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제2부. # 14화. 평행선 (9)
160.
어느새 해가 꼴닥 넘어가버렸다.
야외에서의 시간은 유달리 더 빠른 듯 싶었다.
어둠에 잠긴 들판.....
숙소 근방 인가에 전등불이 밝혀지고
그곳 만이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끝끝내 명록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희는 여전히 수진과 냉전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민과 식사준비를 하고 온 뒤에도 둘 사이엔 변화가 없었다.
후배들이 준비한 식사시간에도
다시 침묵의 순간으로 돌아가서 수진 옆에 앉아 있었다.
다만 밥도 몇술 뜨지 않고는 몸이 않좋다고 하더니만 일찍부터 방에 들어가 버렸다.
혼자 방에서 무엇을 하나 슬쩍 엿보니 어느새 그녀는 자리를 펴고 누워 자고 있었다.
정말.....
몸이 안좋은 건지.....
수진과의 관계가 어색해서
어디에도 낄 수 없는 탓에 잠자리에 든 것인지
수진은 알 수 없었다.
묻지도 못하고 가만 두자니 답답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어색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사이
어느새 밖에서는 술판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자리를 만들어서
소주와 준비한 안주를 펼쳐넣고 마시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애들의 모습.
선배들과 후배들이 서로 어울리고
동기끼리도 뭉쳐서 무엇이 좋은지 웃고 있었다.
늦게 오신 교수님들도 어느새 학생회 임원들과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보며 수진은 어느 자리에 끼어야 할지
모른 채 이리저리 방황을 하고 있었다.
동기들과의 자리도,
교수님과의 자리도,
그리고 후배들 사이에 끼어 선배 노릇 하기도
모든 것이 번거로웠다.
나희와의 일로 머리가 아프고 연락 없는 명록의 모습에도 마음이 복잡했다.
차라리 이럴거면 장학금을 포기하고
명록과 여행을 가는게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또한 좋은 생각은 아니라고 고개를 휘저었다.
아직도 아버지의 퇴직에 대한 얘기가 매듭지지 않아 불안한 상태였다.
물론 부모님들은 그 뒤 그녀의 앞에서
그런 내색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수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태풍이 올지 알고 있다면야 대비를 하고 있겠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폭풍이 더욱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명록의 말을 따라서 여행을 갔어도
내내 장학금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했을 테고
그런 상태에서 여행이 즐거울 리 없었다.
아니 이것도 그냥 하나의 핑계일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복잡하고 마음 속에서 엉켜서 수진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새삼 자신이 이렇게 사교성 없는 사람이었나 생각하며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3학년.
영연, 설아 그리고 나희.
이 셋을 빼곤 지금의 수진에겐
친구라고 딱히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활발한 성격이었던 수진은 과 활동도 활발히 하고
동기들과도 친하게 지냈었는데, 명록과 사귀면서부터는 전혀 그럴 수 없었다.
남는 시간은 명록과 데이트 하느라 바쁘게 지내다보니
동기들과의 모임도 슬슬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긴 가장 친하게 지내는 나희 무리와의 만남도
서서히 줄어가는 상황인데 다른 애들과의 자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리저리 술자리에 빠지게 되고,
과 활동도 할수 없게 되더니,
점점 다른 대학친구들과 만남이 줄어들어 버렸다.
그것이 결국 지금 이렇게 겉돌 수 밖에 없게 만들고 있었다.
전등 불빛 아래 하하하 웃으며 이야기 하는
학과 아이들이 왠지 다 멀게만 느껴져 마치 액자 안의 사진처럼 느껴졌다.
교수님 옆에서 깔깔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 영연이 모습이 슬쩍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연애도 하면서 나름 열심히 생활하는 영연.
어떻게 보면 자신과 가장 비슷했던 그녀였다.
물론 전 남자친구과의 이별로 지금은 나희와 설아 쪽에 가까운
연애관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가장 비슷한 사고방식으로 짝짜꿍을 맞춰주던 그녀.....
지금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불평하면서도
나름 즐겁게 연애하고 공부는 귀찮아하면서도
나름 열심히 학과생활도 하는 그녀가 부럽게 느껴졌다.
밖으로 도는 것을 본 같은 학번 동기의 손에 끌려와서
간신히 또래 학번 애들이 모임 방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수진은 겉도는 느낌을 없앨 수 없었다.
오랜만에 과 애들과의 자리.
그들이 나누는 얘기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자못 취업에 대해 심각히 얘기하는 것을 보며
어느새 직장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할 나이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옆자리 남자애들이 무언가 심각히 토의하는 것을
귓등으로 들으며 수진은 종이컵 가득히 따른 소주 속에서
부서지는 형광등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주가 찰랑거리는 가운데 전등 불빛이 아른 거리는 것이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중이었다.
" 야~ 수진아, 뭐해? "
갑자기 그런 생각을 깨어버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흔들었다.
장난스런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수민의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전등불 아래 보니 여자처럼 곱상하게 붉은 입술이 더욱 강하게 보였다.
수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 아... 아무것도..... 그냥, 뭐 좀 생각하느라.... "
궁색한 변명.
하지만 수민은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무슨 생각? 내 생각? 흐하하아. 농담. 농담. 장난이고, 쟤들이 게임하자고 하는데 여기서 재미없게 있지말고 저리로 자리 옮기자. "
수민은 그녀의 생각이나 대답은 이미 통과해버렸는지
수진의 손부터 대뜸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 야야... 난..... "
수진이 당황해서 말을 꺼내려는데
이미 그의 손길에 끌려서 엉덩이가 반쯤 일어나 있었다.
수민의 능글스런 말이 이어졌다.
" 후후. 에이. 아까부터 봤는데 술도 마시지 않더라. 나랑 같이 가자. 저기 꽤 분위기 좋아. "
반강제적으로 끌려일어나는 모습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수진은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옮기면서도 그 손을 뿌리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엠티 내내 그녀를 곤경에서 구해주는 손길,
지금도 이 갑갑한 방에서 구원해주는 것이라 생각되었기에
뿌리치지 못했다.
다만....
수민의 손바닥이 움켜쥐고 있는 손목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다
" 이야~ 수진이 왔구나? 앉아앉아. 하하하, 칙칙한 우리방도 좀 화사해지겠는걸? 야, 어서 자리 좀 내나봐. "
방에 들어서자마자 환호하는 남자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수민이와 어울리던 그 남자동기애들이었다.
" 아.... 미안해. 이렇게 와서...... "
" 푸하 무슨 소리를! 언제나 환영일걸. 오히려 우리가 미안하지. 머 단기로 다녀오긴 했지만 우리들 다 예비역이잖냐. 아저씨 소리를 듣는다구, 이제..... 에휴 "
왠지 호들갑스런 남자애의 말에 수진은 피식 웃었다.
그런 그녀의 미소에 그 아이도 히히 웃으며 말했다.
" 예비역 냄새 난다고 어울리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하하. 어서 앉아라. 진수야, 새 종이컵 좀줘. 아니 그거말고 새거. 아리따운 숙녀분 오셨는데 새걸로 셋팅해야지 임마! "
" 그건 니가 안 씻어서 나는 냄새야 자식아. 좀 씻어라 씻어. 니 냄새에 수진이 얼굴이 찡그려졌잖냐. "
티격태격하며 수진이 앉을 자리를 만드는 그들이었다.
수민의 친구들.
아니 수진의 동기들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어찌 됐든 많은 이가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반가워 하는 모습에
수진 또한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요란스럽게 비어진 자리에 수진이 앉았고
수민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자리가 정돈되자 술잔이 다시 오가기 시작했다.
2학년이 된 이후로 동기들과 술을 마신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의 그녀의 방문을 다소 야단스럽게 환영하는 친구들의 인사말에
수진도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술자리.
별거 아닌 시시껄렁한 농담에도 배를 잡고 웃었던 풋풋했던 신입생시절의 기억들.
모든 게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추억이란 언제나 달콤했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달콤함.
그래서 그 추억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시간도 달달해지는 모양이었다.
그 향수에 젖어 미지근하게 식어 쓰게 느껴지던 소주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한 잔 한 잔, 작은 종이컵에 추억을 가득 채워 마시다 보니
수진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어갔다.
" 그 때, 과제를 안 해와서 수진이 뒤에서 몰래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진이 머리가 뚝, 하고 떨어지는거야. 그때 하필 교수랑 눈이 딱! 하고 마주쳐서... 그 덕분에 교수한테 제대로 찍히고, 한 학기 내내 시달렸잖냐. 그게 다 네 탓이라니깐? 누가 알았겠어? 천하의 배수진이 수업시간에 잠을 잘 줄이야! "
" 그래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나라고 수업시간에 안 졸겠어? "
" 그러니깐, 자~ 짠 한번 하자고. "
기석이 잔을 들어 수진에게 내밀었다.
별거 없이 수진을 탓하며 이야길 꺼낸 이유는 결국....
수진에게 술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였다.
뻔히 속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웃으며
잔을 부딪히려는데 수민이 그녀의 잔을 빼앗아 갔다.
" 얘 좀 취한 거 같다. 하여간, 자꾸 이렇게 무식하게 술을 마셔대니깐 여자애들이 우리랑 술 안 마시려고 하는 거 아니냐? 고만 좀 먹여라, 좀.... 어렵게 모신 우리 수진이한테 레이디 대우를 해줘야지. 안 그래? "
수민이 대신 원샷해버리고 타박하듯 기석에게 말을 건넸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까부터
수진을 독점하다시피한 기석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 그래, 너 때문에 여자애들이 우리랑 안 노는거다 임마. "
" 그러니깐 니가 쏠로지 임마. 여자애들은 무식하게 술먹이는 남자를 제일 싫어한다고 짜사~! "
기석의 주변에 앉은 남학생들이 수민을 따라 장난스럽게
타박하기 시작하자 기석도 별다른 대꾸를 못하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 우쒸! 난 수진이 재밌게 해줄려고 한 거라고. "
" 우우~~~ 웃기네. 크크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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