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제2부. # 14화. 평행선 (18)
169.
급하게 자신을 찾을 만한 상황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남기는 확실한 감정은 딱 하나였다.
불안함.
분명 이것은 수진을 만나러 가기 전.....
그가 느꼈던 감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관두자.....
그냥 정말 날 보고 싶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내가 휴가도 힘들게 낸 것도 알고.....
엠티에 가서 보니까.....
내가 보고 싶어졌을 거야.....
같이 여행가기로 하면서.....
우리 얼마나 웃었는데.....
여행계획을 세우면서 통화하면서
서로 신나했던 순간을 애써 떠올리며 명록은 침을 삼켰다.
마른 침이 목구멍을 강하게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답답한 가슴이 힘들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삼켜진 침이 말라가는 듯한 그곳에
조그만 갈증이라도 해소시켜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그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랗고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
잠은 일찍 깨었지만 영 머리가 개운하지 못했다.
아버지한테 미리 얘기는 해서 SUV를 몰고 나올 수 있었다.
약간 구형이 되어버린 차지만 아버지의 애마.
애지중지 매일 세차하는 자신의 차를 내어주는 손이 분명 그리 탐탁한 표정은 아니었다.
" 조심히 운전해라. 주차할 때 조심하고. "
아버지의 눈동자에 담겨있는 불신의 색깔.
예전 수진을 만나러 가기 위해 마구 회사차를 거칠게 몰고 달려가던 모습을 목격하신 후로
명록에 대한 신뢰도는 급하강 해버리고 다시 원래 자리로 복구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원래 신뢰가는 것이 쌓기는 어렵지만 깨진 뒤 다시 만회하는 건 어려운 법이긴 했다.
예전부터 사고 싶어 하시던 낚싯대에 대한 거래가 없었다면 절대 내어주시지 않았을 자동차 키.
그러나 아침에 키를 주시며 그 결정에 후회를 하시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바로 키를 받아들고 바로 서둘러 길을 떠나는 명록이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 돈으로 차를 렌트했음 더 싸게 먹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십분의 일.
훨씬 적은 비용으로 해결할 문제였는데 어제 하윤과 마신 술이 과했던 모양이었다.
제대로 계산기를 두들기고 한 공정 거래가 아니었다.
흐음....
어차피 아버지 생신 선물로 사드릴 생각이었잖아.....
일석이조.....
일석이조....
혼자 되뇌며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지만
순간 생신 선물은 별도 준비해야할 거 같은 불길함에 입맛이 쓰게 느껴지고 있었다.
새벽 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 여행준비는 수월했다.
간단히 갈아입을 옷가지하며 놀라갈 채비를 하고 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가볍지 않았다.
수진에게 받은 엠티 장소로 가는 도로는 출근길과 맞물려서 붐비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난히 눈을 번거롭게 하는 햇살이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머리에 두통까지 가져올 기세였다.
명록은 운전석 선바이저를 내리고는 선글라스를 꼈다.
그래도 좀 일찍 출발한 덕분에 생각보다는 빨리 시가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교외로 연결된 도로로 나오자자마 윈도우를 조금 아래로 내렸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솔솔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뻥 뚫린 도로에서 속도를 높이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반대편 차선에는 차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시내로 들어가기 위한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래....
휴가잖아.
수진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면 되는 거지 머....
명록은 준비해온 음악을 들으면서 목적지로 신나게 달렸다.
수진이 간 엠티 장소는 꽤 먼 곳이었다.
서둘러 가고는 있었지만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도
그녀에게 부담이 될 거 같아서 페이스를 조절할 겸 쉬엄쉬엄 운전했다.
잠시 차를 세우고 수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 조금 있으면 도착. 준비 다 했어?]
전송된 것을 보고는 잠시 스티어링 휠에서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는데 바로 휴대폰에서 문자수신음이 들렸다.
펼쳐보니 수진의 답문자.
[ 응, 나가 있을까?]
생각보다 일찍 일어난 모양이었다.
문득 자신이 보냈던 엠티가 머리를 스쳤다.
선배들이 준 냉면사발주를 마시고 떡이 되어버린 신입생 첫 엠티.
고등학교 시절 또래들과 몰래 소주를 사다가 먹은 적은 있었지만
그렇게 무식하게 술을 마셔본 적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거의 인사불성 상태에서 쓰러져 자고
점심쯤에서야 일어나보니 누군가 토해놓은 구토 자국이
그의 옷에 잔뜩 묻어있었다.
이상스러운 것은 겹겹이 입은 옷에서 맨 위에 입은 옷은 거의 멀쩡한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구토의 흔적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는 거였다.
보통 토를 해놓으면 겉옷이 더 많이 묻어야 정상이었는데 오히려 반대상황이었다.
바로 옷을 갈아입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누가 그랬는지 그리고 대체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아버렸다.
후후후....
참....
그것도 옛날 일이네....
명록은 피식 웃으며 수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 응 10분 후에 슬슬 나와.]
그리고는 천천히 다시 액셀을 밟았다.
시골길이 대개 그러하듯 편도 일차선 도로라 길이 좁게 느껴지고 있었다.
일하러 가시는 농부 아저씨와 아주머니.
아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도로가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하며 운전했다.
대부분 뒤를 잘 안보시며 걷기 때문에 불안 불안한 마음이 있곤 했다.
운전자를 너무 믿으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도로에 걸쳐서 태연하게 걷는 그들의 모습이 위태해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반대편 차선을 아예 넘어서면서 추월하고는 이제 얼마 남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달려와서 그런지 이제야 입에서 휘파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진을 태워서 달려갈 여행지의 사진들이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훗....
수진이도 재미있어야 할 텐데.....
사실 자신도 처음 해보는 것들이 많아서 어떤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래프팅(Rafting).
방송에서 보기는 했지만 연인이 같이 노를 저으며
계곡을 내려가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여서 준비한 이번 여행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동양 최고 높이의 번지점프.
군대에서 유격하면서 애인이름을 부르라고 말하던
조교의 말에도 비쭉거리던 시간이 못내 아쉬웠던 그였다.
이번에 수진이를 껴안고 사랑한다고 외치면서 뛰어보리라 생각하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그녀가 번지점프를 탈지가 문제였다.
에이....
보니까 여자들이 더 잘 타던데 머.....
방송에서 보았던 여러 번지 점프 관련된 연예인들을 떠올리며 피식 소리를 냈다.
명록은 어찌 됐든 이번 여행에서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생각에 어젯밤 가졌던 상념은 잊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앞에 수진이 묶고 있는 숙소가 보였다.
수진이 나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역시 바로 빠져나오기는 좀 무리였나?
명록은 쩝쩝 입맛을 다시고는 주차할 자리를 찾았다.
시골이라 아무데나 세워도 그만이었지만
그래도 수진이네 학과 사람들에게 보이는 건 좋지 않을 거 같았다.
원래 땡땡이는 들키면 만인의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남친이 데리러 오는 것을 들키면 아마 교수님들도 결코 좋은 시선을 보낼 리 없었다.
숙소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공터....
커다란 나무 뒤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수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 나왔어? ]
아까는 바로 답문을 보내던 수진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문자를 보내도 영 답이 없었다.
흠.....
명록은 십여분 정도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휴대폰을 열고는 자판을 꾹꾹 눌렀다.
[ 어디야? 나 바로 앞에 왔는데... 들어갈까?]
괜찮다면 한번 들어가서 보고 싶기도 했다.
어젯밤 자신을 괴롭혔던 상념들이 모두 헛된 생각이었음을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전화한 수진의 마음이
그냥 단순히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는 그런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수진에게 답이 없었다.
슬슬 명록의 마음에 불안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일이래....
수진이 답을 못하는 이유가 뭘까?
답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든 의문.
휴대폰은 바로 언제나 곁에 두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답을 못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설마.....
그사이 잃어버려서?
말도 안 돼....
-라고 바로 명록은 고개를 저어버렸다.
엠티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릴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한정된 장소였다.
잠시 손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바로 찾을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근데....
왜 연락을 안 하지?
수진이 답을 하지 않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명록은 조금씩 자라던 불안이 의혹으로 바뀌고 있었다.
설마......
그냥 날 돌려보내려는 건가???
어제 술김에 빠져나간다고 하고는 막상 아침에 자신의 문자를 보고 답은 했지만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돼서 이렇게 답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명록은 입에 쓸개를 담아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이....
설마.....
애써 부정하면서 쓴웃음을 지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점점 사실처럼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명록은 초초함에 다시 문자를 보냈다.
[ 뭐해? 지금 바빠?]
그러나 여전히 수진에게는 답이 없었다.
그렇게 또 다시 십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명록은 답답함에 들어가서 찾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두 발자국 걸었을까?
순간 입구에서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수진의 모습.
반가움에 손을 들고 소리치려는데 바로 그의 움직임이 딱 멈춰버렸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진이 부축하며 또 다른 여자애를 데리고 나오고 있었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
그건 나희....
바로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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