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5화 〉제2부.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4) (175/195)



〈 175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4)

175.


살짝 열린 좁은 문.
그 틈새로 화가 난 듯한 나희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 너... 너희들 웬일이야.....? "



하지만 작은 나희의 목소리에 비해 영연의 목소리는 우렁차기만 했다.

" 웬일이긴! 너 일주일동안  번도 학교에 안 왔잖아. 그만두려고 작정했어? 전화라도 제대로 받을 것이지.... 문자해도 답도 없지! 답답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직접 확인하려고 언니들이 왔다! 기집애 연락도 없고.... 대체 왜 학교는  오는 거야?! 이 언니들 답답해 죽는 줄 알았잖아!!! "



영연이 살짝 열린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며 호들갑을 떨었다.
바로 들어가려는 듯 그녀가 힘주어 문을 밀어 재끼고 있었지만 탕 하는 쇳소리와 함께 문은 더는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에 아직 걸쇠가 걸려있어서  일정거리만큼만 열려 있을 뿐이었다.



" 얼굴 봤으니깐 됐지? 안 죽은 거 확인했으니깐, 이제 돌아가."

나희는 그녀들을 방으로 들일 생각이 없는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 모습이 수진 자신을 향한 것 같아서 수진은 설아 뒤로 숨었다.

" 야아!!!! 여기까지 왔는데 물 한잔도 안 주고 돌려 보내냐? 너... 방에 진짜 남자라도 숨겨둔 거 아니야? "




하지만 무대포 영연의 목소리가 또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나갔다.
나희가 문을 가로막고 들여보낼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 기집애~! 대체 학교도 올 생각도 안하고 어떤 남자 길래 그러니?  언니가 얼굴 좀 보자! 아아~~~ 안녕하세요~~~~ 저기여~~~~~~~~~! 저희는 나희 친구들인데요~~~~  얼굴 좀 봅시다아~~~~~~~~~! "

천연덕스런 영연의 인사말이 복도를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희의 사정을 아는 수진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녀들의 대화를 생방송으로 듣고 있다면 영연의 말대로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희도 점점 커지는 영연의 목소리를 예상하지 못한 듯 어느덧 쌀쌀 맞았던 표정에 곤란함을 담은 주름이 옅게 자리 잡았다.
어찌됐던 그녀가 사는 원룸은 부모님의 돈으로 마련한 방이었다.
즉 부모님의 손길이 닿는 곳이었으니 소문이라도 이상하게 난다면 그녀에겐 하등 좋을 일이 없었다.

아....알았어. 목소리 좀 낮춰.... 잠깐만..."




나희가 문을 닫으려 하자 영연이 재빠르게 문틈에 발을 집어넣으며 그녀를 방해했다.



" 너... 이대로 닫으면...."

아이참, 열려면 닫아야지! 문 열어  테니   치워!"


나희도 한계에 다다른 듯 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영연이 발을 빼내며 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 그러게... 누가 잠수타래냐? 어서 문이나 열어. "


영연의 발이 사라지자마자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던 문은
아주 잠시 고민하는  그대로 멈춰 있다가 다시 영연의 중얼거림과 함께 활짝 열렸다.

마침내 보이는 나희의 방의 모습.
그리고 그녀의 모습.


얇게 열렸던  사이로 어렴풋이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조금 살이 빠져있었다.
평소엔 화려한 장미 같이 도도한 인상이었던 그녀의 얼굴은
지금 살이 빠져서 그런지 아니면 화장을 하지 않은 생얼의 모습이라 그런지 평소와는 달라보였다.

막 이슬을 품고 있는 여린 장미의 모습.
아슬아슬하면서도 왠지  꺾고 싶어지는 청순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있었다.


들어와."




나희가 몸을 비키자마자, 바로 영연이 개선장군처럼 씨익 웃으며 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설아가 뭐가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으며 따라 들어갔다.

수진도 설아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나희의 눈동자는 수진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수진은 아니라는 듯 살짝 고개를 저으며 현관에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나희의 방.


언제나 화려한 모습의 그녀를 보며 상상했던 방과는 거리가 있었다.
생각보다 깔끔한  안에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가구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차분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 나희의 이미지와  어울리긴 했지만
사람이 사는 방답지 않게 싸늘함이 느껴지는 모습을 보며 수진은 마음이 아팠다.

왠지 수도원 같은 아니 기도실 같은 그런 이미지의 방.
이런 곳에 혼자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나희의 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유산도 출산과 같다고 말했다.
출산을 하고 나면 산후조리를 하며 몸을 추스려야 하는 것처럼
비록 자연유산을 하고 말았지만 그 뒤 몸을 쉬면서 보양도 했어야 할 텐데
그러기엔 그녀가 머물고 있는 방안의 모습은 너무도 휑한 모습이었다.

나희의 몸을 따듯하게 덮어주고   있는 공간이 아닌,
횡하고 서늘하게만 보이는 방안의 풍경은 바라보는 수진의 마음마저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



" 뭐  마실래?"



" 난 주스."

설아는 집주인인양 냉장고를 열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거기에 맞춰 당연한  주문하는 영연의 목소리가 울렸다.


"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을 텐데? "

영연과 설아의 무례한 행동을 보면서 나희가 조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불편하게 방바닥에 앉아 있었던 수진의 마음 끝이 저릿해졌다.

비어있는 냉장고.....
학교를 나오지 않은 긴 시간동안 나희는 제대로 먹기는 한 걸까.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낸 것일까....

학교에 나오면 친구들과 점심을 같이 하면서
적어도 한 끼를 채우게 되지만, 방에만 있게 되면 그런 식사는 꿈도 꾸지 못한다.

깨끗한 싱크대.
 정돈된 냄비와 그릇들.
이곳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해도 믿겨질 만큼
사람의 향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텅 빈 찬장.
텅 빈 냉장고.
설아가 열어젖히는 부엌 살림들을 보며 수진은 나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매 아래로 슬쩍 보이는 가늘어진 그녀의 손목.
하얀 피부 아래 파란 핏줄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 야! 손님용으로 주스 정돈 구비해놔야지. 이럴 거 같아서 먹을 거 사오긴 했지만.... 손님이 오면 대접할 거라도 몇 개 사둬야지. 남자라도 오면 머라도 줄 거 아냐. 이게 머니?  하나 딸랑 있네..."

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연의 씩씩한 목소리가 바로 뒤를 이었다.




" 그나저나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그렇게 연락도 없이 학교에 안 오는 법이 어디 있냐? 무슨  생긴 줄 알고 교수님들이 우리 앉은 쪽만 자꾸 쳐다봐서 수업시간에 도망은 커녕 마음 놓고 졸지도 못했다구. 일주일 내내 너 때문에 수업 땡땡이도 못치고 얼마나 착실하게 들어야 되는지 알아?! "



수진은 영연다운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교수님의 시선이 계속 머물었던 수업시간이 얼마나 그녀에겐 곤역이었는지 알만 하지만
나희를 보자마자 이런 말로 그녀의 결석을 말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잘만 엎드려 자던 영연의 모습도 함께 떠올라서 어이가 상실 중이었다.



" 맞아. 영연이 엉덩이가 얼마나 들썩거리던지 옆에 있는 우리까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그치, 수진아? "

쟁반을 든 설아가 수진의 옆에 앉으며 말을 걸자
생각에 빠져있던 수진은 반사적으로 나희의 눈을 살폈다.
나희의 표정도 처음 그녀들을 맞이했을 때보다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수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호응했다.



응.... "



" 사실.... 교수님도 교수님이지만 너무 걱정했다고..... 나나 설아야 자체휴강을 자주하지만 너나 수진인 전혀 아니었잖아. 게다가 연락도 안 되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특히 수진이가 걱정 많이 했어. "

갑자기 나온 자신의 이름에 수진은 움찔했다.
걱정한 것은 맞지만 영연이나 설아에게 그런 자신의 마음을 얘기한 적은 없었다.
그냥 같이 밥 먹고 학교에서의 시간을 보냈다고만 생각했는데
영연이나 설아에게 자신이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 이래서 친구라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미안해. 좀 골치 아픈 일도 있고 해서.... 학교 가기 힘들었어."



나희의 목소리가 살짝 웃음기를 담고 울렸다.

" 거봐... 얘나 우리나 마찬가지라니깐? 근묵자흑... 아 이건 아닌가?"



영연의 말에 나희도 피식 하고 웃었다.
설아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툭하고 말을 던졌다.

" 그럼 내일은 학교 나오는 거지? "

" 그래... 이젠, 가야지. 더 이상 빠지면 성적도 위험하고."

확실하게 끊어서 대답하는 나희의 대답에 수진도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적어도 그녀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는 아니라는 게 보여서 다행이었다.
성적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있었다.
출석마저도 모두 내던져버리고 방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간 계속 자신을 괴롭히던 비관적인 모습의 나희와는 달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수다를 떠는 영연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짓고 말하는 나희를 보면서 수진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나희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

계속 그녀의 머리에 떠돌았던 생각.


이 뱃속에 사랑하는....
명록 오빠의 아이가....



친구들 모르게 만져보는 자신의 배.
따듯한 체온이 옷 위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손끝은 저절로 차가워진다.

따듯한 건 마음.
현실을 인지하는 차가운 이성.

명록을 자꾸 피하는 이유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자신을 선택하는 이런 이기적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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