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제2부. # 14화. 평행선 (13)
164.
10초....
20초.....
통화 버튼을 누른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귓가를 울리는 신호음뿐이었다.
액정에 보이는 현재 시간.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긴 했다.
설마....
벌써 자는 걸까?
평상시라면 잘 리 없는 시간이었지만
수진과의 약속도 깨져버리고 따로 약속도 없이 지내고 있을 명록을 생각하면
일찍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록의 출장으로 약속이 깨지고 만나지 못하던 자신이 생각났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던가.
가뜩이나 어렵게 휴가를 잡았던 명록이 자신의 결정 때문에
혼자서 텅빈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뭉클해졌다.
미안해....
미안해 오빠......
수진은 새삼 그에 대해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꼭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정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통화하고 싶어....
오빠...
전화 좀 받아줘.....
제발....
비록 그가 수진의 상상대로 자고 있을 지도 몰랐지만,
미안함과 뒤섞인 이기적인 마음은 계속해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게 만들었다.
채 일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을 텐데 너무도 긴 시간.
익숙한 안내 멘트로 넘어갈 거 같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갑자기 신호음이 절단되며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수진아..... "
명록.
약간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탁 하고 그릇에 풀어진 날계란처럼 긴장했던
수진의 팽팽한 마음을 한순간 풀어주고 있었다.
**************
" 후후후후...... "
그녀의 입술.
약간 백열등에 가까운 황색 불빛 아래
어두운 조명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약간 끝이 말려 올라간 것이 묘한 매력을 풍기며 미소 짓는 중이었다.
하윤.
강 하 윤.
" 왜... 왜 자꾸 웃어요? "
명록은 그녀의 미소와 시선에 왠지 모를
쑥스러움을 느끼며 어색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 비해 하윤은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며 바로 말을 받았다.
" 후후.... 그냥 기분이 좋아서요..... 명록 씨가 이렇게 술 한 잔 하자고 연락도 다하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
" 저번에도.... 우리 같이 한잔 마셨는데요? "
뻔히 보이는 답이지만 명록은 애써 부정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하윤이 살짝 고개를 돌리며 짙어진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술이 반짝거리는 거 같았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
웃음기 가득한 하윤의 눈동자.
그러고 보면 수진보다는 좀 더 짙은 암갈색의 눈동자가
그녀의 눈매를 짙게 만들어주는 게 또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 그...그럼요. "
자신이 들어도 약간 기어들어가는 듯한 대답.
이런 게 고양이 앞에 놓인 쥐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근데.....
왜 내가 하윤 앞에서 작게 느껴지는 걸까?
명록은 자꾸 무언인가 마음에 찔리는 것을
감추려는 아이처럼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하윤의 미소가 신경이 쓰이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 훗.... 그렇다고 해요. 그럼. 후후후..."
결국 적당한 선에서 그녀의 말은 마무리 지어지고 있었다.
관대하고 아량 높은 하윤이 그에게 도망갈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제서야 앞에 놓인 맥주가 시선이 들어오고 명록은 쭈욱 들이켰다.
갈증.
망설임 속에 보낸 문자.
그리고 응답 없었던 시간 속에서
괜히 그녀에게 연락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는 참에
갑자기 수신된 하윤의 메시지.
[ 좋아요. 퇴근 후 만나요 우리.]
수락의 문자도 놀라웠지만 명록의 시선을 잡는 글자가 있었다.
우리.
실로 묘한 감정을 일으키는 단어 하나였다.
마치 그가 수진의 <<남>> 이라는 말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감정의 끈으로 맺어진 듯한 <<우리>> 라는 단어 한마디가
명록의 심장을 둥 하는 소리와 함께 울리고 있었다.
잠시 떨린 마음을 달래며 바로 답문을 보내서
약속을 마무리 짓고는 바로 회사 출근했을 때와는 다른....
가벼운 복장으로 입고 집을 나섰다.
하윤과 정한 약속장소로 가는 동안 계속 마음속에서 느끼는 감정들.
복잡했던 여러 가지 색깔의 감정들.
그때 마음속에서 뒤섞였던 느낌이
지금 하윤의 미소 속에서 회오리를 치며 다시 휘몰아치고 있었다.
" 에이... 왜 혼자 마시고 그래요? 우리 건배해요. 자~ "
그가 혼자 들이키는 모습을 보던 하윤이 씽긋 웃으며 잔을 내밀고 있었다.
명록은 그녀의 말에 바로 입술에서 잔을 떼고 최면에 걸린 것처럼 잔을 부딪쳤다.
짠.
유리컵의 마찰음.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맥주를 들이키는
하윤이 모습이 같이 잔을 들어 마시는 그의 시선에 잡혔다.
가름한 턱선.
그리고 희고 긴 그녀의 목이 명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길게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더니
입가에 묻은 하얀 맥주거품을 손등으로 훔치던 하윤이
명록의 멍한 시선을 보더니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 풋.... 아니 남이 맥주마시는 걸 멀 그렇게 뚫어지게 봐요? 쑥스럽잖아요.... "
그제야 명록은 멈춰져있던 잔을 좀 더 높여
벌컥벌컥 마시고는 탁자에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보던 하윤이 살짝 눈매를 가늘게 뜨며 말이 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
" 갑자기 오늘 술 마시자고 할 때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훗..... 혹시 명록 씨..... 여자 친구랑 싸웠어요? "
쿨럭!!!
목을 타고 잘도 넘어가던 맥주가
갑자기 그의 목젖을 암살자처럼 찌르며 사래가 터져 나왔다.
급하게 기침에 되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테이블 옆으로 몸을 숙이고는 간신히 삼키는데 등에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 어머.... 뭘 그리 놀래요? 그냥 농담 삼아 말한 건데..... 정말인가 봐요? 이런....."
그의 옆으로 다가와 등을 다독이는 하윤의 손길.
명록은 간신히 남은 맥주를 뱃속으로 밀어 넣고
한손을 들어 괜찮다고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윤은 테이블에 놓인 냅킨을 뽑아
그에게 건네고는 조용히 그녀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몸을 일으킨 명록을 찬찬히 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무슨 일 있었어요? 그.... 수진 씨라고 했죠? 여자 친구 이름이...... 예쁘던데..... 정말 싸웠어요? "
그녀의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어조가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장난기 싹 거둬진 따스한 하윤의 목소리.
그리고 명록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같이 약간의 걱정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왠지 모든 것을 말하고 싶은 기분.
이래서 신부에게 고해하고 싶어서 성당을 찾는구나 싶은....
절박한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거 같았다.
명록은 답답했던 오늘 하루의 감정을 그녀에게 말해도 될까
망설이면서도 왠지 그녀라면 받아줄 거 같은 생각에 입술이 달싹거렸다.
얼마 되지 않는 침묵.
순간 하윤이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며
왼편으로 시선을 떨구며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 아.... 죄송해요. 쓸데없는 말을 했죠? 이런 건 물어선 안 되는 건데......미안해요. "
갑작스런 하윤의 사과.
생글 웃던 미소가 사라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표정에 명록이 당황하며 바로 입을 열었다.
"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
하윤의 모습에 그만 그는 목구멍 아래까지 올라왔던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 실은.... 수진이하고......"
**************
한번 터진 말문은 끊임없이 수진에 대한 서운함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녀와 엠티 문제로 싸운 뒤 가슴 속에 쌓아놨던 이야기가
어느새 술술 말이 되서 하윤에게 풀어냈다.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하면서도 놀라고 있는 명록이었다.
그런 수다스러운 명록의 말을 하윤은 웃으며 모두 들어주었다.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도 섞어가면서 한참 수진과 자신과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순간 말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이렇게 수다쟁이가 되다니 하는 생각이 드는 명록이었다.
어떻게 보면 완전 삼자인 하윤에게
이런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왠지 좀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주며
전혀 지루하다거나 왜 이런 얘기를 하나 하는 표정은 전혀 없이 받아주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한 말은 별거 없을지도 몰랐다.
수진이 자신과의 약속을 깨는 것을 말할 때는
" 어머.... 그건 좀 심했네요. "
라고 맞장구 쳐주고.....
같이 여행 가자고 했는데도 안 된다고 말하는 장면에선
" 후후후.....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에효..... 안타깝네여.... "
라고 말하며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명록이 한숨을 쉬는 순간 맥주잔을 들어 그에게 건배를 속삭였다.
" 자자... .우리 한잔 마시고 풀어요. "
명록이 잔을 들자 하윤은 그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맥주잔을 들어 그의 잔과 부딪쳤다.
쨍.
맑은 소리.
유리잔의 소리가 잔잔하게 느껴졌다.
사실 하윤의 말을 되새겨 보면 별거 아닌 말들이었지만
그녀의 추임새만으로도 왠지 자신의 편이 되어준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좀 더 하윤이 가깝게 느껴졌다.
일하며 느꼈던 감정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마음 속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거 같았다.
그런 명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윤은 맥주를 시원스럽게 들이키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 결국 수진 씨는 엠티에 가버렸군요..... 이론..... 그럼 오늘 휴가 첫날이었을 텐데 뭐하셨어요? "
하아......
정곡을 찔러오는 하윤의 질문.
명록은 그녀의 질문에 지루하고 따분했던
오늘 하루의 일상이 생각나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 그냥.... 집에 있었죠. 하하..... 마땅히 할 일이 없더라고요. "
하윤은 그의 대답에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보조개 비스므리한 것이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가더니 샐쭉거리는 목소리로 명록에게 말을 던졌다.
" 피이.... 이제 봤더니 그래서 저한테 연락한 거군요? 어머..... 닭은 싫은데...... "
" 닭???? 닭이요??? 닭이라뇨? "
순간 명록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며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가늘어진 눈매 또한 전혀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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