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제2부. # 14화. 평행선 (15)
166.
명록과의 통화를 끝낸 지도 한참 되었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버스를 타고 장시간 이동하고.....
도착하자마자 체육대회랍시고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몸은 곤죽이 되어 있었지만, 머릿속에 가득 차는 상념들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특히나......
아까 보았던 충격적인 정사 현장의 광경도
마치 눈앞에서 벌어진 듯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어둠 속에 잠긴 방.
잠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가운데
밖에서 아직 술판에 있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리는 거 같았다.
수진은 애꿎은 베개만 이러 저리 바꿔 베어보고 이불 속에서 자꾸만 몸을 뒤척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들었던 의문.
수민은....
나한테 정말 키스하려고 한 걸까?
이번 엠티 출발부터 근처에 있던 그 아이.
술자리에서도 은근히 자신에게 신경써주는 수민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그때..... 내가 너 좋아한 거 알았어? "
느닺없이 튀어나왔던 수민의 말.
아직도 설마....
날 좋아하고 있는 걸까?
수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수민이 키스를 하려 했었던 것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그런 순간에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더 바보스럽고 후회가 되고 있었다.
왜 밀쳐내지 않았을까......?
그전까지 자신에게 접근해오던 남자애들에게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녀였는데 오늘 수민에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가만있었다는 것이
왠지 분한 마음까지 들게 만들고 있었다.
설마....
내가 원했던 거야?
자책감.
아니 자괴감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명록과의 불화를 틈타
수민과의 키스를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키스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때 그 둘이...
재희와 선배가 오지 않았더라면.....
수진의 감은 눈꺼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명록과 통화를 하는 내내 심장을 콕콕 찔러오는 미안함을 감추는 건 또 얼마나 쉬웠던가.
아무렇지 않은 듯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와달라고
그에게 말하던 그때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서 보았다면
정말 끔찍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덜컹.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수진은 깜짝 놀랐다.
잠기었던 문의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여는 소리였다.
삐이이익.
탁.
녹슨 듯한 경첩의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더니
다시 문이 닫히고 어둠으로 돌아왔다.
이불 속에서 살짝 핸드폰을 열어보니 어느새 새벽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아침까지 달리려는 용자들 빼곤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 시간에 들어오는 사람이 누굴까 싶어 이불 사이로 빠끔히 내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나희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불빛.
어두운 방 안에서도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의 얼굴과 모습이 위태해보였다.
속이 안 좋다고 누워 있었는데 언제 밖으로 나갔는지
벽을 짚으며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헐...
얼마나....
술을 마신거야?
그렇게 오래 같이 어울리고 다녔던 수진도
처음 보는 만취한 나희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거 같은....
낙엽처럼 너무도 약해 보였다.
비틀비틀 몸이 마구 휘청거리던 그녀는 얼마나 취했는지
화장조차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 이불 안으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수진에게 나희의 이미지는 힘든 환경 속에서도
늘 그 자리를 유지해서 올 곧은 사군자의 대나무 같은 모습이었다.
냉전 중인 나희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엿보게 된 건.....
수진으로썬 커다란 충격이었다.
충격의 밤.
이미 한번 심장이 벌렁거리는 일을 보고 온 뒤에
또다시 보는 충격에 수진은 대체 무슨 일인지 생각할 여우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바로 더 경악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진이 미처 그 이유를 헤아리기도 전에
나희가 들어가 있는 이불 아래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고요에 잠긴 방안을 적시는 작은 흐느낌.
바로 나희의 울음소리이었다.
나희의 울음은 사춘기 시절 야밤에 들었던.....
엄마의 그것만큼 수진에겐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녀가 저렇게 숨죽여 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선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가 저러는 이유 중에 하나가
수진 자신과의 관계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면 최소 자신이 목격한 일과 관련 있으리라.
아....
대체 난 왜....
나희의 그 일을 보게 될 것일까.....
알고 싶지 않았던 일을 알게 되면서
나희와 지금 이렇게 되어버리고
나희가 지금 울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괴로웠다.
바로 지척.
손을 뻗으면 닿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나희가 있었지만
수진은 지금 그녀에게 어떤 위로도 전할 수 없었다.
잠 못 이루는 밤.
깊은 새벽.
그렇게 나희는 한참을 이불 속에서 울고 있었고,
수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심란한 새벽을 보냈다.
두 여자의 길고 긴 새벽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던 다른 사람이
문고리를 잡고 들어오려는 순간까지 계속 이어졌다.
**************
" 으윽....... "
밖에서 부산스레 움직이는 소리에 잠이 깬 수진은
생각보다 눈부신 햇살에 인상을 쓰며 일어나고 있었다.
심란한 새벽.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빠져버린 잠이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숙취는 없었지만 아직도 몸속에 흐르는 술기운때문에 속이 좋지 않았다.
멍한 머리.
소란스러움에 일어나는 내내 부족한 수면으로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팔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흐리멍텅한 상태가 잠시 흐르고....
앗!
몇 시지?
순간 번쩍 드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서 수진은 휴대폰을 찾았다.
머리맡에 둔 거 같았는데 보이지 않아 당황하는 사이
묵직함이 느껴지는 츄리닝 주머니 속 감촉이 느껴져 손을 넣었더니
역시나 그곳에 있었다.
서둘러 꺼내서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맞춰두었던 알람은 새벽의 여파로 잠결에 꺼버린 듯
울리지 않았고, 지금은 오전 10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이..
어떡해!
명록이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수진은 허겁지겁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생각보다 세수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바로 씻고 나오는데, 여기저기 보이는 방 안의 풍경들은
어젯밤의 과음 때문인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방바닥 여기저기에
아직도 늘어져 자는 사람이 많았다.
학생회 임원들도 아직 자는지 일어나서 인원 통제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다시 방 안에 돌아와 나희 쪽을 살짝 살펴보았다.
얼굴까지 덮여진 이불.
그녀도 늦은 새벽에 잠들어서 그런지 아직까지 이불 안에 누워 있었다.
수진은 그런 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당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명록이 오면 자신은 곧 빠져나가야 할 판이었다.
무거운 마음.
그러나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는 다시 방에서 나왔다.
영연에게 말은 하고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학생회 임원으로 그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자는 방문을 살짝 열어 안을 살피니
마침 영연도 일어나서 방안 구석에 자리를 잡고 화장을 하고 있었다.
할 말도 있던 참이라 영연 곁으로 가 앉았다.
" 영연아, 일어났구나? “
“ 아~ 수진아. 후후.... 일찍 일어났네? 어제 수민이하고 잘 놀았어? 쿡쿡.... ”
영연은 앙큼한 어투로 말하며 거울 속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수진에게 어제 고민의 짐 보따리를 하나 가득 넘겨준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부탁을 해야 할 입장이니 괜히 문제삼고 싶지 않았다.
" 나 부탁이 있는데? "
" 부탁??? 먼데? "
" 나 그만 가보려고.... 출석 체크 다 됐지? 나 오빠 만나기로 해서 이만 빠질 거야. 조금 있다 오빠 오기로 했으니깐, 부탁 좀 할께."
영연은 수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더니 되물었다.
" 에? 한참 수민이랑 잘 돼가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왜? 글구 명록오빠가 오기로 한 거야? 너 어제 무슨 일 있었어? "
" 아.. 아니야. 무슨 일은..... "
수진은 어젯밤 숲속에서 보았던 일들이 휘리릭 지나가며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아마도 이 화끈거림은 분명 얼굴 또한 살짝 붉어졌을 테지만 애써 숨기며 말을 이었다.
" 사실.... 오빠랑 이번 주에 원래 여행 가기로 했었는데 그만 엠티하고 일정이 겹쳤거든. 오빠 휴가도 냈는데.... 아무래도 역시 같이 가야할 거 같아서 불렀어. 오빠.... 휴가까지 냈는데, 미안하잖아..... 그래서.... "
수진은 변명하듯 영연이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고 말았다.
영연이 자신의 눈을 거울에 비춰보며 마스카라를 바르는데
집중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수진의 표정관리가 안 되는 굳은 얼굴을
고스란히 영연에게 보여줄 뻔했다.
그랬다간 눈치 빠른 영연이 바로 낌새를 알아채고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어젯밤 일을 캐물었을 게 뻔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연은 화장에 집중하느라 건성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 으흠... 그래? 현지처는 조강지처에게 안 되나 보네? 후후.... 명록 오빠가 뭐가 좋다고 그러냐? 내가 보기엔 수민이가 훨 낫던데.... 훨씬 어리지.... 잘 생겼지.... 키도 크고 제법 센스도 있잖아~ 이 언니가 멍석을 딱 깔아 줬는데 넌 그 올드보이나 만난다고 하고 에휴... 내가 다 한숨이 나온다 한숨이 나와."
" 우씨! 왜 자꾸 수민이랑 나를 엮으려고 해! 됐거든! "
수진은 영연의 말에 괜스레 발끈했다.
놀리는 말인 줄 알면서도 은근히 명록을 깎아내리는 거 같아 약간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그녀의 마수에 어젯밤 잠을 설쳤던 시간이 생각나면서 분함도 가미되었다.
하지만 영연은 여유롭게 마스카라 뚜껑을 닫으며 철없는 아이를 쳐다보듯 수진을 쳐다봤다.
"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이제 헤어질 때도 된 거 같은데 지겹지도 않냐? 내가 저번에 느낀 건데, 여자가 다른 남자 안 만나면, 남잔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린다고.... 열녀문은 있어도 열남문은 없다? 아니? "
" 말도 안 돼. 우리 오빤 달라..."
" 그래... 그렇게 믿으면 마음은 편하지. 니 맘대로 해라. 나중에 후회해도 늦은 거야. 그리고 오빠들한텐 너 급한 집안일로 간걸로 말해둘게. 근데 너 가면 나희가 심심하겠네."
영연은 피식 웃더니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려 눈을 깜박이며
높이 올라간 속눈썹을 거울로 확인하고는 다시 수진을 쳐다보고 말했다.
기집애....
지도 예전엔 나처럼 말하더니....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로
싹 바뀐 영연의 말에 왠지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긴 그녀에 비하면 수진은 짧은 연애중이긴 했지만
그래도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말에 조금 마음이 안 좋았다.
그리고 덧붙인 나희 얘기에 살짝 마음이 찔려왔다.
새벽 작게 소리죽여 울던 그녀를 보았으면서도
모른 체 버리고 가는 자신의 모습.
영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말을 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희 이야기에 수진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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