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제2부. # 14화. 평행선 (8)
159.
오늘은 시계로 전락해버린 그녀의 휴대폰.
몇 번을 봐도 새로운 메시지도, 전화도 오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명록의 연락 또한 역시 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의 말에 너무 화가 나서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오긴 했지만,
집에 돌아와서 화가 좀 식고 나자 명록에게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그 뒤 일상적인 통화나 문자도 그녀가 먼저 보냈다.
명록 또한 평소처럼 답해주고 그렇게 그와의 연락이 오갔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이 하나의 짐이 되어 수진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제대로 풀지 않은 다툼의 앙금.
그것은 마치 체했을 때처럼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아마 그것은 명록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수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엠티를 출발하기 전날.
갑자기 밤중에 걸려왔던 그의 전화.
술에 취한 듯 약간 혀가 꼬여있었던 그때의 통화.
마치 애원하는 듯 말하던 명록의 목소리까지 더해져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 너.... 엠티 가지 말고 나랑 여행가지 않을래? "
술에 취한 듯 약간 혀가 꼬인 목소리에 낮게 울렸다.
그때 정말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걸....
나도...
좋아서 엠티에 온 건 아닌데....
오빤.....
왜.....
수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까지 녹아 사라지지 않은 작은 앙금 때문에
명록이 먼저 연락하기 만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최소한 그녀가 출발했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어떤 반응이라도 보낼 줄 알았다.
그냥 일상적인 인사말이라도.....
그러나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명록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똑똑.
순간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수진이 문을 살짝 열어보니
수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 수진아, 역시 있었구나? 후후.... 저기... 찌개를 끓여야 하는데 하나도 모르겠다. 바쁘지 않으며 나 좀 도와줘."
" 머? 찌개? 무슨 찌개?"
갑작스런 수민의 방문.
하지만 이번에도 난처한 상황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의 등장이 수진은 반가웠다.
살짝 나희를 살펴보고 바로 그의 뒤를 따라 얼른 방에서 나섰다.
수민이 그녀를 끌고 도착한 곳은 같은 조 남자애들이 묵는 방이었다.
썰렁한 여자방과는 다르게 다들 저녁을 준비하는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소수의 인원이지만 나름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 하하.... 사실 식사 준비에 걸려 버렸거든. 근데 모인 애들이 다 요리해본 적이 없는 거야... 대충 기억나는 대로 끓여보는데 이러다가 맞아 죽을 거 같아. 우리 좀 살려주라. "
그의 요란스런 수다를 듣고 있으니 주변에
가련한 눈망울을 한 남자애들이 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처로운 강아지들을 보는 듯한 느낌.
수진은 우선 보글보글 소리를 내고 있는 찌개를 보며 물었다.
" 이거.... 무슨 찌개인데? "
" 아~ 김치찌개. 하하.... 우선 그렇다고 하고 끊이는데 근데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모르겠어. 소금 넣어서 간 맞추는 거야? 너무 싱거운데...... 김치도 사온 거로 해서 그런가 영 집에서 먹던 맛이 아니야. "
수진이 수저를 건네받아 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국물을 떠먹어 입에 넣었다.
김치찌개가 어려운 음식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맛을 냈는지 밍숭맹숭한 게 신기할 정도로 맛이 없었다.
설마 물만 넣고 끓인 거 아냐?
" 어때?"
간 보는 수진의 표정을 살피던 수민이 입을 열었다.
" 음... 좀 많이 싱겁긴 하네. 혹시 재료 다른 건 가져 온 거 없어? 조미료는? "
" 응 여기 조미료들. 그리고 라면이랑 햄 좀 챙겨왔지. 다른 건.... 양파나 파 같은 거? "
" 아, 그거 좋겠다. 우선 가져온 것들 다들 줘볼래?"
김치찌개라고 정말 달랑 물과 김치만 넣었는지 맛이 영 심심했다.
라면과 햄 같은 기름진 게 들어가면 딱일 듯 싶었다.
이미 알 수 없는 조미료들이 들어가 더 넣으면 안 될 듯 싶어서
살짝 간만 맞추고 수민이 건네주는 라면과 햄을 조금 잘라서 넣었다.
뚜껑을 덮자 다시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고
잠시 후 열어보니 코펠 안 국물 위로 조금씩 기름기가 올라와서
보기에도 김치찌개 같아 보였다.
한 움큼 올라오는 하얀 김.
그 김과 함께 끓는 찌게 위로 맛있는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킁킁 거리던 수민이 더 기다리지 못하고
수저로 국물을 조금 떠서 간을 보더니 살짝 웃었다.
" 우와~ 이제 맛있는데? 이야... 이래서 여자의 손길이 이래서 필요한 거구나! 자자... 수진아 너도 한번 먹어봐."
수민이 국물을 한 숟갈 떠서 호호 불더니 수진의 입으로 가져왔다.
수진은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방금 수민이 입을 댄 수저!!!
그가 바로 그녀의 앞에서 맛을 보는 것을 봤는데
그걸로 다시 국물을 떠서 주다니 조금 꺼리직할 수 밖에 없었다.
결벽증처럼 깔끔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애인이나 가족, 혹은 친한 사이라면 얼마든지 편하게 받아먹겠지만
수민은 모두 해당이 안되는 더군다나 남자애였다.
맛보라는 것은 알겠지만 자신이 홀짝 마신 그 수저로
다시 국물을 퍼서 주다니 수민은 어떻게 보면 참 무신경한 아이였다.
하지만 호호 식혀서 주는 그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곤란해서
수진은 결국 그녀의 입으로 가져온 국물을 군말 없이 마실 수 밖에 없었다.
후루룩....
뜨거운 국물이 입 안으로 들어와 혀 위에 느껴졌다.
아까와는 달리 햄과 라면 스프의 염분이 국물에 배어나왔는지 맛이 제법 괜찮았다.
응급조치였지만 나름 효과만점임이 분명했다.
" 음... 이제 먹을 만 한 거 같네."
수진은 수민의 지나친 스킨십 같은 행동들에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수민이 자신을 여자로 여기고 있다면 명록에게 미안하게 되기 전에 빨리 쳐내야 했다.
" 역시, 네가 구세주라니깐? 민준아, 이거 먹어봐. 수진이가 살려준 김치찌개다. 역시 여자애들 손이 닿으면 요리 맛부터 다르다니깐?"
수민이 호들갑스럽게 옆에 있던 친구를 붙잡아
수진에게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호호 불어 입에 국물을 넣어주었다.
민준이라는 아이도 금세 화색이 돌며 말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람?
특별히 자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란 걸 깨닫자
안도하면서도 조금 실망스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접근하는 그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자기에게만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에
조금은 마음이 샐쭉해지는 수진 자신이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정말 오늘따라 왜 이러지?
도끼병 걸린 사람처럼...
수민의 움찔 거리는 빨간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며
수진은 자신의 이런 마음을 깨닫고는 명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남자애를 자꾸 의식하는 것도 미안했고 그런 애와 자꾸 얽히는 것도 미안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수민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망설임 끝에 결국 아무도 연락하지 못한 채 저녁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명록은 다시 휴대폰을 들고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연락이 없는 수진.
비어있는 새 문자메시지함.
거래처에서 급한 건으로 한번 연락온 전화 외엔 그에게 걸려온 전화는 한통도 없었다.
하아...
스팸전화마저 없는 하루라니.....
참나.....
이런 날도 있다니...
명록은 휴대폰을 손 안에서 돌리며 고민하고 있었다.
부모님들은 약속이나 하신 듯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셨다.
하긴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없는 일도 있었으니
이런 시간에 집에 오실 리 없는 일이었다.
흐음....
어쩐다?
귀찮은데.....
그냥 집에 있을까?
하지만 뒤돌아서 텅 빈 거실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싹 지워졌다.
이미 오후 내내 뒹굴던 거실이었다.
그런데 또 저녁도 그렇게 지루하게 보낸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뻔한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뭉쳐봐야 서로 따분한 직장 얘기가 떠들게 뻔했다.
그리고 이미 연락했지만 그 몇명한테 거절 받은 뒤라 마음 또한 샐쭉해진 상태였다.
순간 그의 머리에 한사람이 떠올랐다.
생글생글 웃으며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준 사람.
그리고......
묘한 여운의 말을 남기고 헤어진 그녀.
조금 마음의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왠지 그녀라면 지금 이 지루함을 바로 씻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막상 전화를 걸려고 하니 손가락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 사실.... 오늘 일찍부터 만나고 싶어서 조조상영 보고 싶다고 한 거에요. 후후... "
하윤의 말 한마디.
그건 분명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명록이 수진이라는 여자 친구가 있음을 알면서도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그녀에게 연락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일요일의 데이트는 벚꽃 축제에서 빚진 부분을 갚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비록 그것이 하나의 핑계라고 해도 나름 자신을 설득하는 하나의 당위성을 지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연락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시간을 때워줄 누군가를 찾으면서 하윤에게 연락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에 대해 호감을 표시한 여자에게 만나자고 연락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에 대해 뻔히 알면서 바로 전화를 걸 수 없었다.
그러나....
수진도 없는 상황에서 휴가의 첫날 이 지루한 저녁을 혼자 보내기엔 너무 억울했다.
그녀와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껴두었던 휴가 아니었던가.
근데 수진은 그런 그를 버리고 엠티를 가버렸다.
마음에 남아있던 조그만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듯 했다.
그리고 들리는 수진의 목소리.
" 남한테 내가 왜 돈을 받아야 하는데?! "
남.
남!
남!!!
명록은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는 다시 휴대폰을 펼치고 문자를 작성한 뒤 전송을 눌렀다.
하윤에게 보내는 메시지.
[ 혹시 저녁때 술 한 잔 하실래요? ]
열두 글자 간단한 메시지.
하지만 그것을 보내는 명록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해도 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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