검으로 쓰인 것이지만. 확실히 읽을 수 있었어요. 분명, 손으로 쓴 글씨는 더 예쁘겠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뇨. 당신이 쓴 글이나 문장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이오나는순수한 감상을 내뱉은 채 탈체크가 기다리고 있을숙소로 돌아간다.
루베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그 뒤를 잠시 바라보다가….
주인이 있을 후작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밤이된 도시.
달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은발의 소녀와
그런 달빛마저도 피해 그림자 속을 걸어가는 흑발의 소녀는
그 경계가 모호한 흑백의 안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