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제2부. # 14화. 평행선 (7)
158.
자신의 몸에 있어야할 타격 대신 무언가 다른 감각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뜨거운 체온.
살짝 풍기는 땀의 냄새.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누군가의 팔.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수민이 수진을 품에 안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 대신 감싸 안고는 공을 막고 맞은 모양이었다.
세이브라고 들리는 심판의 외침소리.
하지만 수진의 귀에는 그 소리가 멀리만 느껴졌다.
의외로 넓은 가슴.
땀에 살짝 젖은 면티의 느낌.
그리고 싸한 남자 스킨 향이 그녀의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수진은 쿵쾅 거리는 수민의 심장소리가 고스란히 들릴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음을 알았다.
그 순간 수민이 남자라는 생각이 스쳤다.
" 오오~~!!! 나이스 플레이이~~~~~~~~~~~~~~!!!"
여기저기서 야유와 환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게임이지만 이런 장면을 연출하게 되어
민망해진 수진은 빠르게 수민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툭 하고 날아오는 공에 맞으며 게임은 종료 되었다.
명록이 아닌.....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모습이라니!
수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리로 돌아가는 내내 민망해서 얼굴을 푹 숙이고 걷고 있었다.
수민이 수진을 쫓아오더니 수진과 걸음을 나란히 했다.
" 아.... 미안. 바로 막았어야 되는데 너무 아파서..... 와... 그런 공을 너한테 던질 줄은 몰랐어. 괜찮아? "
수다스런 그의 목소리에 수진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수민은 진심 아까운지 주먹을 불끈 쥐며 발을 굴렀다.
" 에이.... 한번만 이기면 결승인데 아깝다..... 그치? "
진정으로 아까운지 그는 주먹쥔 손을 연신 휘두르며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진은 자꾸 수민에게 안겨 있었던 3초가
계속 머릿속에서 리플레이 되며 어찌 할 수 없는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쳤지....
그 공을 왜 몸으로 막아....
정말로 아파보이던데.....
한눈을 찡긋거리며 등을 만지작거리는
수민의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의혹이 다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혹시 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거기서 왜 끌어안아...?
그냥 막아도 되잖아.....
흐음....
그의 품에 안겼던 그때가 자꾸만 생각나서 더욱 수민이 의식되었다.
수진은 명록을 떠올리며 이 아이를 멀리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오는 그의 모습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 에이...... 양주 먹을 수 있었는데... 아쉽다."
수민이 옆에서 익살스럽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양주?
단지 양주 때문 그런 거야?
수진은 수민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게임인데 괜히 자신만 의식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명록 외에 누구에게도
그렇게 쉽게 안겨본 적이 없었던
그녀 자신 아니었던가.
슬쩍 훔쳐본 수민은 경기장으로 보면서 응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진을 안았다고 의기양양한 모습도 아니고 그녀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아예 아까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어떤 징후도 없이 체육대회 만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한 행동이었나 봐......
양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경기를 보는
그를 보면서 수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상대방은 전혀 생각도 안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다니....
도끼병이라고 걸린 거야....?
배수진....
정신 차려 이뇬아.
그녀는 애써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열렬히 응원하는 수민과 함께
나란히 앉아서 계속 되는 체육대회를 관전하기 시작했다.
아까의 경기로 버스에서처럼 그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영연의 시커먼 생각대로 되는 것이 좋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위해 그 센 공을 맞은 수민을 두고 다른 자리로 가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그대로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
아침을 먹고 난 뒤 아무도 없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명록은 티비를 보고 있었다.
휴일에도 볼게 없는 티비 프로그램은 평일에는 더 볼게 없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리모컨을 내려놓고 거실 커다란 창문 쪽 베란다로 나갔다.
평일의 아파트 단지는 조용하기만 했다.
가끔 밖에서 들리는 애들의 목소리.
문을 열고 팔뚝으로 몸을 지탱하면서
반쯤 밖으로 내놓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멀리 보이는 남산 타워의 모습.
문득 수진과 함께 올라갔던 남산의 그날이 생각났다.
길고 길었던...
그리고 빡세게 힘들었던 시간.
그래도....
지금 되돌아 생각해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때 걸어놓은....
자물쇠는 잘 있으려나.....
그와 그녀의 이니셜이 새겨진 황금빛 자물쇠.
유난히 반짝거리며 광택이 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하.....
그날 정말 힘들었지.......
마지막 먹은 크림 스파게티는.....
정말 죽음이었어.....
크흐...
그 몸으로 참 잘도 올라갔다 왔다 정말...
그 뒤 처음 119를 불러서 앰뷸런스 타고
병원에 가던 때가 떠올라 명록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살아생전 구급차를 타보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미련스럽게 그녀가 싸온 도시락을 다 먹던
자신의 모습이 참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편하게 배부르다고 말해도 좋을 텐데.....
아니 약간 상한 거 같다고 말해도 좋았을 것을.....
곰처럼 미련하게 꾸역꾸역 먹었던 그날의 기억들.
여자와의 데이트에 너무도 경직되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쑥스러움에 연신 입과 턱을 어루만졌다.
면도하지 않은 탓에 까끌거리는 수염의 느낌이 손가락과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날 또한 참 옛날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작년에 있었던 그녀와의 첫 데이트.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게 빛바랜 사진처럼 느껴졌다.
그로부터....
어느새 해가 바뀌고 새로 시작된 한해도 3분의 1이 지나간 지 한참 되었다.
곧 뜨거운 여름이 시작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순식간에 가을이 찾아올 것이었다.
그리고 겨울.
연말 이후 또 다시 다른 한해가 바로 이어오겠지.....
하아.....
명록은 몸을 숙여 팔뚝 위에 턱을 얹었다.
평화로운 오후.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진에게서는 엠티를 간다는 말 외엔 다른 연락은 전혀 없었다.
왠지 모를 서운함.
왠지 모를 배신감.
그리고.....
진한 외로움.
분명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허전함이 그를 한숨 쉬게 만들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대했던 휴가인데......
이렇게 집에 있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었던가.
차라리 수진과 여행을 꿈꾸며 회사에 출근해있었던 그 시간이 더 즐거웠던 거 같았다.
수진이 좋아할만한 여행지를 고르고
같이 할 여행을 꿈꾸며 혼자서 히쭉거리던 그 시간.
그녀가 웃고 좋아하는 모습만 상상해도 절로 신바람이 났었다.
그러나.....
인생은 예측불허의 변덕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그의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거기에 수진이 그렇게 한몫하고 있을 줄은......
휴우....
모두들.....
출근해서 일하고 있겠구나......
명록은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자신의 앞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희롱하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녁 때에 애들이나 만날까?
너무도 좋은 날씨.
이런 날 집에 처박혀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휴가!
직장인들의 금과 같은 휴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시간대 만날 수 있는 얼굴은 없었다.
일단....
저녁은 되야 누구라도 만날 수 있었다.
명록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발길을 향했다.
일찌감치 연락해서 친구들에게 술 약속이라도 잡아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후보들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
하아....
힘들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팔다리 근육들이 아파아파 속삭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운동이란 것을 해서 그런지 피곤함이 두 배인 거 같았다.
뛰고 달리고 응원하고.....
별거 아닌 거 같은 일인데 이렇게 몸이 무거워질 수 있다니.....
평소 몸매 관리하며 운동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일상의 고민이 다시 한 번 크게 마음에 와 닿고 있었다.
헬스라도 할까봐....
운동 부족이라니까......
에효...
체육대회가 끝난 뒤
잠시 휴식시간과 식사시간을 앞두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수진도 잠시 쉴 겸 방에 들어와 있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삼삼오오 어울리느라 밖에 나가 있었고,
나희와 수진은 여자들 중엔 그래도 학번이 높은 편이라
할일 없이 방으로 돌아와 앉아 있었다.
하지만....
방에 앉아 쉰다고 꼭 편한 것은 아니었다.
나희와 수진이 단둘이 있는 방.
서로 양쪽 벽에 기대 앉아 있었고
서로 어색한 분위기가 방 안에 흐르고 있었다.
수진은 나가고 싶어도 그녀가 나가 있으면
후배들이 편하게 생각하지 않을 게 뻔하니 그냥 방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동기 여자애들은 자신들 만의 공간을 찾아서
어디론가 나가 있었고 몇 안 되는 사학년들은 또 그들대로 따로 뭉쳐있었다.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쉬고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나희는 어느새 벽을 보고 돌아누워 있었다.
아....
설아라도 있었으면.....
엉뚱하고 가끔 사람을 황당하게 만들어도
심심하게 만들지 않는 그녀의 존재가 아쉽기만 했다.
그리고 설아 그녀가 있었다면 나희와 자신 사이에서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없는 그녀를 찾아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망할 기집애.....
엠티 온다고 하더니만....
대체 어디로 새어버린 거야?
사차원 설아에게 정말 장학금 따위는 깃털보다도 가벼운 족쇄였을 테지만
그래도 학과장 교수님이 직접 지시해서 참석 공지까지 올렸는데
대담하게 배를 쨀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집합장소에 안보일 때부터 버스 출발 전까지 전화를 계속 걸었지만 설아는 받지도 않았다.
전형적인 잠수.
아마도 분명 남자애하고 얽혀있는 이유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학과장님 공지까지 같이 읽고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못했었다.
또라이 설아.
이런 면에서 그녀의 배포와 배짱은 부럽기 짝이 없었다.
아마 수진도 설아 같았으면 명록과 행복한 여행을 보내고 있었을텐데....
이 불편한 시간도 마주치지 않고 말이다.
여전히 영연은 운영요원으로 바쁘게 학생회 임원들과 뛰어다니고 있었고
따로 어울릴 애도 없는 수진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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