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제2부. # 14화. 평행선 (6)
157.
긴 시간 달리고 달려서 마침내 엠티 장소에 버스가 도착했다.
생각보다 조금 치제된 시간 때문인지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풀고는
바로 다시 널따란 공터에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건 즉시 친목을 다지기 위한 체육대회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운영요원으로 뛰어다니며 독려하는 학생회 임원들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여러 종목으로 사람들이 나누어졌다.
상품으로 걸린 최고급 양주에 점점 경기는 열기를 더해가고
족구와 발야구, 농구를 거쳐 이제 남은 경기는 여학생과 남학생 모두 참가하는
커플피구로 넘어갔다.
종목의 특성상....
여자애들의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와 남학생들의 야유 섞인 함성소리가
금세 체육 대회가 진행 중인 벌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수진이 속한 조와 나희가 속한 조가 1등에 가까이 올라와 호각을 다투고 있었는데
두 조 중 커플 피구에서 더 많은 점수를 얻는 조가 최종 우승을 하게 되어 있었다.
조별로 커플 피구를 할 남녀가 짝을 지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운영요원들이 차례로 순번을 정하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 요령은 아주 간단했다.
서로 짝이 되어 남자는 여자를 대신해서 맞아주고
여자가 맞을 경우 둘 다 아웃을 당하는 룰이었는데
수진의 파트너는 전혀 일면식 없는 사람이었다.
" 엥? 수진이 파트너는 따로 있는데, 이리 와 봐요."
영연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수진의 파트너였던 사람을 끌고 뒤로 사라졌다.
갑자기 횡 하니 비어버린 옆자리.
수진은 멀뚱멀뚱 눈을 깜빡거리며
영연이 사라진 곳을 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영연이 짠하고 나타나더니
어느새 수민을 데려와서는 그녀의 옆에 세우고 있었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영연을 바라보는데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 자자~ 니네들은 일 학년 때부터 유명한 커플이었잖아. 보니까 오면서도 금세 다시 옛 명성을 찾아가던데, 이런 자리에서 빠지면 아쉽지. 안 그래? "
장난기 가득한 영연의 얼굴.
수진이 눈빛으로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를 하고 있었으나
영연은 가볍게 그런 수진의 항의는 무시해버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 야~ 수민이! 너 수진이 보호 해줘야 하는 거 잘 알고 있지? 쟤가 운동신경이 영~ 꽝이라, 이기려면 네가 고생 좀 할 거야? 호호호, 그럼 잘 해봐. 나중에 일등하면 상품은 반땅이다? 쿡쿡쿡......"
분명 엉덩이 사이에 화살표 같은 검은 꼬리를 숨기고 있을 거 같은
영연은 그렇게 사악한 미소를 남긴 채 떠나가 버렸다.
물론 가기 전 수민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격려를 잊지 않는 그녀였다.
가끔 영연이나 설아는 장난이 지나치는 면이 있었다.
남자친구가 뻔히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영연의 음모가 무엇인지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어쩐지 아까 버스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라니.....
그때 그녀의 빛나는 눈빛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다.
아휴....
여시 같은 뇬....
미쳐 정말...
이번에도 학생회 임원이라는 조건을
백분 발휘해서 수진의 조 편성에 장난을 친 게 분명했다.
어쩐지 숙소 배정할 때 수민이가 갑자기 보인다 싶더라니
영연은 수진과 수민을 어떻게라도 엮어서 엠티 내내 놀리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수진은 옆에 그녀와 똑같이 멀뚱거리는 수민을 보며 사과했다.
" 에휴... 미안해."
" 엉? 머가 미안한데? 훗. 네가 미안할 게 뭐있냐? 어차피 가만히 구경하는 것도 따분했는데 이렇게 참가하니까 좋은걸. 그리고 너랑 이렇게 짝이 되어 게임하는 건데 얼마나 영광이냐? 하하하. 잘 부탁한다. 후후. "
안 봐도 비디오처럼 훤히 보이는 시나리오에
수진이 한숨을 쉬며 괜히 끼게 된 수민에게 사과를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수민은 빨간 입술을 활짝 들어 올리며 웃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민도 괜찮은 애였다.
싹싹하고 스스럼없이 편하게 대해주고....
그리고 언제나 밝게 웃는 아이.
처음엔 수진은 그냥 나희와의 어색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불편해도 그런 수민의 친한 척을 받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수민과 같이 있으며 지켜본 그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사교성 있게 싹싹하게 구는 그런 타입의 아이였다.
아까의 서슴없는 스킨십도,
계속 말을 걸어오는 그의 수다도
남녀 사이의 작업 같은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는 일학년 군대 가기 전 그 짧은 시간동안
' 수수 커플' 로 불리던 이유 하나 만으로
수진을 아주 친한 친구처럼 편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왠지 사심 없는 마음으로 친절을 베풀고
이는 지도 모르는데 괜히 예민해진 자신이 그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나쁜 사람 된 것 같아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왠지 친절한 남자애들에 대한 그녀의 방어심리가 절로 작동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남자에 대한 경계경보.
사춘기가 시작된 이래 남자애들이 수진에게 접근해오는 일은 많았었다.
이유 없는 친절.
이유 없는 도움.
조금이라도 수진에게 가까이 하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절로 마음이 뒤로 물러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애들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얼굴만 보고 다가오는 듯한 그들의 관심은 수진의 입장에선 정말 노땡큐였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명록과의 만남도 이상한 일이었다.
지갑을 돌려주러온 그와의 점심 식사.
그때 명록이 준 명함이 찢어지기 좋은 종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갈기갈기 찢어진 그것은 길거리 놓여진 쓰레기통으로 사라지고
지금의 그들 관계는 아마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인연이라는 게.....
정말 있긴 있나 봐.......
수진은 왠지 모를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훈훈해지는 그와의 기억들.
엠티가 끝나면 한참 서운해하고 있을 그에게 가서
조금이라도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고 말도 하고....
화내고 먼저 돌아섰던 것도 사과하고....
정말....
엠티 오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꼭 안아주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애교를 피우리라....
여행 가려고 휴가까지 받은 그를 두고 온 엠티.
지금 좀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겠지만
언제나 마음 넓었던 명록을 생각하며 분명 미안하다고 말하며 매달리면
쉽게 굳어진 마음을 풀어주고 다시 따스하게 그녀를 안아주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문득 명록이 보고 싶어졌다.
오기전에 문자 말고 전화연락이라도 할 걸.....
-하는 후회를 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수진아. 우리야. 이리와. "
순간 그녀의 팔을 끄는 손길이 있었다.
놀라 바라보니 수민이었다.
어느새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그녀의 순번이 된 모양이었다.
얼떨떨한 모습으로 수민이 이끄는 대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이내 수진이 속한 조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순식간에 결정 났다.
언제나 싱글싱글거리는 모습의 수민이
날렵하게 공을 잡아서 바로 상대편 남자애 손을 노려 던졌다.
공은 남자애의 손을 맞추며 여자애까지 닿고 저편으로 굴러갔다.
" 아웃! 수수커플의 승! "
씨익 웃는 수민의 얼굴에 나 잘했지 하는 듯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의외로 활약을 해주는 그의 활약 덕분에
수진의 조는 힘들지 않게 계속해서 이기며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준결승전.
한번만 이기면 결승.
부전승으로 올라간 나희네 조와 싸우기 위해선 마지막 경기 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은 팀이었다.
척보기 에도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자애의 활약으로 척척 상대편을 꺾으며 올라온 팀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순간 수진의 몸 쪽으로 피구공이 와락 날아왔다.
놀라 몸을 움츠리는데 수민이 그녀를 감싸며 옆으로 피해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치 쌩 소리가 나는 거 같은 모습에 수진은 등이 써늘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갑자기 스포츠가 아닌 서바이벌 게임으로 장르가 바뀐 느낌이었다.
목숨 하나 걸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
등 뒤로 남자애들의 야유소리가 울려 퍼졌다.
" 에이! 너무하다! 여자애한테 그런 공을 던지다니~~ 살살해라!!! "
그러나 상대편 남자는 턱에 힘을 주며
거만하게 집게 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흔들었다.
서로의 진영으로 공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수진과 상대편 여자애는 까악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도망쳤다.
공이 휙휙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올 때마다
흙먼지가 날리며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수진에게도 몇 번 공이 날아왔지만
수민은 그 세게 날아오는 공을 여유롭게 막으며 그녀를 보호했다.
수진은 수민의 뒤에서 허리를 잡고 쫓아다니고 있었는데
계속 그녀를 노리는 공격으로 이미 지쳐가고 있었다.
수민을 쫓아 뛰어다니던 수진의 숨이 점점 차올랐다.
발이 무겁고 헉헉 거리는 숨은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차는 느낌이었다.
순간 공이 높게 떠올라 수진의 뒤로 패스되었다.
벽이 되어 서있던 같은 조 사람들에게 날아가는 공이었다.
수진은 빠르게 수민의 등 뒤로 이동했지만,
그런 그녀를 약 올리려는 듯이 공은 또 다시 그녀의 등 뒤로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수진은 딱 그녀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근육남의 얼굴이 잔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위험신호!
데인저...
덴져....
바로 이어질 공격이 자신을 노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인정사정없는 근육남의 공을 생각해보면 몸이 쭈빗 얼어붙는 것 같이 무서웠다.
하지만.....
계속 왔다갔다 도망치던 수진은 힘이 빠져서 바로 다시 수민의 뒤로 돌 수 없었다.
다리가 풀리고 힘들어서 미처 도망치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등을 내어준 채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수진을 향해 과녁이라도 되는 것처럼 곧장 날아오는 공!!!
아악!
맞겠다!!!!!!!
곧 있을 타격에 몸이 움찔 굳어버리고 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들리는 퍽 소리.
하지만 따갑게 울릴 진통과 울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수진은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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