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제2부. #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1)
172.
밤이면 인간은 공포에 빠졌었다고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너무도 힘이 없는 존재.
온갖 짐승들이 밤이라는 시간 속에서 먹이를 구하는 동안
정작 그들에게 대항해야 할 인간은 미약하기만 했던 존재였다.
그래서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얘기도 있지 않던가.
그랬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불이라는 것을 강력한 힘을 얻게 되면서
해가 진 뒤 찾아오는 밤이란 시간 속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명록은 밤거리를 바라보며 옛날 인간학에서 들었던 강의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서울이라는 곳은.....
옛날 인간이 느꼈던 공포 따위는 전혀 느낄 수 없도록 환한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형형색색의 전등 불빛 아래 두 남녀가 같이 걷고 있었다.
명록과 수진.
실로 오랜만에 수진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보고 있는 도시의 야경이 너무도 화려하게 느껴졌다.
전기라는 것이 발명되면서 야밤도 낮 못지않게 밝아진 가운데
서울의 야경은 하늘 위 은하수가 지상으로 내려온 듯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직 밤은 선선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멀리 들리는 차들의 경적소리도 마치 항구에서 듣는 뱃고동소리처럼 운치 있게 들렸다.
살아있는 듯한 도시의 모습.
저 멀리 벚꽃구경을 했던 한강변 공원도 얼핏 보였다.
아....
이제 곧 여름이구나.....
뜨거운 서울을 여름을 생각하며
지난 봄 벚꽃 구경을 하던 공원 쪽을 내려다보던 명록이 입을 열었다.
수진과 헤어지고 서울에 혼자 올라온 뒤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흠.... 수진이 너..... 얼굴이 좀 핼쑥해 보인다? 혹시 어디 아프니?"
" 아니.... 그런 거 없는데..... "
수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에는 여전히 힘이 없어 보였다.
" 그래? "
대답과는 달리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묻기도 힘들어서 명록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침묵.
엠티 이후 간간히 통화는 했지만
그 뒤 무언가 말을 해야 할지 알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윤과는 그냥 편하게 얘기했었는데......
왜.....
이상한 일이었다.
그전까지 쉽게 얘기하던 수진과의 대화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려워져 버린 것일까?
왜 그런지도 알 수 없으니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명록이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수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 저...... "
수진은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 나희는.... 괜찮아? "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흠칫 놀라는 듯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천천히 걸으며 수진이 말했다.
여전히 얼굴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늘어진 머리카락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원하지 않게 사각이 생겨버렸다.
" 으응.... 병원에서도 괜찮다고 했고... "
그날....
간호사에게 불려가서 나희의 상태에 대해 들었던 순간은
정말 명록에게는 절대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약간 나이 먹은 남자 의사의 눈빛.
책망하는 듯한 그의 시선 속에서 맞은 편....
의자에 앉아있는 동안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가.
거기에다가 데리고 갔던 중년의 간호사 마저
아닌 척은 했지만 은연중 보이는 그녀 또한 책망 가득한 눈빛이었다.
수진의 얘기 속에서 나희가 애인이 있는 것은 이미 진작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수진과 섹스를 하는 것처럼 그녀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물론 자세한 상상은 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정작 나희가 임신을 했었다는 것.
그리고 유산을 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였다.
과연 상대 남자도....
나희의 일을 알고 있을까?
수진과 섹스를 하면서 여자가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처음 첫 경험을 할 때보단 많이 마음이 나태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혹시 임신할까봐 걱정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콘돔도 언제나 챙기고 관계할 때도 질 안에 사정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신경쓰곤 했지만 어느새 그 횟수가 늘어나면서 임신이라는 단어가 흐릿해지고
경각심이 사라진 뒤부터는 그냥 생리주기를 계산하면서 안전일로 생각되는 날이면 그냥 생으로 하는 것을 즐기기도 하였다.
직접 수진의 몸을 느끼는 것이 더 좋기도 했고
갑갑하게 이물질을 씌우고는 자신의 분신을 조여 대는 느낌 또한 영 거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설마 정말 되겠어....
-하고 방심하는 생각을 안했다면 거짓이리라.
실제....
언젠가부터는 안전하다는 날에 질내 사정도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뒤 수진이 피임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기는 했지만
임신에 대한 걱정은 남자였던 명록에게는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축 늘어진 나희의 몸을 업고 응급실로 들어가던 시간.
등뒤로 느껴졌던....
땀에 젖어 있었던 그녀의 몸.
귓가에 작게 들리던 신음소리 만이 크게 명록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안정을 취하고 영양섭취 잘하며 조리해야한다고 설명하던
의사의 목소리가 짜랑짜랑하게 들리던 것도.....
그간 수진과의 관계에서 나태했던 그 자신에 대한 자책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그날의 기억은 명록에게도 수진이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했다.
아니...
가까운 친구인 나희의 일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수진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진의 대답을 듣고 나니 명록은 더 자세한 것을 물을 수 없었다.
유산한 친구 옆에서 간호하던 수진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스물두 살.
따지고 보자면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아직 사회생활도 겪어보지 못하고 성인으로써 이것저것 맛보기 시작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까.
여자가 성인이 되고....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마도 그녀들에겐 너무도 빠른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인 상규가 생각났다.
미주와 대학교 때 캠퍼스 커플이 되어 학생 부부까지 진도가 나가버린....
비운(?)이자 행운의 당사자.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는 둘이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비록 미주에게 꽉 잡혀 살고 있지만.....
어쩌면 상규도 그것이 좋아서 그렇게 연기하며 살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친구들이 놀러가자고 꼬셔도
어떨 땐 미주를 먼저 떠올리며 변명하듯
후다닥 그녀에게 달려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오늘은 왠지 조금 대견하게 보이고 있었다.
어느덧 말없이 걷고 있는 동안....
한적한 도로를 지나 서서히 고층건물들이 있는 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휴가의 마지막 날.
혼자 서울에 올라온 뒤 여러 번 망설이다가 연락해서 불러낸 수진이었다.
나희를 돌보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왠지 만나자고 하기가 미안했다.
하지만 하윤을 계속 만날 수는 없었다.
특히 나희의 일을 보고 온 뒤라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었다.
병원 뒷마당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었던 수진.
그녀의 작은 어깨가 흔들리며 살짝 떨고 있었던 모습이 가슴을 저려왔다.
숨죽여 우는 울음소리.
그러고 보니 수진이 그렇게 우는 것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비록 나희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지만
두 번 다시 수진이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내 옆에서 웃고 있는....
그런 수진의 얼굴 만을 보고 싶다......
차 안에서 운전하며 다짐했던 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목소리에서 들었던 것처럼
약속장소로 나온 수진의 모습은 어깨가 축 쳐진 것이 힘이 없어보였다.
맛있는 거라도 사주고 힘을 내주려고 했지만
수진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식사보다는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고 있었다.
식사 대신 선택한 술자리.
한잔 두잔 마시던 술이 어느새 소주병이 세병으로 늘어나 있었다.
수진의 얼굴이 붉어진 것이 오늘은 역시 좀 과하게 마신 것이 분명했다.
말도 많이 하지 않고 너무 마신 듯한 느낌에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 우리 나가서 바람이라도 쐴까? "
" 응..... "
어쩌다 걷다보니 봄날 올해의 마지막 벚꽃을 보았던 공원이 보이고 있었다.
승필 선배의 음모에 빠져서 끌려왔던 그 날.
하윤과 함께 있는 그를 오해하며 수진이 화를 내던 그 자리에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자면....
수진과 사귀게 된 것도 결국 모두 그녀들의 힘이었다.
그 셋 중 아무 말 없이 날카롭게 쏘아보던 나희의 얼굴이 생각났다.
언제나 생각하기만 하면 간호사 코스프레로 뜨악하게 만들었던 설아나
수진의 말에 의하면 완전 내숭덩어리인 애교많은 영연에 비해
나희는 명록에게 단아하고 새침한 모습을 가진 여대생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비밀스런 사생활을 알게 되다니....
처음 만났던 날 그런 미래가 있을지 상상이나 했을까.
왠지 그때를 생각하니....
아예 시계바늘이 휘리릭 뒤로 넘어가면서
수진을 처음 학교에서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신분증에 있던 사진보다
훨씬 더 예쁜 모습으로 학과 사무실로 들어왔던 그녀.
막 가을이 시작되기 전 약간 여름의 기운이 남아있던 싱그러운 그날.....
바깥의 햇살보다도 더 눈부신 수진을 처음 보는 순간
그렇게 예쁜 여대생이 정말 자신의 여친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승필 선배의 도움을 받아 흑심을 품고
그녀가 다니는 학교에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 옆에 수진이 있다는 것이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내 여자.
내 사랑.
순간 수진을 안고 싶어졌다.
으스러지게 꼭 품에 안고 온몸이 다하도록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사실....
벌써 이주일이 다되도록 안아보지 못했다.
안아보기는 커녕 제대로 손도 잡지 못했다.
명록은 바로 손을 뻗어서 수진의 손을 움켜잡았다
" 응? "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수진은 고개를 돌려 명록을 바라보았다.
명록은 그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잡은 손을 이끌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 오빠....? "
하지만 명록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어서 도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손을 잡힌 수진은 당혹스런 목소리도 다시 물었다.
" 오빠.....어...어디 가는 거야? "
가로등 불빛이 어깨를 스치며 뒤로 빠르게 지나갔다.
수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잠자코 그가 이끄는 대로 쫓아왔다.
하지만 건물 사이 화려한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오면서 곧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모텔.
그곳이 모텔임을 알자 바로 수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녀가 멈추자 잡고 있던 손이 팽팽히 당겨지며 자연스럽게 명록도 멈추었다.
갑작스럽게 자리에 서버린 수진을 돌아보며 그가 물었다.
" 왜? "
이번엔 명록이 수진에게 물었다.
언제나 그가 이끄는 대로 모텔에 순순히 들어오던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은 강하게 거부한 채 멈춰 있었다.
첫 경험 이후 모텔에 가기 부끄러워하던 시간에도
이렇게 강하게 거부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런 그녀의 의사 표현에 명록은 당황하고 있었다.
수진은 그의 물음에 어물어물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저... 오빠.... 오늘은 안가면 안 돼? "
" 응???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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