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19)
190.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명록이 속으로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동안 수진의 말이 이어졌다.
" 암튼..... 급한 건 아니잖아..... 나 리포트부터 쓸게..... 응? 우리 나중에 얘기하자. 나도.... 오빠한테 할 말도 있고..... 그러니까 조금만 오빠 나 좀 이해해주라.... 응? "
소프라노의 독창처럼 높게 울리던 수진의 목소리가 어느새 잦아져서 애잔한 목소리로 명록에게 호소하듯 말하고 있었다.
리포트를 쓰라고 한 것도 자신.
도와주겠다고 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명록은 더 이상 수진에게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미 결말이 환하게 보이는 싸움이었다.
" 하아..... 알았어..... 리포트 써..... 미안해. 화내려고 한 건 아닌데.... "
" 아니야. 오빠 혼자 둬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오빠.... 조금만 참아줘. "
" 그...그래. "
수진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여몄던 가운이 살짝 벌어지며 그 안에 숨어있던 젖가슴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조차 신경 쓸 새가 없는지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자판을 빠르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아까보다 왠지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자판소리가 신경 쓰였다.
명록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는 자신도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등을 돌려 앉으며 수진의 시선을 피했다.
하아...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날카로운 감정의 소모 이후라 더욱 허탈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목적 없이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수진의 자판소리가 등을 계속 뜨겁게 달구는 가운데
불편한 마음을 감추려고 인터넷 웹브라우저를 클릭했다.
익숙한 싸이트 명이 보이는 듯 하더니
어느 정도 내려오던 화면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랫부분을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이미지와 글들이 나오다가 잘려버린 채 계속 동그라미만 돌아가고 있었다.
젠장.....
명록은 속으로 욕을 하며 웹브라우저를 닫아버리고 다시 실행했다.
그러나 마찬가지.
갑자기 밀려오는 짜증.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하고 다른 주소를 입력했다.
엔터키를 두들기자 입력한 싸이트로 연결되며
화면에 프린터에서 출력되는 것처럼 주르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중간부터 지워진 채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닫았다 다시 클릭해서 열었다를 반복하면서 속만 부글부글 끓을 뿐이었다.
불편한 감정.
짜증스러움.
여전히 가슴은 답답하고 마음은 불편했다.
그때 문득 스치듯 떠오르는 수진의 말.
" 나도.... 오빠한테 할 말도 있고....."
할....말?
할 말이 뭐지?
명록이 순간 고개를 돌려 수진을 힐끔 엿보는데
갑자기 진동과 함께 경쾌한 벨소리가 들렸다.
움찔 놀라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데 수진이 휴대폰을 집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인상을 찌푸리곤 탁 탁자에 엎어버렸다.
누구한테 온 문자인데....
저러는 거야?
그러나 바로 이내 다시 울리는 알림 벨소리.
수진은 살짝 찌푸린 채 다시 휴대폰을 집더니
액정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휴대폰 자판을 두들겼다.
전송을 눌렀는지 바로 탁자에 내려놓는데 다시 바로 알림이 울렸다.
수진의 눈이 가늘어지고 미간의 주름이 짙어진 상태에서
다시 내용을 확인하는데 바로 또 벨소리가 들렸다.
" 아이... 정말 이 기집애...... "
수진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휴대폰의 밧데리를 분리해버렸다.
순식간에 몸이 두 개로 나누어져버린 그녀의 전화기가 탁자 위에 흩어졌다.
명록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 누구한테 온 건데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무슨 일 있어? "
수진은 명록의 말에 약간 당황하는 듯 표정을 짓더니 바로 답했다.
" 아.....아냐. 자꾸 영연이 장난쳐서.... 됐다고 하는데도 계속 문자 보내잖아. 짜증나게.... "
" 무슨 장난? "
" 아무것도 아니야.... 아... 나 화장실 좀? "
수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그녀가 그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한 느낌.
알 수 없는 위화감.
명록은 그녀가 들어간 욕실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에 분리되어버린 수진의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살인 현장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듯한 휴대폰 모습에 절로 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휴대폰.
욕실.
둘 사이를 번갈아가며 몇 번을 보던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수진이 앉아있던 소파로 향했다.
당황하던 수진의 표정.
약간 떨려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
무슨 문자였을까?
장난?
영연이 뭐라고 문자를 보냈길래.....
그 해답이 지금 바로 눈앞에 있었다.
수진의 핸드폰.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연히 여자 친구라고 해도 그녀만의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휴대폰 문자를 자신이 이렇게 봐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 말아야할 일.
선을 넘어가는 행동.
남자친구라고 해서 이런 것을 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망설임.
그러나.....
왠지 확인해봐야할 거 같은 생각이 점점 커져만 갔다.
수진이 그간 조금씩 변한 것처럼 느끼게 했던 것들에 대한 해답도
왠지 지금 저 분리되어 내동갱이 쳐진 휴대폰 문자 속에 있을 것만 같았다.
" 내가 남한테 왜 그런 돈을 받아야하는 건데! "
순간 예전에 울려 퍼지던 수진의 목소리가 다시 살아났다.
남.
명록 자신은 수진을 단 한 번도 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수진은 분명 자신을 <<남>> 이라고 말했다.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라고 애써 덮어왔지만 그게 진심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수진이 들어간 욕실을 다시 보았다.
아직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그만 두려면 여기서 그만 두자.....
휴대폰을 보면....
돌이킬 수 없을지 몰라.
장난이라잖아.
방금 전 나하고 싸워서 수진이 날카로워져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그래서 좀 과격하게 행동하는 거야.
명록은 뻗었던 손을 다시 움츠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알아야할 것이 저 안에 있다면?
혹시....
영연이 보낸 게 아니라면?
그의 마음에 우르르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천둥번개가 쳤다.
순간 바로 움츠렸던 그의 손이 움직여서
수진의 핸드폰을 집었고 이내 밧데리를 끼워 맞췄다.
딸깍.
제 모습을 찾은 휴대폰을 돌려 액정을 바라보며 바로 전원을 눌렀다.
뾰로롱 소리와 함께 액정이 밝아지고 휴대폰 제조사 로고가 보였다.
일초.
이초.
삼초....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며 명록의 심장소리가 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옛날 잠든 어머니 몰래 집을 빠져나가면서
기나긴 거실을 살금살금 까치발로 걸어가던 그때처럼.
소파에서 주무시고 있던 어머니가 눈을 뜰까 얼마나 가슴 줄였던가.
지금 명록의 심장이 그때로 돌아간 듯 미친 듯이 뛰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뾰롱!
대기화면이 모두 열렸다.
현재 시간.
날짜.
그리고 자신과 수진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찍었던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쓰고 있었다.
함께 여행가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찍었던 행복했던 시간.
그런데 왠지 둘의 미소가 너무 흐릿하게 느껴졌다.
왜....
지금은 그때 같지 않을 걸까.....
순간 메시지 화면이 보였다.
보낸 사람.
영연.
명록은 졸였던 마음이 순식간에 확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망상은 망상.
남자애의 이름이라도 나올까 생각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병신...
쪼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피식 웃으며 문자 제목을 보는데 그의 얼굴이 순간 바로 굳어졌다.
눈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며 읽고 다시 읽었다.
영연이 보낸 문자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 어서 나와! 수민이도 내가 불러낼게~! ]
[ 너희 진짜 잘 어울리더라? 이 언니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잘해보랑께? ㅋㅋㅋ]
너희?
잘 어울린다고?
[ 자자~~ 니네 커플 사진. ㅋㅋㅋㅋ 완전 예술이지? ㅋㅋㅋ]
사진이라는 말에 명록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확인을 눌렀다.
이내 글자들이 있던 화면은 사라지고 천천히 이미지가 내려오고 있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화면 속 모습.
얼굴이 붉어져서 웅크리고 있는 수진의 얼굴.
싫은 듯 약간 고개가 옆으로 틀어져 있었지만 입가의 미소가....
미소가 분명 수줍은 듯 피어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남자애의 옆얼굴.
두팔로 수진을 감싸 안으며 그녀의 볼에 입술이 가까이 닿아있는 듯한 모습이
마치 방금 볼에 뽀뽀를 했거나 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쿵.
심장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무슨 장면인지 알 수 없는 그 한 장의 사진.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 수진의 얼굴이
그리고 자신은 본적 없지만 꽤 준수하게 생긴 남자애의 얼굴이 담겨져 있었다.
" 오빠~~~~~! 지금 뭐하는 거야?!!! "
순간 날카로운 수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명록의 목이 끼기긱 소리를 내며 열리는 철문처럼 힘겹게 돌아가고
그의 시선에 욕실 문을 열고 나온 수진의 얼굴이 들어왔다.
창백한 수진의 얼굴.
아니 붉어진 그녀의 볼이 핏기 가신 하얀 얼굴 속에서 더욱 선명히 시선에 잡히고 있었다.
그리고 사납게 올라간 눈썹이 현재 수진의 감정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중이었다.
저벅저벅.
그녀의 맨발이 모텔의 바닥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명록에게 다가와서 그의 손에 있던 휴대폰을 잡아채듯 빼앗아갔다.
그리고 바로 따지듯 소리쳤다.
" 머....머하는 거야? 지....지금 내 휴대폰 마음대로 본거야? "
사진 속의 홍조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붉어진 수진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명록은 극렬한 반응의 그녀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싸늘해진 마음.
그 안에서 여러 감정이 천천히 저어지는 숟가락 안에서 섞이는
생과일 요거트처럼 서서히 으깨지며 회오리 무늬를 만들었다.
분노.
허탈.
배신감.
그리고.......
천천히 진하게 자신의 색을 들어내는 감정.
질투.
수진의 뺨에 입술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남자애의 옆얼굴이 어른거렸다.
매끈한 턱선.
누가 봐도 잘생긴 녀석의 얼굴.
대학생답게 샤프한 용모의 활기찬 모습.
명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누구야? "
조용히 낮은 음성이지만 수진을 향해 정확히 전달되고 있었다.
딱딱해진 그의 목소리.
그의 심상치 않은 표정이 더욱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 누구냐니? 무슨 소리야?! "
여전히 높은 음색의 수진이 말을 받았으나 아까보단 확실히 기세가 꺾여가고 있었다.
명록은 절로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 사진 속..... 남자애. 잘 생겼더라. "
" 뭐? 사진??? "
순간 수진은 핸드폰을 들어 액정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확 표정이 바뀌는 그녀.
당황하며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명록이 한발 빨랐다.
" 정말 어울리던데? 언제부터야? 수...민이라는 애가 그 애인가 보네? "
" 오빠! 오...오해야. 그 애는 그냥 같은 학번 동기인데..... "
" 요새 만나지 못하고 그랬던 게..... 이래서 였군. 하아..... "
점점 비꼬는 듯 말하는 명록의 말투에 수진의 표정도 다시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눈썹이 위로 올라가며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 오빠.... 말이 심하잖아. 대체 무슨 의미야, 그게!? "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19)>> 끝 =>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20)>> 으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