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18)
189.
심심했다.
무료했다.
수진을 안고 싶었다.
끌어안고 장난치고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싶었다.
뜨거웠던 아까 수진의 표정이 겹쳐지면서
명록의 마음에 조급함이 보글보글 소리 내며 끓어올랐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그의 갈증을 풀어줄 사랑스러운 여친이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수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녀 말대로 빨리 끝내고 오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떠한 자신의 행동도 그것을 가져올 수 없는 것임을 명록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
명록은 시선을 돌리고 벽에 거린 커다란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티비....라도 볼까?
봐도 될까?
슬쩍 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명록은 이제 완전히 잊어버린 것인지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조차 모른 체 리포트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이렇게 기다려야한다는 것이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다.
에잇!
모르겠다.
젠장.....
전원 버튼을 누르자마자 웅 소리와 함께 화면에 환하게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들.
순간 움찔한 명록이 바로 볼륨을 줄이고 수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아까와 다를 바 없었다.
약간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노트북만 두들기고 있었다.
명록이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니
한참 웃는 얼굴로 연예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워 넘기며 낄낄 거리는 중이었다.
바로 채널을 변경하자 오래된 트로트 가수가 한참 열연하는 화면으로 바뀌었다.
다시 꾹 누르자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가득 찼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방송된 액션 영화.
꾹.
간드러진 목소리로 상품을 홍보하고 있는 호스트의 목소리.
꾹.
기독교 방송
꾹.
체 일분도 채우지 못하고 화면이 계속 돌아갔다.
제법 많은 채널이 있었지만 명록의 손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 오빠! "
순간 수진의 목소리가 명록을 부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수진의 미간에 주름이 짙어진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바로 말이 이어졌다.
" 오빠 티비 좀 끄면 안 돼? 자꾸 채널 돌려대니까 정신이 사나워서 글을 못 쓰겠어! 차라리 컴퓨터로 인터넷 보는 건 어때? "
" 아... 알았어. 그래. 그럴게."
명록은 바로 티비 전원을 끄고
방구석에 자리 잡은 컴퓨터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작은 모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PC본체의 전원을 누르자 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윈도우의 시작화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낡아 보이는 겉모습 답게
첫 바탕화면이 나오는 시간도 한참 아주 한참을 걸렸다.
마침내 뜬 파란화면을 보면서 명록은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원해서 킨 것이 아니었다.
수진의 목소리에 도망가듯 왔을 뿐이었다.
하아.....
순간 계속 수진에게 들어왔던 말이 떠올랐다.
" 오빠.... 조금만 참아..... 이제 곧 방학이잖아...... 방학하면 우리 같이 있을 시간 많아질 테니까.... 자주 못 만나도 이해해줘? 대신 내가 방학하면 진짜.... 오빠하고 많이 만날 거야..... 응? 오빠~ 미안해~~ 사랑해~~ "
방학....
여름방학.....
그래....
수진이가 방학하면.....
같이 여행가자....
하자마자 바로~~~!
기말고사 후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니 조금 마음에 힘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미리 예약하고 그러려면 대충 행선지라도 잡아야 될 거 같았다.
명록은 조심스럽게 돌아보며 수진을 불렀다.
" 저기... 수진아. "
" 으응? "
다행이 수진이 바로 말을 받아주었다.
" 우리.... 너 방학하면 바로 여행갈까? 넌.... 바다가 좋아.... 산이 좋아? "
" 글쎄....? "
수진은 프린트 물을 헤집으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잠시 멈추고 바라보며 말을 해줬으면 좋으련만
바쁘게 부산을 떠는 그녀에게 그것까지는 무리인 듯 싶었다.
명록은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말했다.
" 이박삼일정도 갔으면 좋겠는데.... 너 시험 끝나고 시간 낼 수 있어? "
" 응.... 어디든 좋아..... "
" 아니... 시간 낼 수 있냐고..... 지금 우리 갈만한 곳 찾고 있는데..... 가고 싶은 데 없어? 아님 산이나 바다에서 골라볼래? 내가 찾아볼게. "
" 으응.... 괜찮아..... "
" 그러지 말고 그냥 산이나 바다 하나만 말해봐. "
" 아... 그래...... "
다시 자판을 두들기며 고개만 끄덕이는
수진의 멍한 대답이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명록은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냥 잠시라도 자신을 보고 대답하면
그 뒤는 알아서 할 텐데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노트북 만을 바라보는 수진에게 서운함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건성으로 대답하며 성의 없는 그녀의 태도에 그간 지켜보며 기다리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커지는 목소리.
화가 나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쇳소리를 내며 수진에게 날아갔다.
" 수진아! "
갑자기 쩌렁쩌렁 울리는 명록의 목소리에 그녀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전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수진의 표정에 명록은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 시험 끝나면 여행이라도 같이 가자고 묻고 있잖아! 듣고 있는 거야? 산이나 바다만 정해주면 알아서 찾아본다고 하잖아. 너.....그거 하나 정해주지도 못해? "
" 여행? 아... 오빠 미안해.... 제대로 못 들었어.... 근데.... 우리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
" 나중? 나중에 언제!? "
명록의 목소리가 여전히 높고 날카롭게 울렸다.
수진은 살짝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눌러 대답했다.
" 오빠.... 나 리포트 써야 돼. 내일 정오까지 당장 제출해야하는걸. 그리고 월요일 날 제출해야하는 게 네 개나 있어. 나 정말 급한걸.....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
" 내가 언제!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
" 지금 내잖아. 정말 왜 그래?! "
마침내 수진의 목소리도 한 옥타브 올라가 튀어나왔다.
명록은 머리가 찡하고 울리며 뚝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 그럼... 그럼 넌 리포트만 쓰다가 가겠네? 오랜만에 같이 있는 거잖아! 그렇게 혼자 리포트 쓸거면 우린 왜 만난 건데?! 대체 난 아무것도 못하고 왜 이렇게 있어야 되는 건데!!! "
" 오빠~~~~~!!! "
마침내 수진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며 방 안을 채웠다.
" 오빠!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얘기했었잖아. 나 리포트 때문에 바쁘다고. 오빠도 알고 있잖아! "
수진의 목소리가 빠르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방 안에 윙 하는 소리를 남기고 회오리처럼 맴도는 느낌.
명록이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져서 쏟아졌다.
" 오빠도~! 오빠도 말했잖아. 만나서 같이 있을 때 리포트 써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으니까 만나서 같이 있자고 한 거잖아! 근데 오빠가 이럼 내가 어떻게 리포트를 쓰겠어? 대체 왜 그래! "
카랑카랑한 목소리.
어쩌면 수진이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바늘이 가득 들은 주머니를 꽉 움켜쥔 것처럼 그녀의 말이 하나하나 명록의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알면서도.....
지금 그녀의 말이 맞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명록의 가슴에 멍울처럼 남아있는 것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리포트....
리포트.......
그래....
리포트를 써야한다고 했지.
저번엔 시험....
그전에 엠티.....
삼학년이 되어서 정신이 없다고.....
정말 그것뿐일까?
" 오빠.... 오빠 오늘 좀 이상해. 언제나 나 힘내라고 하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고 그랬잖아. 오늘 대체 오늘은 왜..... 왜 그러는 건데? "
알아.....
성적이 중요하다는 거.
수진이 넌 언제나 자신의 할 일은 똑 소리 나게 해왔다는 거.
근데....
근데 왠지 날 멀리하는 듯한 느낌은 뭐지?
언제나 핑계만 대고....
점점 만나는 날이 줄어드는 게.....
정말 그냥 바빠서 그런 거야?
" 나도 힘든 걸..... 오빠가 나 좀 이해해 주면 안 돼? 방학하면..... 방하.... "
수진이 말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인상으로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히고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분노 보단 오히려 물기가 점점 번져가고 있었다.
명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계속 여러 가지 말이 맴돌았다.
또.....
또 말을 삼켜버리고.....
언제나 말을 하려다가 넌 삼켜버리잖아.
왜 나한테 모두 얘기하지 않는 거지?
" 방학하면 머....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데......? "
가만히 수진의 말을 듣던 명록이 입을 열었다.
약간 쉰 듯한 목소리.
갈라진 낮은 음색이 방에 힘없이 흩어졌다.
" 아니야..... 하아.... 그만 하자..... 우리.... 힘들게 같이 있는 거잖아........ "
수진의 깊은 한숨.
그리고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명록은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
정말.....
힘들게 같이 있는 거지.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기 힘들어진 거지?
수진이 너.....
그냥 단순히 모텔에 가고 싶지 않았던 거야?
만나도 잠깐....
잠깐만 얼굴 보고 휙 집으로 가버리고....
너...
나하고 섹스 하는 게 싫어졌던 거야?!
순간 승필 선배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다.
" 바람을 필 때도 종종 그러니까... "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18)>> 끝 =>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19)>> 으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