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13)
184.
모텔에 입성한 이유라면 단 한 가지.
섹스.
동화처럼 뻔한 전개, 뻔한 결말이지만
미처 다 지워지지 못한 불안 때문에 망설여졌다.
아직 방에 들어가기 전이니깐 지금이라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명록은 예정된 역으로 출발하는 기차처럼
그들에게 주어진 방을 향해 힘차게 걷고 있었다.
앞서 걷던 명록은 옆에 수진이 없는 걸 깨닫고는 머뭇거리며 복도에 선 수진에게 다가왔다.
너무 섹스 위주가 되었던 지난 데이트를 생각하면서
수진은 이제와서 풋풋한 데이트를 바라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니 처음 술을 마시고 그와 모텔에서 하룻밤을 같이 하면서 시작된 연애였다.
어쩌면 그녀가 바라는 단계는 영원히 갈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시험을 앞두고 잔뜩 쌓인 리포트들.
만나기 전까지도 열심히 쓰다가 온 과제물들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평일 연일 오늘을 생각해서 열심히 시간을 다받쳐서 썼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내일 명록과 헤어지는 시간이 만약 늦어진다면
정말 아슬아슬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드럽게 다가와서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같이 이끄는 명록의 얼굴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너무도 밝은 표정.
기대감에 차있는 미소.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명록은 눈동자마저 웃고 있었다.
명확하게 그가 원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사지선다의 문제에서 그녀가 생각한 답이 빠져있는 것처럼
명록의 태도는 아예 수진이 섹스를 거부할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물론 그와의 섹스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너무 좋았기에 더욱 수진의 고민이 깊었다.
그의 품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기에
남겨져 있는 것들에 쓰일 시간마저도 모두 사라질까 걱정이었다.
긴장과 고민으로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손끝에 뜨거움이 닿았다.
수진의 손가락을 감은 굵고 긴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덮어왔다.
길었던 연애의 출발지로 돌아간 듯,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뜨거운 손에 이끌려 수진은 저도 모르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쿵.
두 사람을 삼켜버린 문이 굳게 닫히고,
둘만의 공간으로 변해버린 방 안에서 명록은 잡고 있던 손을 잡아 당겨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부딪혀왔다.
가슴 속에 자리 잡은 불안은 세게 끌어안는 억센 팔의 압력에 터져버리고,
입술 사이를 빼꼼히 들어오는 부드러운 혀의 감촉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약간 까칠한 수염의 느낌.
끌어안고 있는 탄탄한 팔 못지않게 강하게 눌러오는 그의 입술.
수진은 손을 올려 명록의 목을 감싸 안고 그를 쭉 빨아 당겼다.
그의 몸이 그녀의 쪽으로 기울면서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쓰러질 듯 위태하게 서있는 그녀의 몸을 지지하듯
명록의 하반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밀착되고
수진의 허리를 받히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감촉.....
그것은 분명 딱딱하게 부풀어 오른 명록....
그것의 느낌이었다.
무엇인지 깨닫자 수진의 머리로 어지러워졌다.
얇은 옷감 사이 느껴지는 명록의 분신.
그리고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숨소리가 수진의 가슴도 빠르게 뛰며 같이 거칠게 만들고 있었다.
수진은 앞에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그의 청바지가 불편할 것 같아
서둘러 버클을 풀고 바지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자못 딱딱한 바지 안에서 갇혀 있는 그것이 아플 거 같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명록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그의 손이....
아니 온몸이 수진의 구석구석을 더듬고 스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쿵쿵 뛰는 심장고동소리.
뜨거운 숨결을 내뿜고 있는 빠른 숨소리.
그녀의 혀를 간질이는 것도,
목 언저리에 닿는 뜨거운 명록의 숨결도,
가슴을 움켜쥐는 뜨거운 악력도,
모두 잠시 잊고 있던 감각들이었다.
약간 거칠고 서두르는 명록의 손길 속에서
가뭄에 내린 단비처럼 서서히 피어나는 쾌감에
그녀의 샘은 당장이라도 그를 원하며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자신이 바지를 풀어헤치는 수진의 손을 따라
명록도 금세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하나 풀고 있었다.
순간 수진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속옷을 입고 나왔지???
노트북.
그리고 전공책과 필기한 노트.
리포트에 필요한 유인물들을 빠짐없이 챙겨 나오느라
정작 안에 있고 속옷에는 신경 쓰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시간에 쫓겨서 서둘러 나오느라....
정신없이 화장하고 새로 속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뛰쳐나왔음을 깨달았다.
악~!
바보...
정작 중요한 건 잊고 있었잖아~!
물론 속옷을 하루에 한번 갈아입는 그녀가
오래 입은 속옷을 입고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편하게 손에 잡히는 대로 골라 입었던 터라
명록을 만나면서 다시 맞춰 입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준비에 정신이 팔려서는 집을 나서면서 그만 그것을 빼먹고 나와 버린 것이었다.
섹시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바나나와 원숭이가 가득 채워져 있는,
유치한 프린트의 브래지어,
그리고 역시나 섹시함과 일억 광년쯤은 떨어져 있음직한 면팬티.
거기에다가 서로 짝도 다른 그것의 조합을 생각하니
허걱 하는 충격으로 수진은 뒤로 몸을 틀며 명록의 손길을 피하고 있었다.
" 오....오빠. 내가 벗을게, 이거 벗기가 힘든 옷이라..."
아...
하필이면 입어도 왜 이런 걸 입었지?
으.....
게다가 짝짝이라니...
으으.....
명록과 밤을 지세우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인데,
속옷도 까맣게 잊고 리포트 쓸 준비에만 신경 썼던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원망했다.
아무리 달아올랐던 남자라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속옷을 본다면 흥분이 가실게 분명했다.
아니 그간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질지도 몰랐다.
" 그래? 아....알았어..."
명록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벗기기 힘든 옷이라는 말에 괜히 고집을 피웠다가
옷을 망가트렸다가는 수진의 타박을 들을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미 예전에 벗기 힘든 원피스 지퍼를 내리다가 망가뜨렸던 일이 있었던 터라
감히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할 일을 잃어버린 명록은 수진이 미처 벗기지 못하고 남은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수진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혹시라도 입고 있는 속옷이 보여
분위기가 깨질까봐 최대한 느릿느릿 단추를 풀었다.
유난히 단추가 많은 옷이라 입을 때
귀찮았는데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수진은 마음에 들었던 옷이 안보여 어쩔 수 없이 골랐던 옷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정말 꿈에서도 몰랐다.
" 내가 도와줄까?"
갑자기 들리는 명록의 목소리.
그는 이미 몇 개 걸치지 않았던 옷가지들을 모두 벗어서 알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겉옷을 벗는데도 헤매는
수진이 답답했는지 아니면 도와주고 싶었는지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깃으로 곧장 다가오는 명록의 손길.
" 아.. 안 돼... 아냐, 오빠 먼저 가서 씻고 있어. 나도 바로 벗고 들어갈게."
수진의 몸이 빙글 돌아 아슬아슬하게 손을 피했다.
명록의 손이 머쓱하게 공중에 머물렀지만,
수진에게는 거절당해서 민망할 명록보다,
자신의 촌스러운 속옷을 보여준다는 걸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피한 이유를 모르는 명록은 수진의 행동에 조금 상처 받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수진은 명록이 욕실에 들어가야 옷을 벗을 수 있으니 무리해서라도 그를 욕실 안으로 떠밀어야 했다.
" 어서 들어가. 나도 바로 들어갈게. "
수진의 매몰찬 거부.
결국 명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등이 떠밀리듯 욕실로 향했다.
그가 들어가고 욕실 문이 닫힌 후....
곧 이어서 샤워기에서 쏘아진 물들이 타일에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명록이 다시 나오지 않으리란 확신이 든 수진은 한숨을 내쉬며 연기를 끝냈다.
어서 후다닥 단추를 풀어헤치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유치한 속옷을 들킬 새라 빠르게 벗어서
그녀가 벗어둔 옷 사이에 돌돌 말아 가방 안에 숨겼다.
휴우......
옷을 정리하고 난 뒤에 허리를 펴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녀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바닥에 남겨있는 명록의 옷.
그녀의 옷들은 모두 가방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는데
뱀 허물처럼 벗어놓은 명록의 옷가지들은 방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으.....
못말려....
그리고 문뜩 떠오른 생각에 굳어버렸다.
오빠가 내 옷만 정리한 걸.....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
자신의 옷만 정리된 모습이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촌티나는 속옷이 연결되며
결국 수진은 완전 범죄를 꿈꾸는 누군가처럼 명록의 옷가지들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청바지를 들어 개고 있는데 호주머니 안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제법 두께가 있고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느낌.
지갑이라고 하기엔 너무 두툼하고 그리고 작았다.
뭐지???
이런 걸 넣고 다니면 불편할 텐데.....
수진은 아무 생각 없이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정체를 확인했다.
그녀의 손에 작은 상자가 세상 밖으로 빠져나왔다.
손바닥만 한 짙은 파랑색의 상자가 푸른빛이 감도는 은빛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상자의 색감부터 고급스러워 보이는 게 누가 봐도 쥬얼리가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포장에 사용된 리본에 프린팅 되어있는 브랜드 로고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삼십 대 여성들 사이에선 꽤 유명하기도 하고,
가끔 백화점을 들락거릴 때 눈으로 보고만 지나쳤던 쥬얼리 브랜드였다.
설마....
반지?
아니면 귀걸이 인가?
하지만 이미 수진의 왼손 약지를 빛내고 있는 커플링이 있는데
그녀의 손에 지금 있는 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
명록이 준비한 이 작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
대체 무엇일까?
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 흔들어서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역시 포장 안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오늘...
무슨 날이었을까?
로맨티스트인 명록은 그녀의 생일이나 기념일은 빠짐없이 챙겨 왔었다.
이리저리 곤란하다고 말하던 수진에게 오늘은 꼭 만나려 했던 그의 태도도 그렇고
이런 선물까지 준비한 것이 혹시라도 그녀가 잊고 있었던 날이 있었나 하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더듬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계산해보고 되돌아보아도
그나마 가장 가까이 있는 일주년 기념일도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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