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3화 〉제2부. 16화. 복권 일등 당첨되기 (2) (193/195)



〈 193화 〉제2부. # 16화. 복권 일등 당첨되기 (2)

193.

그네.
미끄럼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어젯밤 일이 천천히 떠오르며 왜 자신의 방이 아닌 이곳에 있는지도 기억났다.

기다란 벤치.
그리고 그의 발치에는 빈 소주병  병과 옆으로 쓰러진 채 반쯤 남아서 넘실거리는 한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수진이 뛰쳐나가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자
그대로 모텔을 나와서는 타는 가슴을 식힐  없어서 소주를 사다가 놀이터에서 마셨다.
물처럼 병나발을 불어도 쓴 맛조차 느낄 수 없었다.

다른 남자와 그렇게 다정하게 있는 사진을 들키고도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아니라니!?????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대체 어떤 게 아무런 일이라는 것인가.
나희에 대해 말을 꺼낸 것은 실수는 맞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가버릴 수 있는 것일까?

담배라도 있음 피고 싶었다.
왜 다른 남자들이 속상하고 열 받으면 담배를 피우는지 이제는   같았다.
길게 뿜어내는 연기 속에서 가슴 속 가득 채워진 감정마저도 같이 쏟아낼 수 있을  같았다.


제기랄......

두통이 좀 가시는  같더니 이젠 속이 쓰려왔다.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
어제 마신 깡소주가 이제 독이 되어 몽땅 돌아온 모양이었다.
몸을 웅크리며 양팔로 배를 감싸고는 머리를 아래로 처박았다.
갑작스런 복통에 절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수진과 같이 눈을 부시며 모텔방 침대에서 누워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팔베개를 해준 탓에 저린 팔을 애써 참고 있는 동안
그녀는 명록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아직도 졸린  얼굴을 부비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스럭 거리는 것을 느끼고 은은한 꽃향기를 맡으며
 분만 더  분만  이러고 있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어야 할 시간에
한명의 노숙자처럼 공원 벤치에서 속이 쓰려서 끙끙대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젠장!
제기랄!
씨....발!


절로 나오는 욕지거리.
대체 어젯밤 있었던 일이 생시인지 꿈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수진이  남자와 그런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고
자기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어렵게 만났는데 그렇게 자신을 버리고 휭하니 가버렸다는 것도 믿을  없었다.

문득 생각이 떠올라 주머니를 뒤져보니 다행스럽게 소지품이 그대로 있음을 깨달았다.
허겁지겁 꺼낸 휴대폰.
그러나 액정에는 아무런 표식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통의 문자 메시지도 한통의 부재중 전화도 와있지 않았다.

그때 앞주머니에 만져지는 조그만 상자.
수진을 주려고 준비한 목걸이가 들어있는 상자꾸러미였다.


제기랄!!!


명록은 화가 치밀어 오르며 주먹이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휙 치켜들어서 허공 위로 번쩍 들었다.
순간 저 멀리 집어던지고 싶었다.
버림받는 어제의 자신처럼 그 목걸이도 길바닥에 팽개쳐서 버려버리고 싶었다.



**************

캠퍼스의 여름을 장식하는 푸른 녹음과는 대비되게 수진은 검은 우울과 짜증에 잠겨 있었다.
아직 자고 있을 거란 자기 위안식의 추측도 점심을 지나가고 오후에 접어 들어가는 시간이 되도록
명록에게 연락 한 통 오지 않으면서 결국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건....
일부러 전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포트 제출 이후 학과 동기들과의 정보 교환을 마치고
자리 잡은 도서관에서의 성과를 논하자면 형편없었다.
일찌감치 앉아서 해야할 자료 정리를 시작했지만
결국 명록으로 어지러워진 마음은 엉뚱한 생각에 빠져 집중하지 못한 채로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꼴이었다.

애써 평안을 가장하고 억지로 자리에 앉아 있으니 공부의 효율이 좋을 리 만무했다.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가올 기말고사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닌 채,
손에 잡은 샤프로 요점을 계속 노트에 끄적이곤 있었지만
생각과 다르게 자꾸만 엉뚱한 낙서 만이 계속 되고 있었다.

시험 보기 전 마지막 요점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인데
계속 검은 땜빵만이 늘어가고 있었다.
실수 그리고 또 실수.
결국 다시 새로 요점정리를 하면서 만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틀린 글자를 짜증스럽게 지우개로 박박 지우며
조금이나마 부글거리는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너무나 미세해서  개의 지우개가 희생을 하더라도 전혀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꿀꿀한 기분이 풀리는 가장 쉽고 바른 방법은
명록에게 전화가 오거나 아님 그녀가 전화를 걸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꽁해버린 마음은 어느 쪽도 반갑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연락한다는 것은 전혀 하고 싶지 않았다.

흥......
뭘 잘했다고 연락을 안 하는 거야!
좋아....
언제까지 이렇게 하는지 두고  거야.
흥.....!


한껏 심통이  수진은 이제 브레이크 고장  자동차처럼
주체할  없는 화로 마음이 시베리아 혹한과 같이 얼어붙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그에게서 연락이 온다고 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상태 같아서는 영원히 녹지 않는 만년설과 같이
그녀의 기분은 무한 루프 속에 갇혀 전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 얘~! 아까부터 문자 계속 보냈는데  답장을 안 보내? 넌 배도  고프냐? 공부는 그쯤 해두고 점심 먹으러 가자. 다들 밖에서 배고프다고 난리야. "


갑작스레  뒤에서 들리는 나희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손에는 이미 몽당연필처럼 조그맣게 변한 두 번째 지우개가 자신의 분신들을 잔뜩 남기고 콩알만 해져 있었다.
약간 새침한 표정의 나희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 수진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노트를 뭉개고 있던 지우개질을 멈추고 시계를 보니 이미 두시를 향하고 있었다.

화가 나서 허기를 잊고 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니.....

명록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작은 기대를 갖고 쳐다보면 친구들의 문자들만 들어오는 통에
실망 반 짜증 반으로 휴대폰을 꺼버린 상태였다.

결국 연락이 안 되는 통에 한참을 기다리다가 나희가 그녀를 데리러 직접  모양이었다.


" 아.... 미...미안. 언제 휴대폰이 꺼졌지? 참.... 애들은  먹으러 간대?"


수진은 호들갑스럽게 휴대폰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 늘어지고 꿀꿀한 기분 탓에 배는 고프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을 친구  때문에 순순히 나희를 따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귀찮아.....

수진은 아무도 듣지 못하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그녀들은 유쾌하게 수다를 꽃피우고 있었다.
영연은 늘 그렇듯이 커다란 목소리로 시끄럽게 말을 하고
설아는 그런 영연에게 핀잔을 주고, 나희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수진도 나희처럼 그들을 지켜보고 있긴 했지만
기분이  좋은 탓에  잡아 올려진 조개처럼 입을 꼭 닫고
자신 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사실 아침에 영연을 보았을  다시 한 번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술기운이 아직도 생생한 그녀를 보자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술기운에 아무런 기억도 없어 보이는 영연에게 말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평소 장난이 심했던 그녀인 줄 뻔히 알고 있는 것이 한스러웠다.

" 영연이는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꾸벅꾸벅 졸고 있더니 식당에 오니까 완전 생생한 거봐. 에구~~ 살아있네~ 살아있어~ "


설아가 유난히 기운이 넘치는 영연을 바라보며 머리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굵은 목소리로 남자흉내를 내면서 사투리 억양으로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얄밉다는 듯 살짝 노려보며 웃고 있었다.

영연은 한입 가득 먹으면서지지 않고 말했다.


 어제 밤 세서 리포트 써서 그런 거야. 술 마시고도 결국 오늘 냈는걸! 장하지 않아? 아~~~ 하필 시험기간에 코앞에 두고 과제 내주는 교수님들 센스하곤! 그 덕에 내가 죽는다.  냠냠.... "


" 그렇게 피곤한 애가 지금은 이렇게 기운이 넘치냐! 이건 피곤한 게 아니라 그냥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거라니까~ 빨리 오빠한테 말해서 시집이나 가버렷! "


영연은 궁색한 변명을 댔지만, 설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에잇! 이 창창한 나이에 무슨 악담이야! 절대 아니거든! 도서관 공기가 탁해서 그런 거라니까! 산소가 부족한걸!!! 아~ 맞다! 수진아~ 밥 먹고 나서 도서관 돌아가면 너 필기한 것  보여줘. "


영연은 앙탈부리듯 항변을 했지만 역시 설아에게 밀리는 느낌이 들자
차마 그녀의 말이 맞는다는 인정을 하진 못하고 수진에게로 말을 돌렸다.

슬쩍 설아의 공격을 피해온 영연의 도움 요청.
하지만 왠지 당연한 듯 자신의 노트를 요구하는 느낌을 받은 수진의 기분이
급격히 안 좋아지며 미간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냉담한 대답.


싫어. "


짧고 차가운 거절이후 수진은 괜히 심술궂게 젓가락으로 상에 차려진 반찬을 휘적거렸다.
거친 손놀림이 위태롭게 보였지만 이미 조종간을 잃은 비행기처럼 걷잡을 수 없게 날아가고 있었다.

에이, 수진아~ 으응? 그러지 말고 보여주라~~~"

영연은 수진이 장난친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부탁하고 있었다.
수진은 짜증이 확 몰려오며 젓가락을 탁상에 탁 놓으며 쏘아붙였다.


" 싫어! 같은 시간을 보내는데 왜 남의 노트를 보여 달라는 거야! 난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넌  시간동안 놀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그냥 보여 달라고?  넌 언제나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을 얻으려고만 하는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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