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제2부. # 14화. 평행선 (4)
155.
" 남친이 있는 애들이 그런 곳에서 잘 꼬셔지는 법이거든. 특히 사귀는 기간이 길수록 슬슬 권태기도 오고 새로운 남자에 대해 눈길도 가고 그러는 건데 엠티는 잘로 알아서 짝도 만들어주지 같이 이래저래 생활도 하지 얼마나 좋냐. 거기에 알아서 술자리도 만들어주니 머 일사천리지. 아..... 대학교 때라.... 좋을 때다.... 좋을 때야..... "
그러고 보니 명록의 대학시절에도 엠티 이후 사귄다는 얘기가 퍼지는 커플들이 꽤 있었다.
한참 또 승필 같은 바람둥이 과 동기가 후배 여자애를 꼬셔서 데리고 다니는 일도 생각났다.
새로운 상상의 날개라 활짝 퍼지며 마구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승필 선배가 기름을 더 붓고 있었다.
그리고 취기 가득한 머리는 상상의 날개에 허리케인급 바람을 불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 그러고 보니..... 수진씨 완전 미인이잖아? 아마..... 근처에 껄떡거리는 남자애들 꽤 있을 걸? 엠티라고 방심하다가 너 갑자기 뒤통수 맞을지도 몰라 짜샤. 훗. "
물론 지금 승필의 얘기는 그냥 명록을 약 올리기 위한 농담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에 근거해서 나오는 얘기라 명록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가뜩이나 술기운으로 둔해진 머리에 수진의 아리따운 모습이 겹쳐지고
학교에 찾아갔을 때 보았던 준수한 남자애들의 모습들이 마구 휙휙 돌아가고 있었다.
같은 나이 대.....
같은 시간대를 보내는 이라면 서로 이해하기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와는 달리 풋풋하고 매력 넘치는 젊음을 가진 이들도 많을 것이다.
또한....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을테니....
이렇게 서로 생각이 달라서 싸우는 일도 없을지 모른다.
명록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쌓였다.
그래서.....
남이라고 했을까?
수진도 지금 자신과 싸우고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건가?
아님....
훨씬 전부터?
그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어서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서자 천장이 핑 도는 거 같았다.
벽을 짚어서 중심을 잡고는 다시 휘적휘적 구두를 꾸겨 신고는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승필 선배가 괜찮겠냐며 같이 가줄까....
-라고 하는 말이 그의 등을 향해 쏟아졌지만 휘휘 손을 휘저으며 그냥 혼자서 나와 버렸다.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그의 달궈진 얼굴을 식혀주고 있었다.
시원한 느낌.
뜨거웠던 머리에 몽글몽글 맺힌 땀이 차갑게 느껴지며
술기운에 마비된 두뇌가 좀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명록은 품에서 전화를 꺼내들었다.
익숙한 메뉴 터치.
그리고 보이는 전화번호부 목록.
꾹 연결을 눌렀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연결되는 동안 나오는 가요의 멜로디가 오늘따라 지루하고 귀찮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길게만 느껴졌던 그 시간이 멈추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여보세요? "
수진의 목소리.
명록은 아무 말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오빠? "
다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명록은 숨을 고르며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하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그런 찜찜한 엠티 같은 건 가지 말고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자고 말을 하고 싶었다.
" 회식이라더니.... 끝났어? "
조심스런 그녀의 말.
아직 앙금이 서로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놓고 계속 다툼을 이어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앞에 놓여진 듯 아슬아슬함이 있었다.
" 수진아...... "
마침내 가라앉은 명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응? "
" 너.... 엠티 가지 말고 나랑 여행가지 않을래? "
침묵.
그나마 들리던 수진의 소리가 딱 끊기듯 조용해졌다.
들리는 것은 명록의 숨소리 뿐.
그리고 긴 침묵의 끝에는 수화기 저 너머 작은 한숨소리가 있었다.
" 미안해..... 오빠... 나 이런 걸로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
" 그래. 알았다. 더 말하지 않을게. "
" 오빠..... "
" 나 아직 회식 중이야. 들어가 볼게. "
" 오빠. "
" 미안.... 과장님 나오셔서.... 이따 다시 전화할게. "
명록은 전화를 끊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순간 욱씬 거리며 심장에서 깊고 싸한 아픔이 느껴졌다.
**************
수진은 결국 엠티에 참가했다.
다시 전화한다고 하던 그는 결국 연락오지 않았고
그녀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봐 연락하지 않았다.
통화해봐야 어차피 엠티를 가지 말라는
명록의 말만 다시 되새겨질 뿐이었으니 감정만 상할 뿐이었다.
명록의 감정도 상하지 않고
자신도 그의 말에 마음이 다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출발하는 당이 다만 엠티 갔다 온다고 문자메시지 하나 보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명록과 실랑이를 하고서
기어코 참가한 엠티였지만 버스에 타기도 전에 수진은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설아는 다른 곳으로 새어 버렸는지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이 되어도 오질 않았다.
한참 기다리느라 허덕거리며 약속장소로 달려간 뒤에는
믿었던 영연은 학생회라며 따로 학생회 임원들과 일을 하느라 모습도 볼 수 없게 바빴다.
결국 선택의 여지없이 나희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나희도 지금 수진과의 자리가 그리 편하지는 않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따로 앉아 가는 것도 어색했는지 우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45인승 관광버스.
좁고 불편한 좌석보다 2박 3일간 견뎌야 하는
나희와의 어색함이 지금은 예고편처럼 느껴져서 더욱 불편했다.
명록과의 다툼도 여전히 마음의 멍에가 되어 답답해 죽겠는데
한참 삐져있는 나희와 함께 엠티 내내 보내야하다니.....
차라리 딴 자리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나희가 그러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이건 절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희에겐 절교 선언으로 받아드려질지도 몰랐다.
애써 꾸욱 참고 모른 척 앉아서 가는데
나희도 수진과 단 둘만 있는 게 불편한지
하얗게 굳은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진과 나희가 앉아있는 자리를 빼곤 모두 시끌벅적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만이 있는 이 자리는 섬이었다.
두 사람만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어 침묵에 가라앉아 있었다.
타인들의 소란스러움이 대비되며 자신이 앉은 자리의 침묵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 불편한 관계는 언제쯤 끝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을 이기지 못한 수진은 결국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어? 수진아?"
눈을 감고 있던 수진이 갑작스러운 호명에 눈을 떴다.
앞자리에서 한창 시끄럽게 떠들던
남자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는 중이었다.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
그림처럼 양쪽으로 찢어져 활짝 웃는 붉은 입술이 인상적인 남자애.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깔끔한 옷차림과 머리스타일이 호감 가는 타입.
이정도면 기억에 남을 만도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애가 누군지 도통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 으....안녕하세요?"
대학교에서 남자들은 군대를 갔다 와서 대부분 수진보다 나이가 많았다.
비록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우선 혹시 놀라서 존댓말로 인사를 건넸다.
수진은 이번에도 그가 선배려니 생각하고 가볍게 인사를 했는데,
상대방이 당혹스러워 하는 걸 보자마자 선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남자애는 약간 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너... 나 기억 못하는 구나? 야아..... 서운한데? 나 수민이야. 서수민. 수수! 우리 수수라고 불렸잖아. "
수수?
수수???
아!!!
일학년 때 학번이 비슷해서 출석을 부를 때면 배수진 다음 순서는 서수민이었다.
비슷한 이름, 출석번호가 비슷한 것까지 해서
수수커플이라고 주변에서 와하하 웃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사귀라며 놀림도 많이 받았었는데
막상 일 학기가 끝나니, 여름방학 사이 휭 하니 사라져 버린 아이였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보이지 않던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이 많았었다.
항간엔 자퇴를 하고 반수를 하고 있다는 둥 유학하러 미국에 갔다는 둥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는데, 막상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되니
묵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며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데 왠지 조금 남자스럽게 변한 그의 얼굴에 반짝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 아....아?! 수민이구나!!! 한창 안보이더니.....? 설마 너.... 군대 갔다온 거야?"
" 그래, 나 이제 아저씨다? 하하하. 그런데 넌 하나도 안변했네. 여전히 예쁘다, 야~ 우리 동기 중 가장 한 미모 하더니 여전한데? "
쌩긋 웃으며 느끼한 말을 잘도 내뱉는 그의 모습에 수진은 어색함이 느껴졌다.
서수민.
앳된 용모로 마치 여자애 같은 남자아이였다.
약간 호리호리한 몸도 그랬지만
특히나 여자 못지않게 붉은 입술이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근데 아저씨라니.....
하긴 남자는 군대 갔다 오면 다 아저씨라고 하는 말이 생각났다.
일학년 때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군대를 다녀오면 변하는 게 남자애들이라곤 했지만
수민도 많이 변한 거 같았다.
수진의 기억 속에는 약간 수줍음 많고 낯도 가리던 것 같은데
지금 앞에 있는 그는 활달하게 웃으면서 친화력 갑인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군대라는 과정을 거치고 나왔다는 것이
왠지 조금은 선입관을 만들어 주는 거 같았다.
물론 능글맞은 그의 미소는 여전했지만
입술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술술 아부를 쏟아내는 것이
전혀 다른 아이 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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