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제2부. # 14화. 평행선 (20)
171.
두근두근.....
두근두근....
명록은 어렵게 침을 삼키며 수진을 보고 있었다.
마른 입술로 보는 그의 눈동자가 이미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가 무서운 말을 담을까봐.....
얼어붙어버린 사람처럼 수진은 한동안 눈을 마주치고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시계 초침소리.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기를 얼마나 보냈을까.
이렇게 뜸을 들이고 있는 이상....
수진은 분명 좋은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눈짓으로 밖으로 나가자는 신호를 보내자 바로 명록 또한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러운 걸음.
조심스러운 몸놀림으로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통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밖으로 통하는 문을 통해 나서자마자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
이곳이 병원이 아니었다면 너무도 좋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
지금은 오히려 너무 화창하고 따듯한 바깥의 날씨가 더욱 아프게만 느껴졌다.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병원 한 구석....
수진과 단둘이 있게 된 명록은 몇 번 입을 옴짝달싹 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고 말을 꺼냈다.
" 나희...... 유산이래."
유산.....?
유산!!!????????????
하혈을 보면서 생각했던 상상 중 하나의 결과가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의외로 수진은 그 순간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잔인하게도.....
명록의 말을 듣고 수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미 떠난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나희에게 자신의 아이를 떠나보내야 할지,
자신의 손으로 그 아이의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그런 죄의식 가득한 고민을 안겨주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떠나간 아이......
나희가 슬퍼할망정 그녀의 마음에 피를 묻히는 업보는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그 사이....
" 자연 유산이라고...... 요 근래 무리했었냐고.... 그러고 보니 음주도 한 거 같던데 몰랐냐....고 하더라고...... 어제 나희 술 많이 마셨냐? "
계속 이어지는 그의 말.
수진이 대답할 새도 없이 다음 말이 쏟아졌다.
"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흐음...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왜 미련하게 참냐고.... 많이 힘들었을텐데 참.... 안타깝다고 하는데.... 흠....."
명록은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는지 옆에서 계속 말을 했지만,
이미 수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살아있었을지도 모르는 생명의 죽음을....
한순간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끔찍함을
바로 깨달아 버렸던 탓이었다.
심장이 쪼개지는 듯한 느낌 속에서
잠깐이라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는 것에 더욱 큰 충격을 받아버렸다.
아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나희가 출산을 선택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아기가 죽었는데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니....
잔인하게도 그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것에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은 얼마나 흉악했을지
순간 수진은 명록의 얼굴조차 보기 부끄러웠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정신이 바사삭 부서지고 있었다.
아기...
새 생명을 안고 태어나는 아기에 대해
평소 수진이 느끼던 감정은 언제나 미소를 짓게 만드는 존재였었다.
어떤 아기도 예쁘지 않고 귀엽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친척들이 낳은 아기는 언제나 따듯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의 사랑을 받고 웃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 당연히 자신도 있었다.
그것이 부담으로 느껴지고 또한 유산이라는 말에
한순간이라도 잘됐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너무도 끔찍했다.
아니.....
너무도 싫었다.
나희의 현실과 자신의 품었던 생각이
가만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순간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냥 앞으로 마구 걸었다.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닌데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명록이 서둘러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지 않았다며 아마 지구 끝까지 가버렸을지 몰랐다.
그리고 갑자기 터지는 울음.
봇물이 터져 마구 흘러내리는 것처럼....
뜨겁고 차가운 것이 볼을 흘러내리는 순간 명록이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렇게 그에게 안긴 채 한참을 흐느껴 울며 병원 뒷마당에서 서있었다.
화장실에서 눈물자국을 지우고
찬물로 좀 세수를 한 다음에야 마음이 진정될 수 있었다.
화장 따위는 거의 지워져 버리고 창백해진 얼굴이 되었지만
차라리 지금은 그런 상태가 더 나을 듯 싶었다.
생명이 사라져버린 시간.
나희가 그 고통을 안고 누워있는 상황에서
화장이라는 것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수진은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긴 복도를 지나 나희가 누워있는 병실로 걸어갔다.
명록이 자신을 대신해서 나희를 지켜보고 있는 병실.
거기로 가는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 사이 응급실에서 나와서
하루 입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에 바로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
한낮의 병실은 나름 조용했다.
나희는 밝은 아이보리 벽에 반사되는
찬란하고 따스한 빛에 쌓여 침대에 평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커튼까지 쳐져 있어서 다른 이들의 시선들도 타지 않는 그곳.
아까 응급실과는 다르게 미간의 주름도 거의 사라진 채
조용히 잠든 그녀를 보고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서 수진은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하얀 시트에서 묘한 소독약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간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날.....
나희와 틀어지지 않았다면.....
그날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그 남자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나희에게 대했다면......
자존심을 굽히고 나희에게 자신이 손을 내밀었다면....
머리를 대고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수많은 가정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을 하지 않았다면 나희와 함께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가슴을 쓰라리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 만약으로 시작하는 일들.
가정으로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알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왠지 수진에겐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위로하려는 걸까.
어느새 다가온 명록이 툭 하고 수진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또 얹으며 매만졌다.
묵직하면서도 따스한 그의 손길.
아까도 자신을 안아주던 그의 체온이 생각났다.
누군가 이렇게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누군가에게 또 이렇게 기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수진은 새삼스럽게 명록의 존재를 깨닫고, 옆에 있다는 사실에 위로 받았다.
먼길도 마다하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달려온
그가 너무도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나희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명록과 수진이 떠나고 나면 나희는 혼자 이 쓸쓸한 병실에 혼자 남아있어야 했다.
유산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면....
그 상실감은 얼마나 클 것이며
이미 상처가 깊게 입은 그녀는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야할 수 있었다.
수진은 나희의 잠들은 얼굴을 한번 쳐다보곤 명록에게 말을 꺼냈다.
그에게 미안하지만, 그리고 이번에도 말해야 하는 말이었다.
정말 이런 말을 하기 싫었는데....
정말....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할 수 밖에 없었다.
" 오빠... 미안한데, 나.... 나희랑 있어야 할 것 같아. 우리 여행은... 다음에 가자......"
하지만 명록은 생각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표정으로....
부드러운 음성으로 수진에게 답했다.
" 그래... 괜찮아.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먼저 갈테니까 나희.... 잘 보살피고."
" 응...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오빠....."
" 아니야, 미안하긴 무슨...... "
명록은 수진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며 고개를 저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 나희가 나 보면 불편해 하겠다..... 지금 가는게 나을 거 같아. "
" 오빠.... 그럴래....? "
수진은 말꼬리를 흐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침부터 먼 길을 달려온 그를 이렇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병실에 누워있는 나희도 가슴 아프고...
세상 구경도 하지 못하고 가버린 그녀의 아이도 가슴이 아팠다.
모든 것이 너무도 아프고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아아....
정말 너무 잔인해.....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살면서 언제나 좋은 일만 있어도 짧기만 한 인생일 텐데
왜 안 좋은 일로 이렇게 시간을 채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착하고 믿음직한 명록의 모습.
늘 수진을 배려해주는 그의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명록이 자신에게 언제까지 이렇게 대해 줄 수 있을까.
수진이 일어서서 그를 배웅하려는데 명록이 서둘러 말했다.
입술에 손가락까지 대며 낮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나오지 마.... 나희 깨면 어떡해.... 나..... 혼자 가도 되니까 옆에 있어줘...... "
명록은 손을 흔들고는 조심스레 병실을 빠져나갔다.
수진은 그가 병실을 빠져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병원의 모습이 일순 조용해지면서 수진의 귓가에 모든 소음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나희의 얼굴만이 쌕쌕 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녀만이 이 아프고 잔인한 현실에서 잠시 떨어져 짧은 안식의 시간을 가지는 중이었다.
<< 제14화 평행선 (20)>> 끝 => << 제 15화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 (1) >> 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