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3화 〉제2부.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2) (173/195)



〈 173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2)

173.

명록은 수진의 말에 실망과 함께 갑자기 이러는 이유에 대해 궁금함이 솟아났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드는 의문.
엠티에서 갑자기 자신을 불렀던 이유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수진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로등불 아래....
앵두빛으로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입술이 탐스럽게 보였다.
너무도 사랑스럽기에....
너무도 안고 싶었다.


명록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서 안으며 수진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 안고 싶어..... 보고 싶었는걸....... "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던 수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 하지만...... "




명록이 다시 속삭였다.

" 왜..... 싫어? "


" 그런  아니지만...... "




수진의 말끝이 흐려지며 흩어졌다.


" 그럼 왜....? "

명록의 말이 아까 빨라지며 다그치듯 짧게 물었다.
수진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한 채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던 그녀가 이윽고 나지막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사실.... 오빠....."

어렵게 나오는 수진의 말.
명록은 가만히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빛 도는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며 타원형의 형태가 계속 변했다.
그리고 그것이 소리가 되서 나왔다.



" 나.... 생리해...... "



생리...?


순간 말을 마치고 얼굴이 붉게 물들어있는 수진을 보며 명록은 아 하고 깨닫고 있었다.


한 달 중 며칠간 당연히 건강한 여자들에게 찾아오는 마법.
수진도 당연히 생리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 못한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생리 중에 갖는 성관계라는 것이 여자들에게 위생상 좋지 못하다는 의학 상식란의 기사가 생각났다.

거기에다가 여자들은 생리하는 동안 몸도 상당히 아프고 힘들다고 들었다.
우스갯소리로 여자가 갑자기 짜증내고 예민해지면 생리중이냐고 물어보라....
- 그런 농담이 있었을까.

아하...
그래서....
오늘 내내 수진의 안색이 안 좋았었나 보구나.....
나희 일도 있고.....
몸도 안좋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만나면서 그의 머리에 계속 들었던 의문이
수진의 한마디 말 때문에 모두 선명하게 이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  생리통이 심한 사람은 제대로 다니기도 힘들다고 하던데....
괜히 불러낸 것이 아닌가 후회도 들었다.

명록은 살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그렇구나. 미안.... 생리하면 몸도 아프다던데.... 미안해......"


오늘 만나서 과음하게 한 것도 모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생리와 음주가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왠지 그녀에게 좋지는 않을  같아서 우선 사과부터 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자신만의 기분으로 꽤 먼 거리를 같이 걷기까지 했으니
어쩐지 말이 별로 없었던 수진의 모습이 모두 이해되었다.
하지만 수진은 눈을 깜박거리며 바로 답했다.

" 아니야... 오빠가 왜...? 머가.... 미안해..... "

" 아냐.... 내가 생각이 짧았어. 많이 힘들었겠다.... 미안해. "

" 아니... 아니야. 괜찮아..... "


" 흠.... 집에다 데려다 줄까?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던데..... 쉬는 게 낫지 않겠어? "



명록의 말에 수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 응.... 그럴까.....  좀.... 피곤하긴 하네.... "




" 그래....어서 가자..... "

명록은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지하철 역을 향해 걸었다.
힘든 수진을 생각해서 보폭도 그녀에게 최대한 맞추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록 수진을 안지 못했지만 그래도 몸도 안 좋은 그녀와 섹스를 할 순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건 자신의 욕망만 채우는 욕심이기도 했다.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명록은 손에 힘주며 잡고 있는 수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작은 손이 부드럽고 또한 따스하게 느껴졌다.





**************




저녁이라고 하긴 이미 많이 시간이 지났고, 한밤중이라고 하기엔 좀 이른 시간.

전동차 안에는 잔잔한 주름마다 지나온 청춘을 새겨 넣은
서류가방을 든 40대 가장도 사그라진 젊음을 가리기 위해 얼굴에 짙게 덧칠하고
높은 하이힐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야 했던 30대 회사원도 각자의 사연과 사정을 담고 있은 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포즈를 잡고는 지친 표정으로 서있었다.


간간히 흔들리는 가운데 들리는 전철의 소리가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흘려보낸 도시인을 위해
철컥 철컥 낮은 자장가를 연주하는 중이었다.


피곤함을 담고 있는 가운데....
기억의  밑바닥은 아직도 평안했던
어린 시절의 흔들리는 요람을 잊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젠 홀로 삶을 채워가야 하는
전차 안의 어른들을 잠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수진과 명록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나른함에 젖어들은 전동차 안에서 수진은
명록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잠을 위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난 왜....
오빠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


사실 생리는 아직 하지 않았다.
아직 하려면 며칠은 더 남아있었다.

그러나 명록이 그녀의 손을 잡고 모텔로 향하는 것을 알자마자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세 알아채고는 생각보다 먼저 발이 멈추었다.
그리고 너무 쉽게도 입에서 빠져나온 변명의 말.

섹스.

누구나 자의든 타의든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되면,
관계 끝에 그림자처럼 임신에 대한 가능성이 따라온다.
여자에게 임신이란 태초부터 부여됐던 존재의 의미지만
준비되지 않은 임신은 때론 사회적 기회의 박탈과 매장을 뜻하기도 하기에....
어떤 면에서는 공포와 다름이 없었다.


아련한 상상으로만 두렵게 만들었던 그 공포가 지금은 전혀 다르게 다가와 있었다.
예전의 수진에겐 막연하기만 했던 임신이라는 단어가
이번 나희의 유산 덕분에 현실감을 부여해주고 말았다.

임신.
그리고 유산.....

수진 그녀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
만약 그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다면....
-하며 꼬리를 물었던 상상의 결과물과 함께 저항하듯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모텔 앞 간판에서 걸음을 멈출  밖에 없었다.
경직된 근육 탓에 저절로 수진의 손끝이 움찔하며
자신의 손 위에 얹어진 명록의 손바닥이 살짝 닿았다 떨어지며
부드러운 체온이 느껴졌다.

물론....
명록과의 섹스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와의 섹스는 수진에게 또다른 세상을 열어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단지 끔찍할지도 모르는 현실을 깨달은 지금만큼은 섹스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둘러댄 변명인데 너무나 순순히, 그것도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는 명록을 바라보니....
내심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도 순순히 자신을 믿어주는 명록.
요즘 들어서 웬일인지 자꾸만 그에게 미안할 일들이 쌓이고 있었다.
수진은 원하지 않았던 것들인데도 자꾸만 그 감정을 적립하는 중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오빠....



전해지지 못할 사과를 입 안에서 되뇌이며
명록에게 기댄 머리를 그의 어깨 깊이 파묻었다.
대화를 하다가 생리라는 거짓말이 들킬까봐
피곤한 것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명록에게 기대고
억지로 잠을 자는 척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지도 않는 잠을 연기하고 있느라
눈을 감고 있는 덕에 자꾸만 엉뚱한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머리 한구석에서 차지하고 있는 또다른 근심.




하아....
나희.....
나희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불행 중 다행인지 아기가 나희를 거부하듯
태반까지 모두 흘러나온 덕분에 특별한 수술 없이 짧은 입원으로 끝났다.
명록이 서울로 올라간 다음날 늦게 병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나희가 빨리 병원에서 나오고 싶어한 덕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퇴원 후 서울에 있는 나희가 살고 있는 원룸 앞까지 수진은 같이 올라왔었다.

비록 방까지 데려다 주기는 했지만.....
문 앞에서 이제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강력히 못을 박는 나희의 거부에
결국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작별을 고한  탕 소리를 내며 닫혀진 철문.
차가운 철문의 질감처럼 나희의 마음 또한 비슷했다.
그리고 그게 수진이 본 나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홀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유산이라는 말에 그랬구나..... 하며 천정을 바라보던 나희의 표정이
수진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아이를 떠나보낸 여자가 눈물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매정하다고 입을 모아 말하겠지만, 나희의 숨죽인 눈물을 듣고 난 이후로
그녀의 마음을 어쩌면 알  같았다.

도서관에서 다그치던 자신에게 화를 내던 모습도.....
침대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무표정하게 있었던 모습도....
평상시 단아한 표정으로 잘라 말하던 나희의 모습마저도
모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또 한 겹의 껍질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 수진아 자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옆에서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명록이 수진을 깨우고 있었다.

" 으...응... 아니..."

" 곧 우리 내려야할 역이야. 많이 피곤한가 보다.....  자는 것 같던데."


" 아니야.... 잠깐 졸았나봐...... "

수진은 미안한 마음에 명록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는 꼭 힘을 주었다.
늦봄의 밤...
얇은 면을 사이에 두고 명록의 체온이 전해졌지만,
정작 수진의 마음은 평안하지 않았다.


전철이 역에 서고 내리는 사람들 뒤를 따라 그들도 같이 내리고 있었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사람.
하지만 왠지 수진이 느끼는 그들의 거리는 백리 정도는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명록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마음 한 켠,
그 안을 채우는 서늘함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엠티에서 있었던 일도.....
섹스를 당분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얘기도.....
아무런 말도 못한 채 하나하나 숨기고 거짓말로 둘러대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이렇게 거짓말쟁이 같은 모습을 명록이 알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녀는 자꾸만 원치 않게 거짓말쟁이가 되어간다.



" 많이 아프니?"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수진의 모습이 아파 보였을까?
명록이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며 말을 걸었다.



오빠...
우리 당분간 섹스 하지 말까?
그냥 얼굴만 보고 같이 옆에 있고 그럼 안 될까?



수진은 마음 속에서 맴도는 말을 되뇌이며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섹스에 관한 이야기는.....
연인에게 있어서 쉽고도 어려운 이야기였다.
상처 받기에도, 상처 주기에도 너무 쉬운 이야기라
사실대로 마음을 터놓고 꺼낼 마음을 먹기 쉽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이미 한번 관계를 맺고 익숙해진 상태에서는 더욱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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