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6화 〉제2부. 14화. 평행선 (5) (156/195)



〈 156화 〉제2부. # 14화. 평행선 (5)

156.



예쁘다 라.....


여자에게 하는 가장 상투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말이기도 했다.
능글맞은 수민의 모습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수진도 여자인지라, 예쁘다는 칭찬이 싫진 않았다.

그렇게 수민은 자연스럽게 수진과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자리 뒤에 걸쳐서 수다스럽게 말을 건네는 그가 대화를 이어가면서
점점 예전 일학년 시절  아이로 보이면서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묻지도 않는 군대 얘기하며 일학년 애들 사이에서 있는
소소한 얘기까지 꺼내는 그가 마치 동성의 여자애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그의 수다에 언제 그랬냐는 듯 수진도 미소 지으며 이야기를 받아주고 있었다.

아까 지루했던 출발에 비하면 정말 천국과 지옥의 차이였다.
또다시 나희 옆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느니
이렇게 수민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게 백배 즐거웠다.
나희는 그런 그들 사이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잠든  눈을 감고 있었다.

수민과 가벼운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는데,
문득 앞에서 인원체크를 하고 있던 영연과 눈이 마주쳤다.

기분 탓일까?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영연의 눈이 반짝이며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진은 그녀의 시선 속에서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볼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




휴가의 첫날이 밝았다.
오늘부터 그가 쉬는 것을 아는
부모님은 어느새 다 나가시고 텅 빈 집에 혼자 있었다.

어제 혼자서 괜히 달려버린 술자리 탓에 속은 과히 좋지 않았다.
회식 때도 이미 미친 듯이 달렸는데도 술이 술을 부른다고....
바로 그 뒤  집에 와서도 술을 마시고  탓에 몸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어머니가 매콤시원한 동태찌개를 끓어놓았다는 것이었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부엌을 뒤적이던 명록은
반찬거리를 꺼내서 식탁을 채우고 식사준비를 했다.


숙취로 시달리는 아침일수록 든든하게 배를 채워야 빨리 깬다는....
경험 속에서 깨달은 그였기에 억지로라도 몇 술 밥을  생각이었다.

보글보글 찌개를 데우고 밥 반 공기를 퍼서 식탁에 앉았다.
시원한 국물 한 모금을 떠서 후루룩 마시고 나니 조금 속이 풀리면서 나아진 듯 싶었다.


막 한 수저 밥을 떠서 먹는데
문득 추리닝 주머니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감에 손을 내려갔다.
뭐지 하는 마음에 쓰다듬던 그것이
어제 자기  넣어버린 자신의 휴대폰임을 깨달았다.

휴대폰....


명록은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던 폰을 꺼내서 만지작거렸다.
수신되어있는 문자 메시지들 몇 통.
분명  안에 수진에게 온 메시지도 있을 게 뻔했다.


어젯밤 비슷한 생각 속에서 결국 넣어버리고 자버린 것이 생각났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열고는
결국 보지 않았던 문자들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역시나....


[ 오빠  엠티 출발해.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이따 연락할게. ]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간밤에 연락하지 않은 것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적혀있지 않았다.
술 마시고 왠지 모를 심술에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았었다.
집에 와서도 혼자 맥주 캔을 비우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물론 그때도 술기운에 정신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수진에 대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냥 전화하기가 싫었다.
전화해봐야 좋은 말은 안했을테니
어쩜 안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수진의 모습도 왠지 서운하기도 했다.
왠지 그냥 조용히 지나가려는 듯한 그녀의 마음이 엿보이는 기분이었다.


장학금.


그게 뭐라고 이렇게 수진이 매달리는 것인지 명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성적에 대한 것도 머리는 이해하고 있지만
역시 중간고사 기간 동안 자신을 배제해버린
그녀의 모습이 다시 겹쳐지면서 한숨이 나왔다.


취직....


어차피 자기한테 시집오면....
그렇게 목을 매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물론 결혼이라는 것이 그렇게 가벼운 것도 아니고
지금 가시권에  것도 아니긴 했지만....
서운한 마음도 있기는 했다.


그리고 그 마음 뒷편에는
명록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자격지심도 있었다.


내가 수진이 하나 건사 못하고
가정을 이룰 만한 상대로 보이지 않는 건가 하는...
한번 좋지 않은 상상을 키우다보니 무럭무럭 성장해서
근미래를 떠나 머나먼 미래까지 날아가서는
자신에 대해 그리고 수진에 대해 안좋은 부분만 키워갔다.


다시 현재로 생각을 끌고 와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생활권이 아니라는 것이 이런 차이를 만들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가끔 남녀에 대해 풀이하는 티비 프로그램에서
생활권이 다른 것이 하나의 갈등요소라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도 별 감흥을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대학생과 직장인.
여덟 살의 나이차.

한숨을 쉬던 명록은 수진에게 답문을 보내려다가 그냥 폰을 내려놓았다.
잘 갔다 오라고 보낼까도 생각했지만 왠지 그러기 싫었다.


형식적인 내용의 문자.
그런 건 직업상 만나는 거래처 사람들에게나 하는 일이었다.
마음이 담기지 않는 그런 행동을 수진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나 진심을 담아서 대하고 싶은 그녀였다.


폰을 식탁에 내려놓고 밥을 내려다보니
왠지 식탁에 홀로 앉아있는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하아.....
뭘 하고 보내지?


이제 막 시작된 휴가인데 막막함이 밀려왔다.

조용한 집 안.
햇살이 내리 쬐는 거실이 이상하게 낯설게 보였다.




**************



이른 아침부터 고속도로를 열심히 달렸던
긴 버스 행렬이 잠시 점심식사를 위해 휴게소에 멈춰 섰다.
학생들은 좁은 자리에 굳어진 다리를 풀  서자마자 바로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주차장 저 앞  구석에서는 벌써 점심식사를 나눠주고 있었다.
학생회에서 준비한 식사였다.

모두들 임원들이 나눠주는 도시락을 받고는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수진도 나희와 함께 도시락을 받아들고 자리를 잡았지만
서로 단둘이 불편한 침묵을 지키며 차갑게 굳어진 밥을
젓가락으로 지분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서로 어색함을 나누면서도 이렇게 같이 앉아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방법도 없었다.

순간 남자애 목소리가 얼음 같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 수진아 이리 와서 같이 먹자~ 이렇게 단둘이 먹으니까 맛이 없잖아. 하하."




좌불안석 불편한 자리에 있던 수진의 뒤에서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난 수민이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의 친절을 받아드릴 수 없어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수진이 답했다.

" 아냐, 괜찮아. 수민이 너도 점심 맛있게 먹어. 우린 여기가 편한 걸."


고맙긴 하지만, 버스에서의 능구렁이 같았던
그의 모습이 부담스러워서 여전히 나희의 옆에 앉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한창 저기압인 나희가 같이 가려  것 같지도 않았고,
또 그런 나희만 버려두고 수진 혼자서만  수도 없었다.
부담스러운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한편으론 나희를 원망하면서도 그녀를 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에이, 그런 게 어딨냐? 밥은 여럿이 먹어야 맛있는 법이야. 자자~ 어서 일어나."

" 어... 어어어?!"




순간 수민이 덥석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관계와 관계의 사이.
과거 두 사람은 애들의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마음 편하게 스킨십을 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갑작스런 수민의 손길이 수진의 기분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내 수진뿐 아니라 나희도 역시 팔을 잡아 일으키는
수민의 모습을 보고 수진은 불편한 마음을 억눌렀다.


모든 사람에게 편할 수 있는 마음의 거리란 다를  있었다.
이런 손길이 수진은 불편했지만
수민은 그저 단순히 아무런 의도 없는 행동일수도 있었다.
이런 것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다만 수민이는 그냥 사교성이 좋은 아이일 뿐이라고 이해하며 모른  하기로 했다.

나희도 그리 쉽게 스킨십을  수 있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팔을 잡는 수민은 둔감하다고 해야할지
아님 넉살이 좋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뭏튼 덥석 잡고 끌어대는 그의 대범함에 약간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 의외는 그런 수민에 대한 나희의 태도였다.


생각 외로 나희 또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수진처럼 수민에 대해 이해하기로 한 건지,
아니면 그녀 역시 지금의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민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도시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보던 수민이 와하하 웃으며 말했다.




" 어...어라? 누군가 했더니.... 나희였구나? 하하하.... 아까 자는 거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웠다. 안녕?  수민이야. 서수민. 반갑다. "

헐....
이런....
너 누군지도 확인 안하고 막 잡아 끈 거야?
에그....
못 말려...
정말....
후후...



수진이 그런 수민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픽 웃는데 나희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그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 아... 그래. 오...오랜만이다. "

햐아~~ 수진이도 그렇지만 나희 너도 여전히 그대로구나?  학과 여자애들은 하나 같이 점점 이뻐지냐? 그러고 보니 일학년 때도 같이 다니고 그러더니 여전히 지금도 같이 다니는구나? "


" 머.. 그렇지. 훗. "



나희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피었다.
수진과 같이 있을 땐 보기 힘든 그녀의 미소.


하아.....

수진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그렇게 수진과 나희는 그의 손길대로
애들이 가득 앉아있는 식탁으로 옮겨 앉게 되었다.


" 이야~ 수민이 저 자식이 능력도 좋다... 우리 학과 최고의 퀸카들을 둘이나 데려오다니!!! 야야 어서 이리로 앉아. 야~ 자리 좀 만들어봐."


요란한 환영의 말들이 쏟아졌다.
수민을 쫓아가자 그와 함께 앉아있던
남자애 무리들이 환호와 함께 그녀들을 반기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땐 그런 그들이 어색하기만 했는데
자리에 앉아 차분히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들 수진이 아는 얼굴이었다.

다들 하나 같이 군대를 갔다 온 후 갓 복학한 동기애들.
군대 입영했던 세월이 그들의 얼굴에 남자다움과 좀 더 묵직해진 목소리를 가져다 주었지만
 속에서 옛 기억의 자취들이 하나둘 찾아지면서 반가움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수민처럼 길게 다녀온 애들은 없었지만
일 년이상 군대로 학교에서 보지 못한 애들이었다.

웃으며 도시락을 비우는 사이
나희도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들이 반가운지 웃으며
수진 앞에서 가리비처럼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평소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으로 돌아온 듯한 나희의 모습.
하지만 그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는 수진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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