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1화 〉제2부.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10) (181/195)



〈 181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10)

181.

명록은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왠지 엄마에게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애가 된 듯한 느낌....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사탕을 받을  있다면
얼마든지 치마를 잡고 매달릴  있는 아이처럼
명록도 열 번이라도 졸라대고 싶었다.




" 하아.... 하지만.... 오빠  과제가 있는 걸....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단 말이야.... 그리고....."




잠시 말을 끊는 수진.
명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 외박은 좀.... 그런 걸..... 저번에도 늦게 들어가서 한참 엄마한테 잔소리 들었단 말이야..... "


" 그래도..... 너 기말고사 들어가면 일주일 넘게 얼굴 한  보기 힘들잖아..... 이번 주라도 같이 있음 안 되겠냐? 리포트 쓴다고 도서관에서 밤샌다고 해도 되잖아..... "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었다.
자신과 만나기 위해 수진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등을 떠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거짓말이야 예전에도 했었던 일이었다.
명록과의 하룻밤을 위해 이미 수진이 했었던 일 중 하나였다.



" 하지만..... "

그런데....
수진이 계속 말을 하지 못한 채 멈추고 말았다.
명록은 그런 그녀의 말을 기다리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나하고 같이 있는 게 싫은 걸까.....?

수진이 대학교 3학년이 된 뒤로 어느새 점점 늘어만 가는 일이었다.
명록도 그때가 1~2학년 때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갑자기 어려워지는 전공수업들.
매일 산 같이 쏟아지는 과제들.
학생들이 해당 교수님의 과목만 수강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정사정 없이 진도를 나가고 끊임없이 리포트를 요구하는 일상들.
명록 또한 겪었던 시기였고 또 이런 와중에 삐긋 엇나가게 되면
점점 좋은 성적과는 멀어진다는 건 이미 체험하기도 하고 직접 목격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좋은 성적에 욕심을 부리는 수진에게 학교  생활이 얼마나 빡빡하게 돌아갈 것인
분명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한번 만나기 위한 시간을 내기 위해 이렇게 실랑이를 해야 하는 것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고 함께 보냈던 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라도  보면 이상했던 날들에 비해 요새는 너무 만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하윤과의 술 약속 잡는 것이 더 쉽다고 느끼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 하아..... "




수진의 긴 한숨소리.
역시 안 되는 건가 생각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오빠 나 그럼 그날 옆에서 리포트 써야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

 망설임 끝에 나온 수진의 대답.



옆에서.....
리포트를 쓴다고?

그녀의 말에 잠시 명록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아예 만나지도 못할 거야 반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옆에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진이 이정도 양보를 할 줄은....
왠지 이것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그래. 그거야 머 어려운 일이라고...... 하하하.... 대신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까지 우리 같이 있는 거다? "

" 에휴.... 오빠도 참.... 못 말리겠다. 알았어. 대신 이번 주는 정말 평일에 보기 힘들겠다. "

어차피 지금까지도 이래저래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명록은 웃으면서 말했다.


" 하하하.... 그래그래..... 자꾸 만나야 된다고 안 그럴 테니까 편하게 과제 열심히 해. 이왕이면 만날 때  쓰고 오면 좋고. 하하하..... "

" 피이... 나랑 그렇게 같이 있고 싶었어? "


수진은 활짝 웃는 명록의 웃음소리에 자신도 웃음이 나는지 샐쭉 웃으며 삐죽거렸다.



" 푸하하.... 당연하지..... 체... 수진이  별로 안 좋은가 보다? "



" 에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나도 오빠하고 같이 있고 싶은 걸..... 그런데 요새 정말 시간이 없어.... 정말 나 힘들단 말이야. "



명록은 그런 수진의 말에 부드럽게 다독였다.



" 알았어 알았어. 대신 이번 금요일에는 진짜 같이 있는 거다? 오랜만에 팔베개 해줄게. "


그의 말에 수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체.... 리포트 쓰느라 벨 새도 없을 거 같은데? "


하하.... 내가 도와주면 되지 머...... "


순간 수진 목소리가 빠르게 변했다.



" 아~~ 오빠 나 들어가 봐야 해. 이따 또 통화하자~? "




" 그...그래. 수진아.... "

그러나 이미 통화는 끊어져 있었다.
힘들게 꺼낸 말이었지만 어찌 됐든
이번 주말에는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명록은 기분이 좋아졌다.


느긋하게 수진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밤을 얻어냈다.
왠지 멀어지는 듯한 그녀를 꼭 잡을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깜짝 이벤트라도 준비할까?


명록은 어서 사무실로 돌아가서 그녀와의 밤을 위해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지고 있었다.







**************



청년 실업.


오랜 경기 불황으로 오늘도 기업들의 대졸자 채용을
전년도보다 줄인다는 기사가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제 낯설지 않은 취업난에 대한 기사들.
상반기 졸업을 앞둔 대학 4년생들은 밤새 기업의 문을 두들기기 위해
자기 소개서와 이력서를 작성하기 위해 잠을 잊은 지 오래였다.
졸업을 앞둔 선배들의 얼굴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어둡기 짝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다니던 다희 언니마저도
웃음기 가신 얼굴로 도서관에 있는 것을 본 수진의 마음도 어둡기 짝이 없었다.
들리는 소문엔 벌써 세 번째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성적도 누구 못지않고 자격증도  많이 따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선배 언니마저도 저렇게 취업을 못해서 힘들어하다니.....
수진은 과연 얼마나 준비를 해야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제 3학년인 그녀도 멀지 않은 자신의 미래를 보는 거 같아 남모를 초조함을 겪고 있었다.
그 중 벌써 한학기가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2학기...
그리고 바로 그 다음이 4학년 졸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퇴직은 어떻게 이번은 잘 넘어간 모양이었지만 다시 또 그런 일이 올지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도 곧 취업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제 속편하게 대학생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낭만을 즐기던 1,2학년 때와 다르게
주변의 동기들도 하나  정신을 차리고
성적에 집중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특히나 병역을 마치고 복학한 남자 선배들이 같이 공부하면서
보이는 열정이 느긋했던 학업 분위기를 전혀 다른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도 안심할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서로의 실력이 벌어지고
어느새  차이로 바뀔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전엔 교양수준에 그쳤던 전공수업이었지만,
지금은 가로 막았던 댐이 열린 것처럼 물밀듯이 생소한 전공 지식을
마구 쏟아내는 교수님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없었다.

전공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일주일동안
자신의 수업만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매일매주 제출을 요구하는 과제를 내주셨다.
그 탓에 쌓여만 가는 리포트들은 밤을 새워 쓰고 또 써도 부족했다.

지금도 벌써 네 개 제출하고도 아직 다섯 개나 남아있었다.
그중 내일까지 내어야할 것이 두 개.


앞서 리포트를 작성하느라 시간을 몽땅 투자한 다음이라 둘  기초적인 자료만 모아둔 상태였다.
오늘도 밤을 세워야할 판이었다.

수업을 듣고 다음 강의실을 옮기면서 잠시 멈춰 서서 학과 취업 란을 보고 있었다.
공지에는 따로 적어있지 않았지만 뻔히 그 아래 숨겨진 것들이 보였다.

출신 대학교의 브랜드,
높은 학점,
높은 토익 점수,
여러 개의 자격증,
해외 연수,
봉사활동  대학 생활동안 짧은 종잇장에 자신을 남들보다 돋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


" specification. "



새로운 문화는 새로운 단어를 창조했다.
스펙.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스펙이라 말하고 있었다.

가끔 대기업에 취업에 성공해서 캠퍼스 리쿠르팅에 동원되는 선배들을 만나볼 때마다
이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수료한 그들의 머리 뒤에는 천로역정의 주인공처럼 후광이 비치는 환각이 보일 정도였다.
하긴....
이름만 들어도 매일 신문이나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대기업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으면
무엇이 졸업반에게 영광의 순간을 가져다줄 것인가.
자신이 달성하기 어려운 것을 남이 따내어야 부러움과 시기라는 감정을 불러오는 법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절묘하기도 하지......


그녀가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 시기에
명록의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고 있는지 언제나 보채는 일들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만나고 싶다....

모텔에 가자....

바람이라도 쐬자.....

물론 그중 일부는 나희의 일 때문에 스스로 자초한 걸 알고 있지만,
그의 작은 요구들은 온 힘을 다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그녀의 일상에  하나의 압박을 일조하고 있었다.

여름 방학에 우리 봐요...
방학만 되면 좀 여유가 생길거야...
그때가 되면 좀 한가해 질 테니깐 기다려 줘....
오빠 조금만 참아줘....




방학을 핑계 대며 계속 미루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마저도 힘들 거 같았다.
어학 점수의 벽에서 무너지는 선배의 모습을 보고나서
귀중한 방학동안 영어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수진이었다.
아직도 모자란 듯한 어학점수를  더 높여서 스펙을 갖춰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선배들 조언과 이런저런 수소문 속에서 이미 빽빽하게 세워 놓은
방학 스케줄만 봐도 명록과 한가하게 놀러 다닐 여유는 어디에도 찾을  없었다.


아마 이걸 말하면.......
오빠가 서운해 하겠지....
하아......

수진은 방학동안 잡아둔 계획을 보면서도 한숨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연애는 두 사람의 이야기.
내가 사정이 있어서 할  없어도, 아니 하기 싫어도,
상대방 요구에 따라서 예스를 말해야 할 때도 있다.


백가지 안 되는 이유를 대면 백한 가지 되는 방법을 찾아오는
명록의 모습에 결국 수진도 이번에도 주말밤 같이 있자는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다.


조금씩 굳어가던 명록의 표정이 뜨거운 여름,
아스팔트 위에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수진의 한마디로 단번에 풀렸다.
아이처럼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즐거워하는 명록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 크게 들려왔다.




에휴....
가끔 오빠는 어린애 같아.......




남자는 다 어린애라고 했던가.
일곱 살이면 적지 않은 나이 차이인대도
가끔 명록은 오빠보단 남동생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언제나 넉넉히 자신을 감싸주고 의지되던 그가
이럴 때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정말 신기했다.
자신의 한마디에 어쩔 줄 몰라하며 좋아하는 명록을 보자면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또다른 면으로는 한숨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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