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7)
178.
" 오빠... 저번에도 늦게 갔다고 한참동안 엄마한테..... 말 들었는걸..... "
명록의 팔뚝을 양손으로 잡고 있는 수진의 몸이
아까와는 달리 조금 떨어져 옆으로 서있었다.
손끝으로 살짝 잡고 곤란한 듯 고개를 숙이고는
발끝으로 톡톡 땅을 차며 말하는 수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미 오늘은 그녀에 대한 욕망을 채울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설사 어렵게 수진과 모텔과 들어간다고 해도
예전처럼 밤새 같이 있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늦은 새벽시간에 부랴부랴 일어나서 집으로 가야한다고 하는
수진과 함께 모텔에서 나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살금살금 집으로 들어가는 수진을 데려다주고 난 뒤
다시 어두컴컴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서 돌아가는 밤길이
얼마나 공허하고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었던가......
고작 몇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아침에 같이 눈을 떠서 함께 일어나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나서는...
그 과정마저도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수진과 이래저래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방명록 그를 한숨짓게 만들었다.
언제부터....
이런 것들이 힘들어진 걸까?
특히나 어렵게 시간을 만들어서 함께 있어도
콘돔 없이는 절대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수진의 단호함이 어떨 때는 그를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모텔에 콘돔이 준비되어 있곤 했지만
갑작스런 욕망은 꼭 모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들에겐 안전한 기간이 있다고 들었다.
생리한 직후라든지 곧 생리를 앞둘 때......
이럴 때는 질내 사정한다고 해도 임신하지 않는 주기라고 본 거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수진은 어느 때든지 콘돔 없이는 절대 안 돼....
-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희의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런 일들 하나하나가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섹스에 대해 무언가 조건이 따라 붙으면서 자꾸만 신경전을 벌여야 하다니....
전과 달리 무언가 변해버린 듯한 둘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조금씩 수진의 행동들이 이상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임신....
물론 수진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명록 자신도 생리일이 늦어질 때 초조해하는 수진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조금은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직 정식 교제를 알리지도 않은 사이.
특히나 수진은 아직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녀가 임신했다고 한다면 명록은 어떤 느낌이 들까....
-라는 상상하는 부분에서 내려지는 결론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래....
그게 무슨 대수야....
그녀가 만약 어느 날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기쁘게 그 사실에 대해 받아드리고 그녀와 함께 할 내일을 위해
가볍게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진이라면....
같이 앞으로의 남은 삶을 같이 해도
전혀 나쁘지 않을 거야라고 은연 중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예쁘고.....
나름 자신의 일에 소홀히 하지 않고....
더할 나위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녀.
비록 그녀가 처음 만나 사귀게 된 명록의 유일한 여자였지만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거 같았다.
훗....
수많은 여자를 만나야 좋은가?
제대로 된 여자 한명이면 되는 거지....
뭐.....
옆에서 전설로 날리던 승필을 보면서도 전혀 부럽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명록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조금씩 서로 빗나가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수진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워지며 조금씩 둘 사이에 금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 미안해.... 오빠... "
팔뚝을 잡고 있는 수진의 손이 아까보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그녀를 억지로 데리고 가서 섹스를 한다 해도 전혀 즐겁지 않을 거 같았다.
정말 자기 자신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위일테니.....
하고 나서 찾아올 현자타임만 참담히 머리에 떠오를 뿐이었다.
하아...
긴 한숨.
그리고 드는 또다른 생각.
나랑....
같이 있는 게 혹시 싫은 걸까......
섹스 하는 게 싫은 건가.....?
왠지 모를 위화감.
하지만 분명 수진이 명록과의 섹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새로운 쾌감을 찾아서 함께 즐기던 시간을 되돌아보자면 절대 섹스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을 뿐이었다.
분명 수진과 자신 사이 무언가 변화가 생겼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 하지만 견뎌야 해~~ 추억이 아름답도록~~~ 그 짧았던~~ "
순간 층계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올라오는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
하필 이럴 때 이별의 노래라니.....
정말 이 사람의 센스는.....
으휴....
물론 그도 의도적으로 명록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는 아니겠지만
명록의 마음이 한참 어지러운 때 마치 놀리기 위해서 부르는 듯한 가락에
괜히 밉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하긴 그간 그에 대한 이미지가 한몫 단단히 하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층계 계단 아래에서 모습이 들어나자 생각했던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승필 선배.
그는 고개를 좌우로 가락에 맞춰 흔들며 느긋한 표정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명록을 보자 부르던 노래를 딱 멈추고 웃음을 터뜨렸다.
" 어라? 하하~~ 사원 방명록~ 여기서 뭐하냐? "
싱글싱글 웃는 그의 얼굴은 티 없이 맑기만 했다.
고민의 자취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는, 너무도 밝은 표정.
그러고 보니 요샌 정미 씨 얘기가 없었다.
퇴근한다고 제일먼저 바람처럼 사라지지도 않는 승필이었다.
하아....
어떻게 된 걸까....
벌써 정리한 건가?
헐.....
선배는 여자 문제로
골치 아픈 적이 있긴 하나?
왠지 얄밉게 느껴진 명록은 약간 퉁명스런 어조로 답했다.
" 그냥... 머 별로..... 그냥 바람이나 쐬는 거죠.... 머...... "
" 푸하. 이런 실내에서 무슨 바람이냐? 담배 냄새에 찌들어있는 곳에서 기분 전환이라니 너도 참 악취미다. 하하..... "
체...
그게 다 당신 탓이라고요.....
명록은 남은 커피를 후다닥 마셔버렸다.
자리를 피해 내려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였지만
승필 선배의 팔이 먼저 그의 어깨 위로 올라와 목을 감싸며 덮쳐왔다.
" 이 자식..... 그나저나 선배가 묻는데 그 반항기 가득한 목소리는 뭐냐? 크크크.... 박 과장이 또 너 깼냐? 요새 승진 때문에 바빠서 그럴 새도 없을 텐데... 대체 그 우거지상은 뭐야? 응? 자자~~ 이 선배님께 다 불어봐라..... "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없어요. 아~~ 목 아프다니깐 요! "
" 이 자식 좀 더 맛을 봐야겠구먼~! 주리 좀 틀어주랴? "
서...선배님.
주리는 목이 아니라 다리에 가하는 형벌인데요?!
아아....
목 부러지겠어요!!!!
명록은 자신의 목을 조여 오는 승필의 팔을 붙잡고 켁켁 대고 있었다.
의외로 근육질인 그의 팔은 탄탄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근육이 승필에게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긴....
그러고 보니 마음이 짚히는 것이 있었다.
바람둥이인 그가 여자의 마음을 엮기 위해서 당연히 육체 단련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으리라는...
원초적 답안!
하지만 그 육체 단련이 명록을 향해 사용될 줄이야.
인정사정 두지 않고 쪼여오는 가운데 승필 선배의 목소리가 사악하게 울렸다.
" 자자~~ 말할 테냐? 어쩔래? "
" 켁! 켁! 콜록!!! "
명록은 손으로 탁탁 승필의 팔뚝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항복을 받자마자 바로 힘을 풀어주며 킥킥 웃는 승필 선배.
하지만 그의 팔은 여전히 명록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 크크.... 자자~~ 숨 좀 돌렸으면 말 좀 해봐라. 아침부터 왜 죽상이냐? "
" 쿨럭.... 내가 언제 죽상을 지었다고 그래요...... "
" 아쭈... 또 개긴다? 한 번 더 조여 줄까? 대체 멀로 그렇게 고민하는 건데? 여자가 심각한 것도 보기 싫지만 남자가 쪼잔하게 인상 쓰고 있는 것도 딱 질색인거 알지? 좁은 사무실에서 그러고 있는 거 못 봐주니까 탁탁 털어놔라~ 이 인생 선배가 시원하게 풀어 줄 테니...... "
약간 허풍스런 승필의 목소리가 명록의 귓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실 어쩌면 이런 문제는 그가 정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그만한 전문가(?)는 없으니까.
명록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저.... 선배. "
" 그래그래.... 뭔데...? "
승필 선배는 눈이 반짝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 그의 얼굴은 장난꾸러기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 저.... 여자가 섹스를 자꾸 멀리하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
" 응??? "
승필 선배의 눈이 천천히 커져가고 있었다.
순간 그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은 자신에 대해 완전 실수다 싶은 마음이 드는 명록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승필의 웃음소리.
" 푸하하하하~~~~ 뭐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게 그거였냐~!!! "
그의 웃음소리에 얼굴이 붉어진 명록이 울컥해서
승필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승필의 팔이 좀 더 빨랐다.
강하게 다시 조여 오는 그의 팔이 명록의 어깨를 꽉 조이며 잡아챘다.
" 야야~~ 녀석 승질하고는 흐흐흐.... 결론은 수진 씨가 너하고 섹스 하러 가는 걸 자꾸 거부한다 그거 아냐~~ "
" 으~ 됐어요. 저 가볼께요. "
명록은 억지로 힘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가득 했지만 목조르기 고문 때문에 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전개이기도 했다.
승필은 키득 거리며 말을 이었다.
" 푸하하... 짜식... 연애하다보면 그럴 때가 오는 거다. 권태기라고 하잖냐. 섹스만이 전부는 아니거든. 여자가 그럴 땐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지.... 뭐 그런 것으로 고민 하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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