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17)
190.
도시와 동떨어진 옥상.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한낮의 햇볕을 쬐고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처럼 침대에 누워서 나른하고 여유로운 정사 후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따스한 느낌.
포근함.
계속 무언가에 쫓기듯 힘껏 달려왔던 터라
수진에게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추운 겨울,
차가웠던 한밤의 기억......
엘리베이터 앞에서 떨어지기 싫어서 한참동안 한사람처럼 달라붙어
아쉬운 이별을 나누기도 했었는데, 이젠 잠시 짬을 내어 얼굴 만이라도 볼 수 있는 것조차도 줄어들고
서로 만나기조차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상한 사연들이 얽히고 섥혔지만 결론은 모두 수진의 탓이었다.
먼저 욕실에 들어간 명록을 보며 망설였던 순간까지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주려고 명록이 감춰두었던 작은 선물 상자를 보는 순간
고맙거나 사랑한다 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미안함이 떠오른 것은
이 모든 것이 자기 스스로의 잘못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생각해도.....
명록 그에게 미안해야할 일들 다섯 가지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행복하게 느끼는 지금.....
당장 모든 걸 명록에게 말하고 해결할 순 없었다.
조금.....
그가 실망할까봐 걱정스럽다.
그렇게 내가 의지가 되지 않느냐고 물을까봐 두렵고,
저번처럼 이해해주지 못하고 충돌할 것 같아 망설여졌다.
수진은 눈을 감고 명록의 품 안 온기를 느끼며 단단한 그의 가슴에 손가락을 얹은 채 생각했다.
그래.....
하나씩 풀어 나가자.
하나씩 이유를 설명하면
오빠도 이해 해줄 거야.......
집,
친구,
그리고 학교,
연애.
모두 각각 다른 일들 같지만 어느새 서로 얽혀서 영향을 주고 있었다.
명록에게 설명해줄 말을 고르던 수진은 갑자기 떠오른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앗!?
리....리포트!!!
지금 몇 시지?
모텔에 오기 전 속옷마저 신경 쓰는 것도 잊고 챙겨 왔것만,
내일 오전까지 제출해야할 과제를 여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직 초안 밖에 잡지 못한 상태였다.
오면서 명록과의 약속이 부담스러웠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을 정신없이 만들었던 그것.
그 이유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명록과의 시간은 달콤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명록의 품에 안겨 있던 수진은 서둘러 휴대폰을 찾아 손을 뻗었다.
이내 잡히는 휴대폰의 느낌이 차갑게 느껴졌다.
얼굴로 가져와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환하게 들어온 화면에서 보이는 시간.
밤 10시.
아....
벌써?????
모텔에 들어온 지 별로 얼마 된 거 같지도 않았는데,
과제 제출 마감까지 체 열네시간도 남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수진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명록의 팔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챙겼다.
일단 발등에 당장 떨어진 급한 불을 먼저 끄는 게 우선이었다.
수진이 자신의 품에서 서둘러 빠져나가자,
천천히 잠에 빠져드는 것 같았던 명록도 깜짝 놀라 눈을 뜨는 모양이었다.
그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상체를 살짝 들어서는 갑자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수진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
폭풍 같은 정사.
몸이 으스러질 거 같은 섹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떠오르는 장면의 주인공이 실제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하지만 찰나와도 같은 그 순간이 지난 뒤
느끼는 안락함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었다.
수진이 가슴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명록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안아 쥐었다.
좋은 향기.
매끄럽고 보드라운 피부.
땀에 흠뻑 젖어서 축축함이 남아있었지만
학창시절 체육복이 젖도록 뛰고 나는 그런 퀴퀴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수진을 안았지만 자신을 원하고 갈망하는 그녀를 보면서
명록은 조금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그냥 기우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그녀가 그럴 리 없다고....
이렇게 사랑스런 그녀가 마음이 멀어지고 있을 리 없는 거라고....
이대로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서서히 잠에 들고 싶었다.
천국.
극락.
어떤 단어로 표현한다고 해도.....
지금 수진과 함께 있는 이곳이 바로 파라다이스였다.
그렇게 잠이 들려는 순간 갑자기 팔을 밀어내며
따스한 온기를 나눠주던 수진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밀려드는 허전함.
그녀의 공간이 텅 빈 공기로 채워지며 차가운 침대 시트만이 외로운 팔을 반기고 있었다.
아까의 정사로 피곤해진 눈을 억지로 떠서
수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니 주섬주섬 팬티를 입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갑자기 옷을 챙겨 입는 수진을 보니 마음이 다시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연인 사이 속옷을 입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 둘 밖에 없는 공간에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버리고 옷으로 가린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무엇인가.
왠지 저 한 겹의.....
얇고 작은 천 하나가 그녀와 자신을 가로막는 장막처럼 느껴졌다.
거기에다가 모텔에 준비되어있는 가운까지 입은 그녀가
작은 소파와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치고 가방에서 하나씩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전공책.
프린트물.
평소 쓰지 않는 안경까지 쓴 수진의 모습.
그리고 이내 그녀는 자판을 두들기며 열심히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타닥타닥.
타닥.
타닥 타다닥.
조용한 방에 들리는 자판 두들기는 소리가
마치 리듬을 알리는 캐스터네츠처럼 때론 작게 때론 빠르게 울리고 있었다.
사박사박.
안경테 너머 수진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고
두꺼운 복사용지를 넘기는 그녀의 손가락이 바쁘게 페이지를 누볐다.
잠시 프린트 물에 머물던 시선이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향하고 다시 자판 위를 그녀의 손가락이 누비고 있었다.
다시 들리는 자판 두들기는 소리.
명록은 수진을 지켜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손에 남아있는 그녀의 체온.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행복이 저 앞에 있었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 수진아~~~ "
하지만 그녀는 명록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계속 노트북 화면을 보며 글을 작성하고 있었다.
명록은 좀 더 목소리를 높이며 서서히 그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침대 스프링이 그의 팔이 딛는 대로 눌리며 삐익 소리를 냈다.
" 수진아~ 이리로 와~ "
" 어? "
수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콧소리를 냈다.
여전히 그녀의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명록은 부드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 이리와. 우리 조금만 같이 누워있자. 응? "
" 안 돼..... 나 바빠.... "
또각또각.
그녀의 손이 느려지면서 자판 소리가 절도 있게 걷는 발걸음처럼 작고 규칙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명록이 기다리는 침대로는 전혀 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결국 침대를 떠나 수진에게로 다가갔다.
등 뒤에서 와락 껴안으며 얼굴을 그녀의 볼에 비볐다.
어깨를 감싼 손이 가운 안으로 들어가며 보드라운 그녀의 젖가슴에 자연스럽게 닿았다.
말린 과실 같은 젖꼭지가 유들거리고 명록은 자신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말캉한 가슴이 손가락 사이로 한가득 들어왔다.
" 아이~ 이러지마~~ "
수진은 명록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말했다.
" 나 빨리 리포트 써야한단 말이야. 내일 정오 전까지 내야 해. "
" 그러니까.... 잠시만 같이 누워 있다가 쓰면 안 돼? 이리와....... "
명록의 입술이 수진의 귀를 베어 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순간 수진이 벌떡 일어서며 조금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 오빠~!!! 정말 왜 이래! 나 급하단 말이야~! "
수진의 시선이 명록을 향하고 볼이 살짝 붉어져있었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지고
그 안에 짜증이라는 감정이 버물어져서 강하게 그에게 쏟아졌다.
장난스럽게 접근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음을 깨달은 명록은 머쓱해져서 물러섰다.
그의 뻘줌한 표정을 보며 수진이 미안했는지 높아졌던 목소리를 급히 낮추며 조근조근 말했다.
" 오빠.... 나...... 정말 급해.... 빨리 쓰고.... 나도 오빠랑 놀고 싶은 걸. 그러니까 응? 제발..... 응??? "
먹이를 두고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주인을 바라보는 듯한
강아지의 눈망울로 바라보는 수진의 시선에 명록은 시무룩해지면서 입을 열었다.
" 으응..... 알았어..... 어서 쓰고 놀자. "
그는 수진에게서 떨어져서 남은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명록이 멀어지자 그제야 수진은 다시 소파에 앉아서 리포트를 쓰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타탁타닥타닥.
수진의 타이핑 소리가 점차 속도를 높이고 처음 빨리 움직이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다시 방 안에는 그녀의 자판 소리 만이 채워졌다.
명록은 침대에서 누워서 수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분.
십분.
이십분.....
시간이 흐를수록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녀 만을 기다리며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괴로운 것인지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달팽이가 나들이 가는 듯한 시간의 흐름.
손만 뻗음 바로 닿는 거리에 수진이 있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멀리 있었다.
하아....
왜 리포트 써도 된다고 했을까....
아니....
그러지 않았으면 만날 수도 없었을 거야....
그래...
어쩔 수 없었어....
근데....
이게 머야?
그때 리포트에 집중하고 있는 수진의 손이 잠시 멈추고 안경테를 위로 밀어 올렸다.
노트북 모니터를 좌우로 훑어보며 입술이 연신 뻐금거리며 움직였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이 이리저리 테이블을 가로지르고
쭉 아래로 시선이 내려가는 것을 보며 명록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벌써 끝난 건가?
그러나 바로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수진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자판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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