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제2부. # 14화. 평행선 (19)
170.
희비가 이토록 깊이 교차하는 곳이 또 있을까?
누군가에겐 희망의 씨앗으로 행복해하고,
또 누군가에겐 불행의 씨앗으로 불안해하는 곳.
희로애락의 감정이 모두 모여 있는 장소.
병원.
이곳에서 각자 다른 갈림길로 나누어져 버린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될까.....
비슷한 표정으로 초초한 얼굴을 한 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수진과 명록이 앉아있었다.
우선 병원에 도착해서는 명록이 먼저 응급실로 들어와 업고 있던 나희를 눕히고
빠르게 진료 수속을 밟는 사이 수진은 아까 보았던 나희의 하혈에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진 마음을 품고 들어왔다.
한참을 망설인 탓에 혹시나 찾지 못할까 싶었는데
어느새 응급실 구석에서 나희를 발견하고는 그 곁에 앉아 있는데 땀으로 범벅이 된 명록이 돌아왔다.
침묵.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있는 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링겔을 꽂은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뜨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응급실은 시끄러웠다.
애틋한 시선으로 환자를 바라보며 한숨짓는 사람들.
이리저리 의사와 간호사에게 물어보는 사람들.
그리고 고개 숙인 채 입술마저 굳어버린 사람들의 모습까지......
몇 번인가.....
의사와 간호사가 왔다갔닥 하고는
침대채 엑스레이를 찍으러 가고 초음파 촬영을 하러 갔다.
마치 음식 배달하듯 아픈 나희가 침대에 실려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수진은 후자의 위치에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명록과 함께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런 폭풍같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응급실 한자리를 차지하고 멈춰있는 시간....
이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가지런히 모아진
발끝을 쳐다보며 그저 재깍재깍 흐르는 초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다림.
언제나 기다림은 초조한 마음을 만들어냈다.
" 박나희씨 보호자분?"
나이에 맞지 않은 연분홍빛 간호복을 입은 중년의 간호사는 차트를 들고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으레 그렇듯 고압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에서 그에 못지않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나희 곁에 있는 자신과 명록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꽤나 엄했다.
재차 묻는 목소리 또한 부드러움은 일도 느껴지지 않았다.
" 박나희 환자분 보호자분이세요? "
왠지 미심적은 표정을 하고 있는 간호사의 말에 수진은 작게 말했다.
" 네.... "
" 동생이세요? "
명록을 흘깃 쳐다보며 묻는 그녀의 말에 수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아니... 저...."
" 환자분 가족 아니세요?"
그럴 줄 알았다는 의미가 담뿍 담겨져 있는 간호사의 질문이 되돌아왔다.
수진은 왠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작게 대답했다.
" 네... 저 친구인데..."
수진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간호사의 말이 훅 치고 들어왔다.
" 흐음.... 가족은 안 왔어요? 보호자와 대화해야 하는데...... 혹시..... 그럼 가족 연락처는 아세요?"
" 아니..... 그게......"
순간 대답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억지를 부려서 집을 벗어난 나희였다.
그녀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실려 왔다는 것을 알면 집에서 가만있을 거 같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하혈.....
하혈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면 수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있었다.
나희의 집 연락처도 물론 모르지만.....
이 엄청난 상황을 알려야한다는 사실에
자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굳어져 가는 얼굴.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도 딱딱하게 굳은 가운데
살짝 돌아간 시선 끝의 나희 얼굴도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때....
" 저.... 제가 남자 친구인데요...... "
순간 갑작스런 말이 수진의 귓가로 들어왔다.
명록의 말.
그의 말에 수진이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어안이 벙벙해서는 명록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얼굴 가득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 뻔했다.
정말 다행인 것을 간호사를 등지고 있는 상태라서 수진의 표정을 간호사는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간호사는 그제야 명록에게 시선을 두고 몸을 돌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명록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잠시 생각하는 듯 미간 사이 주름이 생겼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남자친구 분은 저를 따라오세요. "
그리고 명록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진은 명록이 나희의 보호자로 가도 되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판단도 할 수 없는 가운데 명록이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그럼... 갔다 올게...... "
" 으...응. "
수진도 어정쩡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벌써 저 앞에 가버린 간호사를 향해 뛰다시피 빠르게 걸음을 옮겨 쫓아갔다.
사람들 사이 사라진 그들을 보며 일단 수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선 나희 집에 알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감정이 몰려오고 있었다.
대체 보호자 만이 들어야하는 말이란 것이 무엇일까.
친구는 안 되고 가족이 들어야 하는 말.
보호자.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지며 수진은 침대 위 나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정제라도 받은 것인지 나희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쌕쌕거리는 숨소리는 내며 눈을 감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잠이 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희도....
간호사의 얘기를 들었을까?
아무 말도 안하고 누워있는 나희에게 물어볼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오면서 보았던 그녀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떠올리면 가만히 두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잠들어보이는 그녀도
가면을 쓴 채 명록의 일로 마음이 심란한 상황일지도 몰랐다.
하아....
하혈....
역시 그게 그런 일이면 어떡하지?
수진은 다시 혼자만의 시간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불안한 마음에 입술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닫힌 문 쪽을 바라보았다.
명록이 사라져간 문.
저문 너머에서는 어떤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을까.
무슨 대화가 오가고 있을까....
수진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
하지만 하나 같이 결론은 같았다.
아니라고 애써 부정해도 왜 마지막 결론은 늘 그곳을 향하는지,
그런 결론 밖에 내리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 둘 서로 아귀가 맞아 맞춰지는 퍼즐처럼 완벽해서 멈출 수 없었다.
임신....
아니면 유산?
어느 쪽이든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나희가 임신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희도 수진도 그 또래 여대생들이 그러하듯
임신을 해서 누군가를 양육하기엔 많은 것이 부족했다.
특히 나희의 말에서 얼핏 보였던 집 안 사정으로 비춰서 볼때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마 당장이라도 그 엄하다는 집으로 끌려갈 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퇴...
최소한 휴학.
아니 역시 학교를 그만 둬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남은 선택은 딱 하나 뿐이었다.
결국 말로만 듣던 낙태라는 것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낙태......
수진도 명록과 섹스를 한 뒤로 그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다.
혹시 둘 사이 아이가 생긴다면 명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바로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할까?
하지만.....
지금 수진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볼 때 임신했다고 바로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도 어쩜 명록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낙태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절대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이 오지 않아야 한다고 고개를 흔들곤 했다.
여자는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그러나 낙태라는 건 제 손으로 자신의 아이의 생명을 앗는 행위였다.
어떠한 상황이라고 해도, 비겁한 변명을 할지라도
엄마라는 이름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방법이었다.
낙태......
평소 수진은 그건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차가운 쇳덩어리들이 자신의 몸 안을 들어와 헤집는 상상만으로도 손끝에 소름이 돋았다.
나희는 알고 있을까?
이런 것들 모두.....
수진은 어젯밤 만취한 나희의 모습을 떠올랐다.
그리고 이불에서 흐느껴 울던 그녀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거 같았다.
아마 나희는 자신의 임신을 알았을 것 같지 않았다.
알코올은 임산부에겐 상극이라는 건 상식과도 같았다.
평소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그녀가, 피임약도 꼬박꼬박 챙겨먹던
그녀가 임신을 했으리라곤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임신을 했다면 나희가 어제 그렇게 만취 상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임신이 아닐 수도 있잖아?
혹시 그냥 단순히 스트레스에 의한 하혈일지도 모르잖아......
수진이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여자들의 몸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리트머스 종이와도 같았다.
정신적인 스트레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여자의 몸이었다.
생리가 갑자기 안하고 길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갑자기 짧아지기도 했다.
나희의 요새 모습을 보면 분명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다.
도서관 앞에서 있었던 중년 남자와의 실랑이......
유부남과 만나왔다는 것에 대해 분명 나희도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또 자신과도 냉전을 펼치고 있었지 않았던가.
또한 바로 이어지는 중간고사.
유달리 빡세게 힘들었던 시험 기간 동안 나희는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거의 방에도 가지 않고 밤샘을 해가며 의자에서 버티고 또 버텼다.
옆에서 보기에도 너무 무리하게 공부를 했다.
그래....
그래서 하혈을 했을지도 몰라.....
수진이 가장 희망적 결론을 내리는 동안 순간 옆에서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수진이 고개를 들어보니 명록이 어느새 그녀의 곁에 와서 앉아있었다.
궁금함에 올려다본 명록의 얼굴을 보자마자 수진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자못 심각한 표정의 명록의 얼굴.
그늘이 가득 담긴 그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듣고 왔길래 저런 표정인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머리에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 끝 => > 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