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11)
182.
그래도 지금 당장은....
명록이 보여주는 반응으로 웃을 수 있는 감정이 더욱 컸다.
수화기 너머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명록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수진은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아휴...
저렇게 좋을까....
정말 못말려...
울 오빠...
후후....
처음엔 자꾸만 섹스 만을 하려는 명록과의 줄다리기가 싫어서
피해왔던 데이트였지만 내심 이러는 자신의 모습이 심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자면....
어쩌면 그가 자꾸 모텔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자신이 자꾸 이리저리 몸을 빼고 있는 것 때문에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원래 남자들은 욕구를 참기 힘들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자들에 비해서 성욕이라는 것을 주기적으로 풀어주면 안 되는 것이
남자들의 본능이라고 친구들이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꾸만 명록이 육체적인 관계만 요구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수진이 꺼려하는 느낌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어서 예전보다 더 많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막상 또 만나서 데이트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움츠러들면서 그의 손길을 멀리하게 되었다.
자신도 알기 힘든 자기 자신의 마음.
이래서 여자의 마음을 갈대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만나자고 조르고 같이 밤을 보내자고 말하는 명록을 보면서
어쩜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면 한숨을 쉬었을 지도 몰랐다.
뭐 사실 통화하면서도 곤란함에 절로 소리죽여 한숨을 내쉬었지만
또 한편으론 그런 그의 모습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거라
생각이 들면서 수진도 그를 따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참....
바보 같은
우리 오빠....
수진은 환하게 웃고 있는 명록의 얼굴을 상상하며 생각에 빠졌다.
아까 보았던 수민의 얼굴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었다.
명록.
그리고 수민.
능수능란한 말 주변과 훤칠한 외모를 소유한 수민.
거기에다가 수진을 좋아했었다고 말했던 그 아이.
분명 영연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나름 킹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수진은 그에게서 어떤 설레임을 찾을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 그녀에게 다가왔던 다른 남자들처럼 불편함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왜 그럴까.....
자신이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명록과 수민을 서로 나란히 세워놓고 여자들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아마 열에 여섯 일곱은 수민을 택할 거 같았다.
훗....
웃겨....
나도 정말.....
콩깍지라는 것에 씌었나 봐....
혼자 생각하면서 피식 웃기도 했지만 지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주변의 부추김에도 수민에 대해서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고 거북한 느낌만을 가지게 되는 이유.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명록의 웃음소리만으로도 환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
그리고 그의 밝은 웃음소리가 자신도 어느새 웃게 만들고 있는....
지금의 감정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수민이 객관적으로 괜찮은 남자일지는 몰라도,
가끔 조금 힘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서 보채는
명록이야말로 그녀에게만큼은 주관적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단 한명의 남자라는 것을.....
**************
명록은 얇은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고 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요일 밤.
거리엔 사람들의 발걸음이 왠지 가볍게만 느껴지고
주말을 맞이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왠지 해방이라는 느낌으로 밝아보였다.
웃음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남녀 커플들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들까지.
<<불금>> 이라고 했던가.
주5일 근무가 자리를 잡으면서 어느새 토요일 밤의 풍경이 그 전날 금요일로 넘어온 지 한참이 되었다.
휴일.
주말.
특히나 직장인들에게 금요일 밤처럼 신나는 시간이 있을까.
명록도 그들처럼 이미 마음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오늘은 수진을 만나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날.
그리고 긴 밤 같이 있으면서 그녀와 느긋한 시간을 같이 할 수 있는 밤이었다.
사실....
밤새 같이 있는다고 해도 그 시간이 길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모자라는 것이 수진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후훗.....
분명 잘 어울릴 거야....
아까부터 호주머니 안에서 움켜쥐고 있는 상자의 보드라운 촉감이 그를 설레게 하고 있었다.
만나서 할 수 있는 이벤트로 이것저것 찾아 보았지만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해 어쩔까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보게 된 사진.
그는 바로 외근 중에 해당 가게를 찾아가서 실물을 구경하였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심플하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디자인의 목걸이.
얇은 백금세공 체인으로 반짝거리는 가운데
마치 얼음 꽃이 피어있는 듯한 펜던트가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너무 예쁘게 보였다.
작은 다이아로 장식된 가운데 빛나고 있는 에메랄드가 수진처럼 맑고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반짝거렸다.
생각보다 가격은 조금 비싼 듯한 느낌이었지만 명록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사고 말았다.
예전부터 길고 가는 수진의 목선을 보며
특히 가슴이 훤히 보이는 그녀의 나시티 차림을 볼 때마다
그 텅 비어 있는 공간 안에 목걸이를 걸어주고 싶었다.
백옥 같은 그녀의 피부에서 반짝거리며 예쁘게 피어있을.....
에메랄드 목걸이를 상상하자니 절로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까치발로 종종 거리며 힐끔힐끔 역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시간은 아직 십여 분 남아있었지만
어서 수진을 보고 싶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순간 사람들의 모습이 많아지는 듯 싶더니 우루루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전철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시커먼 인파 속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눈동자를 좀 더 빨리 굴리며
자신이 기다리는 얼굴이 있는지 쉴 새 없이 찾아보고 있었다.
아!!!
수진아~!!!!
작은 감탄사와 함께 명록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만 많이 있지 않았다면 목청껏 불렀을지 몰랐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얼굴이 드디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약간 웨이브 진 긴 머리.
유난히도 큰 눈동자에 짙은 듯한 마스카라의 눈매가 오늘따라 더 깊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앵두빛 입술이 너무도 탐스러운 그녀.
수진이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아슬아슬 헤치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명록은 바로 그녀 쪽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러나 밀려나오는 인파를 헤치고 반대방향으로 나아가자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순간 남자들 사이에서 휩싸이면서 수진의 얼굴을 놓쳐버렸다.
이대로 엇갈리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
다시 마지막으로 수진을 보았던 곳으로 방향을 잡았으나
바쁘게 출입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 가운데서 제대로 방향을 잡을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초조함에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오빠~! "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역시 수진이었다.
웃음기 가득한 그녀의 얼굴.
명록은 반가움에 절로 그녀의 손을 맞잡을 수 밖에 없었다.
" 수진아~ 아..... "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에 명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수진은 헤헤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오빠 어디를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가는 거야? 난 척하고 보고 바로 불렀는데 엉뚱한 곳으로 가고.... 사람들 헤치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후후..... "
" 푸하..... 나도 너 보고 찾던 중이었는걸..... "
" 에이... 엉뚱한 곳으로 가던데....? 헤헤.... 우리 참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 오빠 왠지 얼굴이 많이 상했네? 많이 바빴구나? "
수진의 손이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
더워지는 날씨에서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다.
얼굴에 약간 기름기가 있지 않을까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그녀의 손길이 뺨을 쓰다듬는 것이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 머 그렇지..... 수진이 너도 좀 마른 거 같다..... 밥은 잘 챙겨 먹는 거야? 요새 과제 때문에 바쁘다고 하더니...... 그래도 끼니는 거르지 말아야지. "
" 후후후.... 나야 언제나 잘 챙겨먹는걸. 전~혀 하나도 안 말랐어. "
환하게 웃는 수진의 미소가 여전히 너무 예뻤다.
하긴 처음 그녀의 얼굴을 보았던 사진에서도 그 미소가 너무 귀엽고 예쁘게 보였었다.
활짝 웃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생글거리는 느낌의 미소에
한눈에 반해서 결국 그를 수진의 학교로 찾아가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아~ 오빠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조금 앞으로 가자. "
순간 수진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이 출입구 앞 쪽에서 나오는 사람들 사이 가운데를 가로막고 서있었다.
" 그래.... "
명록은 그녀의 손을 잡고 나가려는데 수진의 몸이 한번 흔들거리며 힘주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녀의 어깨에 쌕(sack)이 매달려있었다.
평소 귀엽고 예쁜 가방을 들고 다니는 수진이었는데 오늘은 제법 큰 쌕을 메고 온 모양이었다.
" 이론... 이건 뭐야? 무겁겠다.... 내가 들어줄게. "
" 그...그럴래? "
한손으로 그녀의 어깨에서 쌕을 받아들었는데 바로 쑥 팔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제법 묵직했다.
자신이 들기에도 무거운 쌕.
다시 힘주어 어깨로 옮기자 옆에서 보던 수진이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오빠.... 좀 무겁지? 노트북이랑 가져와야해서...... "
" 아니.... 무겁긴 머..... "
리포트를 써야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수진의 말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결국 다 쓰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가방 안에는 레퍼런스 자료들과 노트북, 책들이 들어있겠구나....
-생각하며 조금 마음이 씁쓸했다.
안타깝기도 하고....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 안되고 줄어들 것 같은 마음에 시끈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명록은 입술을 한번 굳게 다물었다가 마음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 흐음.... 머 좀 먹으러 가자. 아직 밥 안 먹었지? 우리 오랜만에 스테이크라도 먹으러 갈까? 근처 맛있는 레스토랑 있는데..... "
" 흠... 아니... 그냥 간단히 먹자. 오빠.... 아! 우리 해물떡찜 먹으러 갈래? "
" 해물떡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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