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8)
179.
다른 방향?
그게 무슨 의미지???
눈을 껌뻑거리는 명록이 돌아보며 승필을 보자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 마음의 교류를 하라고 짜샤.... 좀 더 느긋하게 옆에서 지켜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말씀. 그리고 다시 천천히 스킨십을 가져가야지 자꾸 피하는 여자를 억지로 끌고 다니면 점차 멀어지는 게 당연하잖냐. "
응?
그....그런가?
그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 그리고 동정 주제에 얼마나 시원찮았겠냐.... 섹스라는 것이 말이야..... 현란한 테크닉이 중요한 거거든. 여자를 만족시켜주는 남자의 기술~! 그게 바로 포인트라고 하는 거다. 푸하하하~~"
헐....
역시 저 사람 말은 귀담아 들을게 없다니까.
" 전 이만 사무실 가보겠습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
명록은 다시 몸을 돌려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로 승필 선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하하.... 암튼 수진 씨한테 신경 좀 써라. 또 그러는 이유 중 하나가 새로운 남자가 생겼을 때도 그러거든. 바람을 필 때도 종종 그러니까... 애정의 마음으로 좀 더 세심하게 알았지? 하하하..... "
에잇 씨발!!!!
정말 욕을 부르는 스킬이 탁월한 승필 선배였다!
**************
" 안녕? "
아무 일 없다는 듯 나희는 그녀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미리 자리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던 수진와 영연,
그리고 설아는 활짝 웃으며 오랜만에 학교에 나온 나희를 맞았다.
특히 영연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 응, 나희야 안녕~! 리포트는 다 해 왔어? "
" 어제 급하게 하느라 좀 부족하긴 해도 하긴 했어. "
" 올~ 기집애 대단한데? 몇 장이나 써왔는데? "
" 흐음.... 표지 빼고 한 열넷 페이지 정도? "
순간 영연이 버럭 소리쳤다.
" 야! 그게 부족한 거냐? 난 일곱 장도 안 되는데! "
" 그건 영연이 네가 대충 쓴 거고..... 최소 열 장은 넘겨야지. "
" 엥? 교수님이 일곱 장 내외로만 내면 된다고 하셨는걸? "
그 말에 설아가 돌돌 말은 리포트로 영연의 머리를 톡 치며 말했다.
" 으이구, 그걸 믿냐? 이 교수님은 양이 많아야 좋아한다고. "
어찌됐든 나희가 오늘은 학교에 오겠다던 말을 지켜졌고,
수진과 친구들은 평소처럼 투덕거리며 나희를 맞이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의 사정이 궁금한지,
다른 동기애들은 멀리서 나희를 쳐다보며 보이지 않게 수군거리고 있었다.
" 다들 제출 했어? 안 냈으면 내가 내고 올게."
나희는 친구들의 리포트를 모아서 수군거리는 동기들의 시선 속에서
보란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를 강렬한 모델의 캣워크처럼 당당하게 걸어갔다.
살이 빠져서 약해보일 것 같지만 걸음마다 넘치는 당당함은 그녀를 결코 왜소하게 보이지 않게 했다.
그 어떤 빈틈도 없는 그녀의 걸음걸이에 수군거리며 소문을 만들던 학생들은 결국 꼬리를 말고 시선을 돌렸다.
과거의 시간을 싹뚝 잘라 내버린 듯한
예전 그대로의 나희 모습에 수진은 한편으론 안심했다.
오전 강의가 모두 끝나고, 시끄러운 복도에서
그녀들은 사물함에 책을 넣으며 다음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 오랜만에 파스타나 먹을까? "
학생이나 직장인이나 오전의 최대 고민은 점심메뉴였다.
우스갯소리로 직장인의 오전은 점심메뉴 고민하는 게 일이라는 소리도 있다고 했다.
한참을 뭘 먹을지 고민을 하던 그녀들도 처음 파스타를 먹자는
영연의 제안에 반대가 없는 듯 차차 파스타로 의견이 모이고 있었다.
" 그럼 파스타 콜? 어디로 갈까? 정류장 근처에 새로 생긴 곳 있던데 거기 갈까?"
" 나 2시에 수업 있는데, 그럼 시간이 좀 촉박하지 않아? 그냥 가까이 있는 곳으로 가자."
" 에이 거긴 맛이 없다고. 밥을 뭐 하루 종일 먹냐? 그전에 다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수업 이십 분 전에 강의실 도착한다고."
영연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있었다.
분명 파스타가 땡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수진은 아이같이 떼를 쓰는 영연의 말에 웃으며 사물함 정리를 끝내고 문을 닫았다.
어찌됐든 영연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낼 때까지 나희를 귀찮게 할 게 뻔했다.
이대로라면 결국 다음 수업이 있는 나희도 새로 생긴 가게에 가고 싶어 하는
강렬한 의지를 보이는 영연에게 한 수 접어줄 수 밖에 없었다.
" 그럼, 새로 생긴 곳으로 가는 거지?"
" 알았어... 대신 수업에 늦을 것 같으면 난 먼저 일어날 거야."
" 알았어, 알았어~ 가자!"
유쾌하게 영연이 앞장서자 다들 못 말린다는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수진도 그녀의 뒤를 따르는데 복도 건너편 끝 쪽에서 눈에 익은 사람의 얼굴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왁자지껄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느라
아직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수진은 단번에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수민.....
서수민.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 얘기하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같이 오고 있는 무리 중에서 확연히 눈에 띄는 모습.
그게 단순히 잘 아는 얼굴이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수진도 알고 있었다.
영연의 말대로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은 아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역시 그와 마주치는 것은 불편했다.
그런 수진의 마음을 전혀 알 리 없는 수민은 하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또래 동기들과 섞여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엠티 이후로 간간히 연락이 오기도 했지만, 수진은 불편한 마음에 그의 연락을 무시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수민은 역학기 복학을 했기 때문에 2학년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수진은 3학년 수업을 듣고 있어서 서로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사실 엠티에서부터 이주일이 넘어가도록 같은 건물, 같은 층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그동안 단 한번도 안 마주쳤다는 것은 수진이 열심히 피한 것도 있었지만,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혀지는가 싶었는데
이렇게 딱 외나무다리처럼 긴 복도에 만나게 될 줄이야.
숨을 곳이라고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계단 밖에 없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하기 어려운 상황.
그렇다고 여기서 계단으로 후다닥 내려가기라도 한다면 눈치 빠른 친구들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도 엉뚱한 추측으로 가득 찬 오해의 산물로.
하아....
나도 모르겠다.
결국 수진은 어색하게 친구들 뒤로 숨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눈 가리고 아웅 이지만 수민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복도 바닥의 돌무늬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엠티 때 그와의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수민은....
그때 정말 나한테 키스하려고 했던 걸까?
서서히 다가오는 수민의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밀어내지 않았던 자신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그때.....
내가 너 좋아한 거 알았어?
수민의 목소리.
바보 같이....
그때 너무 술을 많이 마셨어.....
바보...
바보!
남자친구가 있다고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그때 말하지 못한 게 아직까지 마음이 걸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하자니, 엠티동안 너무 쉽게
그의 스킨십을 허용한 가벼운 여자처럼 생각 될까봐 말하기 싫었다.
게다가, 우연히 공유하게 된, 타인의 사생활.
재희와 강우 선배.
그날 달빛에서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던 두 사람을
어두운 숲속에서 함께 관람을 해야 했던 일을
아직은 추억처럼 웃으며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아마 평생 말하지 못할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재희는 그 뒤 어떻게 지내더라....?
그 선배와 어울리고 다니는 건 아닌 거 같던데.....
그냥 하룻밤의 추억일 뿐이었을까.....
동기들 사이에선 워낙 유명한 공식 커플이다 보니
재희가 헤어졌다면 금방 학과 내에 소문이 돌았을 텐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는 걸 보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기에다가 복학생 선배와 같이 다니기라도 한다면....
이미 시끌벅적한 가십거리가 되어 풍성한 소재의 속편에 속편을 잇는
드라마처럼 있는 얘기, 없는 얘기까지 만들어졌을 텐데 단 한줄 소식마저 없었다.
결국 재희는 사귀는 남자와 계속 잘 만나고 있다는 얘기 밖에는 안되었다.
하아....
이래서 여자가 무섭다고 하나봐.....
어떻게 보면 수진에게 재희가 대단하게 보였다.
자신은 수민과 키스 아니 고작 미수에 그친 일로
이렇게 명록과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데,
재희는 키스도 아닌 섹스였다.
다른 남자와 섹스까지 해놓고.....
그런 일을 벌여놓고도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재희를 보면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레절레....
나라면 도저히 그렇게 못할 거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데 순간 영연이 수진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 야야~ 수민이 온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그녀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웃은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꼭 피하고 싶었는데, 수진의 소원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 너희~ 밥 먹으러 가는 거야?"
고개를 숙이고 친구들 등 뒤에 숨어 있어도, 수민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친구들.....
수진의 눈치 빠른 친구들과 그의 동기들까지 있는데 대놓고 수민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무거운 고개를 들고 까딱거리며 목 인사를 했다.
수민은 보조개가 생길 정도로 깊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너희들은 여전히 같이 다니는구나? 수업도 용케 다들 맞췄다. 하하.... 수진이도 안녕? 오랜만이야? "
" 후후, 학교에서 매일 보면서 무슨 인사니? 우리 지금 밥 먹으러 가는데 너넨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
영연의 생각하지도 못한 권유에 수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수민이와 같이 밥을 먹는다면 소화불량에 걸릴지도 몰랐다.
같이 간다고 하면 어쩌지 하며 고민하는데 수민의 대답이 바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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