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제2부. # 14화. 평행선 (10)
161.
야유 섞인 소리로 술자리가 더 시끄러워지는 가운데
수민이가 고개를 수진이 쪽으로 돌리며 속삭였다.
" 야....수진아? 괜찮냐? 좀 취한 거 같은데, 술도 깰 겸 바람 좀 쐬러 나가자. "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좀 핑도는 게 취기가 도는 거 같았다.
알딸딸한 기분.
천정이 살짝 도는 거 같은 게.....
확실히 많이 마시긴 한 모양이었다.
" 어.... 그래. "
그녀가 대답하자마자 먼저 벌떡 일어난 수민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수진은 그 손을 잡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의 손길이 어떤 의도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내민 수민의 손길을 일일이 다 받아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되고....
억지로 힘주어 일어섰는데 몸이 생각과는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앉아있다가 갑자기 일어서서 그런지
아니면 술기운이 확 올라와서 그런지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수민은 내밀었던 손으로 넘어질뻔한 그녀를 부축해주며 옆으로 그녀를 반쯤 안아들었다.
윽....!
생각과는 다르게 오히려 더 밀착되어진 상황에 수진은 화들짝 놀랬지만
이내 그는 수진이 중심을 잡는 것을 보고는 떨어져서 아무렇지 않게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이미 방안은 기석과 다른 남자애들과의 농담따먹기로 왁작지껄해져 있었다.
그런 그들을 두고 살짝 방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후끈 달아오르던 방 안과 달리 건물 밖은
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차갑게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겨울처럼 쌀쌀했다.
산자락 아래라서 그런지 꽤 몸이 떨리는게, 겨울의 추위를 생각나게 하였다.
하지만 지금 수진에게는 그게 더 도움이 되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양 뺨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수진의 술기운이 조금씩 날아갔다.
확실히 아까.....
너무 많이 마시기도 했다.
" 야. 이제 좀 괜찮냐? 걔들이 일부러 너 취하게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나 봐. 남자애들이 뭐 그렇지. 그냥 그렇게 이해해줘.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
수민이 겸연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진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 응... 알아. 기분 나쁘긴 머.... 나도 오랜만에 애들이랑 마셔서 그런지 좀 많이 마신 것 같다. 왠지 일학년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계속 술술 넘어가던 걸. 지금은,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깐 조금 괜찮아 졌어. "
" 하하...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
언제나 장난기 섞인 수민의 목소리가 약간 낮은 중저음으로 깔리는 듯 싶었다.
이런 진지한 면도 있었나 싶어서 수진은 오히려 그게 더 웃음을 나오고 있었다.
학교에선 보지 못했는데....
수민은 언제 학교에 복학한 걸까?
수진은 궁금함에 절로 입술이 열렸다.
" 그나저나 언제 복학한거야? 이번 학기?”
" 어, 이번에 복학했어. 아직 1학년 2학기 전에 교양과목 빵구난 거 채우느라..... 좀 늦었지. 넌 3학년이지? "
" 응. 네가 1학년이라니..... 후후 좀 이상하다. 정말.... 나만 나이를 먹은 것 같아. 애들은 모두 예전 그대로 던데.... "
" 에이.... 수진이 넌 그대로인걸. 오히려 내가 더 나이먹은 거 같다. 군대 갔다왔더니 많이 변했다고 하던데 뭐. 그리고 하도 아저씨 그러는 통에 진짜 아저씨 된 기분이야 후훗.... "
" 음.... "
사실 수민의 말대로 변한 것은 맞는 거 같았다.
수진이 기억하는 수민은 좀더 곱상하고 여리여리한 모습이었다.
마치 같이 있어도 여자애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
그때도 장난기 어린 웃음은 여전했지만
그때보다는 지금은 왠지 조금 더 남자 같이 보였다.
활발해진 성격도 그렇고
남과 스스름 없이 어울리는 모습도 그렇고...
외모에서 느껴지는 느낌보다는 좀더 의젓해졌다고 해야 할까?
이제 여자애 같은 그런 느낌의 아이는 확실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진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골 산속인데도 불구하고 숙소에서 비추는
가로등의 불빛이 강해서 의외로 밤하늘의 별들이 보이지는 않았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고 싶었는데....
대신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알코올 기운이 서서히 옅어지고
술기운이 조금 가시자 밤의 한기가 얇은 티셔츠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팔을 비비며 추위를 달래던 수진의 행동에 수민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걸쳐주었다.
약간 큰 외투가 수진의 몸을 전부 덮고도 남았다.
" 아냐...괘...괜찮아. 너도 춥잖아. "
수진이 손을 저으며 거절했지만
수민이 그녀의 어깨에 점퍼를 걸쳐주고는 살짝 옆으로 물러섰다.
" 에이.... 난 남자잖냐. 난 군대도 갔다온 걸. 됐으니까 그냥 입고 있어."
수민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져 있던 점퍼가 차갑게 얼은 그녀의 몸을 스믈스믈 덮혀주고 있었다.
따스한 체온의 느낌.
그의 몸으로 따듯해진 점퍼가 유달리 포근하게 느껴졌지만
수진의 마음은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남자....
남자라고 말하는 수민의 말.
그리고 자연스럽게 꼬리를 이으며 드는 생각.
명록이 아닌 다른 남자의 호의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수민이 분명 남자로 느껴지는 이상
거리를 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 머리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미 맛본 따스함에 녹아 흐믈흐믈해진 그녀의 방어벽이
수민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만 자꾸만 갈등하고 있었다.
" 고마워... "
수진은 결국 수민의 점퍼를 벗지 못했다.
몸 안으로 파고 들던 한기 속에서 점퍼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가슴을 콕콕 찔러오는 미안함은
살짝 마음 한편으로 밀어버리고
그녀 자신을 위해 타협하고 말았다.
자박 자박.
둘은 서서히 흙을 밟으며 느릿느릿 걸었다.
풀벌레 소리.
찌르르 거리는 알수 없는 소리 속에서
졸졸졸 물소리가 실로폰 소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니 저멀리 밝게 빛나는
건물의 창 틈새로 왁자지껄한 목소리들도 웅웅거리며 흘러나왔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들이 조금씩 뒤로 흐려지고
마침내 두 사람의 신발이 축축해진 흙을 밟는 소리만 남았다.
밤향기에 취해서 조용히 걷던 중 수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수진아. "
" 응? "
멍한 목소리로 답하던 수진의 말 뒤에 바로 수민의 말이 꼬리를 물고 붙어왔다.
" 그때..... 내가 너 좋아한 거 알았어? "
쿵!
순간 고요함 속에서 덜컹하고,
수민의 갑작스러운 과거형의 고백에 수진의 심장이 내려 앉았다.
두근두근거리는 심장고동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려퍼졌다.
당황한 수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 어....언제? "
의연함을 가장한 질문이었다.
과거형.
그러니깐 지금은 아닐 거라는 한 점의 옅은 생각은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덜어내는 열쇠였다.
그래....
지금은 아니라는 얘기일거야......
" 언제긴? 하하.... 당연히 일학년 때지. 그때 너보고 한눈에 반해서 좋아했었어. 근데 숫기도 없던 때라 말도 제대로 못걸고 애들이 너랑 나랑 같이 커플로 묶어서 불러서 더 말도 못했다. 근데 집에 가면 왠지 그걸로 혼자 웃곤 했어... 애들이 우리 수수 커플이라고 놀리던 거 기억나니? "
아주 오래된 옛 이야기처럼 2년 전의 기억을 더듬는 수민의 표정에 심각함은 없었다.
그냥 그땐 그랬었지....
-하고 토로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수진은 애써 괜찮다고 달래고 있었다.
지금도 좋아한다면 이렇게 말할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만약 현재형으로 가져온다면 어떻해야 할지 생각하기 싫었다.
수진은 침착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 그랬었나? 난 네가 나 싫어하는 줄만 알았지... 그때 좀 나하고 거리두고 그랬잖아..... 사실 오늘만 해도 예전과 달리 친하게 굴어서 쫌.... 놀랬는 걸. "
" 흐음... 내가 거리를 두었다고? "
" 응. "
수진의 대답에 수민은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수진은 망설이다가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 너 그럼 지금은 여자친구는 있니?”
" 아니."
생각과 달리 바로 나오는 그의 대답.
나는 지금 남자친구 있어....
-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주변이 어두워져 있음을 알았다.
수진이 주변을 훑어보니 어느새 걷다보니
어느새 건물과 많이 떨어진 외진 곳까지 와있었다.
겹겹이 쌓인 나무 틈새로 아까까지 술을 마시던 건물의 불빛이 흐리게 번지고 있었다.
수민과 단둘이 이런 곳에 있다니....
조금 마음이 불안해지며 애써 밝게 질문을 이었다.
" 너처럼 재미있는 애가 여자친구가 왜 없니? 난 안믿긴다. 얘. 설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아직도 숫기가 없어서? "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민이 정도면 남자친구 삼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친구들이 많은 걸 보면 사교성도 있고,
생긴 것도 멀쑥하고 훤칠한 키에,
늘 밝고 매력적인 웃음까지.....
1학년 땐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수민이 좋아한다고 고백한다면 금세 넘어갈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명록이라는 남자친구가 있지만 말이다.
콧대 높은 자신도 그렇게 느끼는데,
다른 여자애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 아니 그건 군대 가서 고쳤어. 이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안 떤다고. 그냥, 아직은 없어. "
" 그래? 여자들이 눈이 다 삐었나보다. 너처럼 괜찮은 애 안 붙잡고. 후후... "
순간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어떤 말이 감춰져있던 그의 단추를 누른 걸까?
수진은 왠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약간 불안한 마음에 말이 가볍게 흘러나와 버렸다.
" 수진아... "
수민의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깨고 다시 울려퍼졌다.
" 응? "
불안에 살짝 떨리는 수진의 목소리.
물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겠지만 분명 수진은 알 수 있었다.
수민의 부름에 쳐다보는데
수민의 얼굴이 수진의 시야를 장악해버렸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수민의 얼굴이 수진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슬로우 비디오처럼 시간이 늘어나고,
그녀의 심장마저 늘어난 시간만큼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무엇을 뜻하는 걸까....
어떻해야 하지?
수진은 몸이 굳어서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말도, 발걸음 소리도 없어진 그 곳엔
저들끼리 작게 소근거리는 풀 벌레 소리만이 크게 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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