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20)
191.
" 말 그대로야. 하..... 그 애가 뽀뽀하는데 가만히 있더라. 영연도 말하잖아. 잘 어울린다고. 하하! 니 친구도 대단하다. 정말 영연이 그런 애인줄 몰랐네..... 어떻게 나를 알면서도 너한테 그런 문자를 보내냐? "
" 오빠! 지금 뭐라는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수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주먹을 꼬옥 쥔 양 손이 허벅지 옆에서 붙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들며 그녀의 앵두빛 입술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한동안 말을 끊은 채 어깨가 들썩이며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마른 침을 힘들게 삼킨 뒤 최대한 억누르는 모습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오빠..... 오해하는 거야..... 원래 영연이가 좀 장난이 심하잖아. 그리고 사진.... 아무 것도 아닌 걸. 정말 아무 것도 아니야. "
" 아.무.것.도 아.니.라.고? "
명록의 말이 뚝뚝 끊어지며 흘러나왔다.
수진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그의 표정으로 보며 갑자기 표정이 바뀌며 화를 쏟아냈다.
" 아니.... 대체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아무것도 아닌걸!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오빠.... 나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 아니..... 대체 왜 남의 휴대폰을 맘대로 본 거야? 오빠는 프라이버시도 몰라?! 아무리 오빠지만 그렇게 함부로 보는 게 어디 있어!!! 오빠가 그런 사람이었어??? "
수진의 말이 빠르게 다다다 이어졌지만
명록 또한 이미 북극의 빙산처럼 차가워져있었다.
" 하하.... 친구들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프.라.이.버.시? 이건.... 영연이 그렇고 다 알고 있었던 거지? 너희 정말..... 너무한다..... 하하.... 나희도 그렇고 정말! "
" 나희??? 나희가 머! 나희가 뭐 어땠는데! "
수진이 온몸으로 부르르 떨며 하이 톤으로 소리를 질렀다.
앙칼진 그녀의 목소리.
완전히 얼굴이 빨갛게 된 채 사나운 고양이처럼
크르릉 거리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수진의 가는 목에 핏줄이 솟아나있었다.
" 나희가 그렇다니!!!! 그게 대체 무슨 의미야?! 그리고 거기서 왜 나희가 나오는 건데! 오빠... 정말 저....질이야! 어떤 생각으로 나희를 본 건데!!! "
방 안에 쩌렁쩌렁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수진의 모습에 명록은 순간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나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전에 큰소리를 내던 수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폭발하는 활화산처럼 씩씩 대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 하! 정말 저 사진.... 아무 것도 아니야. 글고... 오빠 완전 실망이야. 영연을 그렇다 쳐도.... 나희 도와줄 때 정말 고마웠었는데..... 속으로 무슨 생각했던 거야!? 정말.... 실망이야. "
" 아니... 난...... "
" 됐어! 나 의심하는 사람하고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 나 갈게. "
말을 마치자마자 주섬주섬 탁자에 늘어놨던 자신의 물건을 가방 안에 쓸어 담듯 집어넣었다.
모텔 가운을 휙 벗어버리고는 자신의 옷을 빠르게 입었다.
명록은 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팔을 잡으며 말했다.
" 그럼 저 사진은 먼데? 제대로 얘기하고 가야지 이러는 게 어딨어? "
하지만 수진은 강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얼마나 세게 뿌리쳤던지 명록은 그 힘에 밀려서 침대 가까지 물러섰다.
그런 그를 그녀는 싸늘하게 노려보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 됐어. 그럴 기분 아니거든. 오빠.... 정말...... "
수진은 이내 돌아서서 모텔방 입구로 걸어갔다.
마구 집어넣은 탓에 빵빵해진 가방을 힘겹게 들고는 휘청거리며 신발을 신고 있었다.
명록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멍하니 지켜보았다.
잡아야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얼음보다 차갑게 쏘아보던
수진의 눈매에 뭐라고 말을 하지도 못하고 다시 손을 뻗어 잡지도 못했다.
신발을 어느새 다 신은 수진은 고개를 들고 방 안에 서있는 명록을 보았다.
가늘어진 그녀의 눈매.
그리고 바로 흥 소리를 내고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콰앙!
철문이 힘껏 닫히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진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
쾅.
천둥소리가 황량한 복도를 울리며 퍼져나간다.
커다란 소리가 빠져나간 귓가엔 삐 하는 이명이 계속 맴돈다.
그녀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심전도 모니터에서 나오던 소리였다.
이별의 소리.
그 소리와 함께, 그녀는 조모와 이별했다.
이성을 잃은 머릿속 고름을 이명이 핀셋처럼 찌른다.
이별......
어쩌면 명록....
그녀의 첫사랑인 그와 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그러자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던 분노는 오래가지 못하고 서서히 가라앉았다.
오히려 현실감 없던 이별이 점점 커지며 생각만으로도 가슴 끝이 아려왔다.
문을 세게 닫은 게 후회된다.
그가 붙잡아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생각과 다르게
등을 돌린 몸은 태엽을 잔뜩 감은 인형처럼 멋대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가는 길.
싸구려 카펫이 분명한데 푹신한 고급 제품인양 행세하며 걸을 때마다 진창처럼 푹푹 가라앉았다.
지금이라도 붙잡아 준다면.....
미안하다고 말 한다면....
못 이기는 척 받아 줄 수 있다고.....
마음 속으로 제발 잡으라고 수십 번을 되뇌였지만
그녀가 결국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도 명록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그녀를 일층으로 내려 보냈다.
손님도 찾지 않는 늦은 새벽이라 그런지 프론트조차 텅 비어 있었다.
수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내려온 채로 멈춰있는 엘리베이터.
불이 켜진 숫자 <<1>>에서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붙잡아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잡지를 않았다.
차라리 그냥 올라가볼까 하는 마음에 몇 걸음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결국 모텔을 나섰다.
따지고 보자면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를 찾아가야하는지 수진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수민과의 사진을 보았을 때 분명 그가 기분 나쁠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의심하는 듯한 그의 말은 실망과 함께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비꼬는 듯한 그의 말투는 처음 들어보는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나희의 이름.....
그 단어 속에 풍기는 악의는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모텔을 나섰지만 얼마 못가서 멈춰 섰다.
쌀쌀한 공기가 얇은 면을 뚫고 새어 들어오지만 수진은 큰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역시....
이대로 가면
안 될 거 같은 마음.....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와 이렇게 힘껏 큰소리를 내며 싸워버린 밤이었다.
이렇게 찜찜한 마음으로 가버리면 안될 듯 싶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명록이 뛰어내려와 자신을 찾을 거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발걸음을 끊지 못하고 그녀의 곁을 슬쩍 지나가는 빈 택시를 벌써 몇 대를 흘려보냈다.
그러나.....
그녀가 나온 모텔 입구에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초초한 마음으로 주머니 속 꼭 쥔 휴대폰도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수진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힘껏 쥐었다.
애초 오빠가 잘못한 일이었는데......
왜....
오지 않는 거야...
대체 왜 남의 휴대폰을 멋대로 보는 거야!
화낼 사람은 누군데.......
바보같이....
여자가 나간다고 그냥 멍하니 보기나 하고.....
왜 잡지를 않는 거야!
내가...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지금이라도 뒤에서 '수진아' 하고 부르며 명록이 달려올 것 같은데
쓸쓸한 거리는 여전히 시간이 흘러가도 그녀 혼자 외로이 홀로 서있었다.
서서히 미안했던 마음이 실망과 아집으로 조금씩 희석되었다.
순간.....
다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누군가를 향해 날아갔다.
대체!
망할 년!
이런 걸 왜 보낸 거야~!!!
수진은 결국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트리기 위해서 핸드폰을 열었다.
이번 일의 원흉인 사진을 쏘아보던 수진은 영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불안한 통화음이 귓가에 반복될수록 속이 울렁거렸다.
" 어..? 수진아~~~ "
혀가 꼬인 영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왈칵 막혔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 너 제정신이야? 왜 그런 사진을 보내는 거야!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진짜 나 물 먹이려고 이러는 거야?!"
명록과 싸운 이유는 모두 영연 때문이었다.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면....
장난스럽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수민을 그녀에게 밀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수진은 명록에 향했던 분노도, 실망도 터질 것 같은 불안함도 모두 전화기에 쏟아 부었다.
" 아? 무슨 소리야?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영연의 목소리가 방향을 잃은 조각배처럼 휘청거렸다.
사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수진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 감정을 쏟아내야 했다.
" 다 너 때문이라고!!! 내가 네 남친한테 그런 사진 보냈으면 좋겠어? 왜 이러는 거야.... 너.... 대체..... "
마음과 다르게 입술이 바들거리며 멍청한 소리만 쏟아 냈다.
아무 대답도 없는 전화기를 들고 마음을 비우고 비워도
시원하지 않고 계속 화를 낼수록 어느새 목소리가 잠겨갔다.
그리고 통화종료를 누르는 순간 결국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화려한 무늬의 벽지가 유난히 눈부셨던 방 안.
장식하나 고풍스런 유럽의 호텔을 연상하게 만들었던 모텔 방 안에 명록 혼자 서있었다.
아까까지 사랑을 나누었던 침대 시트 위엔 흐트러진 자리만이
방금 전까지 수진이 같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텅 빈 방의 모습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비뚤어진 채 구석으로 밀려버린 탁자.
뒤로 젖혀진 작은 소파.
인생은 정말 요지경이라고 느꼈다.
정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렇게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수진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후회.
처음부터 이렇게 무리하게 만난 것이 잘못이었을까....
-하는 마음이 그의 가슴을 마구 두들기고 있었다.
아니 다른 수많은 이유들이 마구 명록을 향해 박치기 하고 있었다.
난 대체 왜.....
수진의 핸드폰을 봐버린 것일까.
왜...
왜...!
나희에 대해 말한 것일까.
수진의 화난 얼굴이 눈앞에 선명했다.
순간 그녀를 주기 위해 사온 목걸이가 떠올랐다.
하얀 목선 아래 매달려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신바람 나서 사왔던 목걸이는
예쁘게 포장된 채 자신의 호주머니 안에 들어있었다.
젠장.....
젠장!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럴 때 하필 옛날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포레스트 검프>>
남자주인공에게 엄마가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던 대사.
한동안 입 안에서 중얼거리고 다니던 영어 한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 You never know what you are going to get.
인생은 상자 속의 초콜릿처럼 어떤 것을 고를지 넌 알 수가 없단다.
대체....
난 왜 이 초콜릿을 꺼냈을까?
많고 많은 선택 중에 가장 최악을 골라 뽑은 듯 싶었다.
아주...
명록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마음은 엉망으로 어질러진 모텔방처럼 이미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머릿속은 텅 빈 방안처럼 지워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두 가지 모습만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수진의 성난 얼굴.
그리고....
수민이라는 남자애의 옆얼굴.
지금이라도 수진의 뒤를 쫓아가려고 했던 발목을
만난 적도 없던 남자애의 모습이 가로막으며 명록은 그렇게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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