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제2부. # 14화. 평행선 (3)
152.
딱 한글자.
남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가슴에 대못이 되어 박힐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느 영화에서 보았던 대사가 떠올랐다.
님 옆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되더라고......
설마 수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에 명록은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수진이 남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쓰는 돈은 어차피 자신에게 쓰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등록금이라는 것이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돈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까짓꺼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어떤 방법을 쓰든....
대출 같은 것이라도 해야 된다
그것도 당연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수진이 자존심을 상해할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힘들면 당연히 도와주는 것이 애인 사이 아닌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녀가 남이라고 지칭한 그 말에도 예리한 칼날에 베인 것처럼 아려왔다.
"남" 이라니.....
"남" 이라니.....!
대체 수진이는 나와 자기를 어떤 사이로 생각하는 걸까?
명록의 머리에선 그녀가 던진 말 한마디가 계속 맴돌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우로 회식하고 있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애꿎은 소주만을 들이키는 중이었다.
" 야~! 곧 휴가도 가는 자식이 얼굴이 왜 죽상이야? "
툭 옆구리를 찔러오는 느낌과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명록이 고개를 돌리니
능글거리며 웃고 있는 승필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 혼자만 마시지 말고 나도 좀 따라봐라. "
빈 잔을 내미는 그의 손가락에
투명한 소주잔이 덩그러니 보이고 있었다.
촉촉이 젖어있는 빈 잔.
한참 부장님 자리에서 달리다 온 모양이었다.
명록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잔에 소주를 부었다.
" 자자~ 너도 한잔 받고. "
이번엔 승필이 소주병을 잡았다.
명록이 잔을 들자 넘치도록 가득 부었다.
평상시라면 약간 비도록 부어 줄 텐데 취한 것인지
찰랑찰랑 금방이라도 넘칠 듯 채워주고 있었다.
하....
이사람 취했구만?
평소 주량이 세기로 이름난 그였지만 아무래도 너무 달린 모양이었다.
여자와 사귀려면 술도 잘 마셔야한다고 호언장담하던 승필이었는데
이런 회식 자리에서도 취할 만큼 약해지다니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솟아났다.
명록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승필을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 야~ 휴가주다. 휴가 잘 갔다 오라고 꽉꽉 눌러 담았으니까 원샷해라. 후후. "
발음 또렷하고 승필의 눈동자가 또렷한 것을 보니 취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냥 단순히 심통이었나 보다.
휴가 간다고 벌주인 양 가득 부은 게 확실했다.
어차피 출장 가서 반은 농땡이 칠 그의 행적이 뻔히 보이는데
은근히 질투하는 듯한 승필의 모습이 참 얄밉게 보였다.
더군다나.....
수진과의 여행 계획도 파토나 버리지 않았던가.
젠장 할....
빌어먹을 휴가.....
이제 와서 휴가 철회는 말도 안되었다.
내일모레 휴가인데 안 가겠다고 하면 당장 박 과장부터 난리 칠게 뻔했다.
휴가 신청 때도 거의 어거지를 부리며 간신히 밀어 넣었는데
그렇게 어렵게 허락된 휴가를 반납하겠다고 하면
당장 그의 얼굴이 확 구겨져 명록을 노려볼 게 뻔한 일이었다.
할일도 없이 보내야할 휴가라니.....
아흐.....
절로 한숨이 났다.
명록은 승필이 부어준 소주를 그의 말대로 원샷해버렸다.
이젠 소주가 쓴지 단지도 알 수 없었다.
" 푸하. 짜식..... 무슨 술을 웬수 대하듯 마셔버리냐..... 원수를 사랑하라 몰라? 원샷하라고 그걸 그냥 다 마시냐? 하하. "
그렇게 말하는 승필도 천천히 잔을 들어 쭈욱 들이켰다.
물론 명록처럼 확 들이 붓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도 어느새 잔을 싹 비우고 있었다.
다만 천천히 마시는 속도의 차가 있을 뿐이었다.
" 명록이 뭔 일 있냐? 왜 아까부터 계속 혼자 분위기 잡고 그러냐? "
불판 위에 올려진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그가 물었다.
아까부터 이리저리 자리를 돌아다니며
우중충한 표정으로 있는 명록이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하긴 평소 명록이었다면 회식 분위기를 띄우는데
일조하고 있었을 텐데 혼자 묵묵히 술이나 비우고 있으니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긴 했을 것이었다.
" 어디 여행가는 거 같던데..... 어디 갈꺼냐? 수진씨도 같이 가는 거겠지? "
승필은 하필이면 가장 명록이 아플만한 곳을 콕 하고 찔러왔다.
분명 전생부터 깊은 인연으로 묶여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어쩜 이렇게 정확히 핀포인트 폭격으로 아픈 데만 찔러 오는지.....
상처에 제대로 소금을 뿌리고 박박 비비는 통에 쓰라림으로 욱씬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 아.... 그게...... "
명록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여자 친구가 엠티 가서 혼자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휴가 보내게 생겼다고 이실직고하기엔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 흐흐. 짜식 제주도도 갔다 오고 이번엔 어디 동남아라도 갔다 오냐? 너 너무 여자 친구한테 돈 쓰면 나중에 감당이 안 된다. 적당히 해야지 그러다간 나중에 왠만한 것으로도 여자가 감동받지 못한다고. 미래를 생각하고 행동해라 이 말이다. 이 풋내기 연애 박사야. 흐흐흐.... "
으....
명록은 혼자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억지로 삼키느라 진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하윤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정미 씨와 어디 좋은데 놀러갔다 온 모양이었는데
저런 충고라니 왠지 입이 간질간질 거려서 죽을 지경이었다.
" 여친 이랑 여행도 갈 녀석이 그게 머냐? 얼굴 좀 펴라. 회식자리에서 먹구름 쫙 끼게 그러니까 내가 박 과장한테 구박당하잖아. 자자~~ 이 잔 받고 분위기 좀 띄워봐라. "
툭툭 어깨를 치며 말을 잇는 승필의 말에 명록은 한잔 더 소주를 들이켰다.
카아 소리가 절로 났다.
왠지 술을 마신 뒤 해줘야 할 거 같은 맛에 하던 것이 이젠 습관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술기운이 확 올라오는 거 같았다.
하긴 지금까지 마신 소주병이 몇 병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울컥 치밀어오를 때마다 마신 술이 이제야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 여행 안 갑니다. "
" 뭐? "
갑자기 내뱉듯 말한 명록의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빨라서 그런지 듣지 못한 승필이 되물었다.
그에 명록은 답답함을 느꼈는지 목소리가 조금 더 커져서 다시 말했다.
" 여행 안 간다고요. "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빈 자신의 술잔에 소주를 자작하고는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안마시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런 명록의 모습에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승필이 입을 열었다.
" 아니, 여행지 고르느라 여기저기 싸이트 돌아다니더니 이게 무슨 소리야? 여행을 왜 안 가는데? 너.... 수진씨하고 싸웠냐? "
싸웠냐고?
하...
싸우긴 했지.
아....
대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 일인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풀어야하나....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멀 잘못했지?
난 같이 여행가고 싶은 마음 밖에 없는데....
내가 왜.....
볼이 살짝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명록은 머리가 핑 도는 거 같았다.
얼마나 이번 여행을 기다렸는데.....
수진도 같이 가자며 그리 좋아하더니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나.....
나하고 약속이 그렇게 우습나?
그냥 툭하고 깨버려도 좋을 정도로?????
명록은 서운한 마음에 소주병을 찾았으나 이미 다 비어진 병 밖에 안보였다.
승필도 그의 상태가 급 취한 상태로 가는 듯 해서 더 이상 술을 권하고 있지 않았다.
서운함.
왠지 모를 자존심이 다쳐버린 가운데....
아지랭이처럼 계속 머릿속에서 아른 거리는 수진의 말.
아무리 생각해도 명록의 마음엔 한 글자가 상처가 되서 찌릿찌릿 저리고 있었다.
<< 남 >>
이젠 아예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듯한 느낌이 그의 상처를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무엇을 해도,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았던 수진이
자신을 그렇게 밖에 생각안한다는 것에 완전 마음이 싸늘해졌다.
까짓 돈이 먼데.....
성적도 결국 장학금 때문이라면 그 정도야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결국 남이라서 그런 것이 부담스럽다는 건가?
그럼 대체 우리는 무슨 관계인데?
답답했다.
미칠 듯....
답답해서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 승필 선배. "
" 왜? "
승필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명록은 약간 꼬이는 혀로 그에게 말했다.
" 선배는 여자 친구가 엠티를 가겠다고 선배와의 약속을 깨버리고 가면 어떻게 할래요? "
순간 푸하 하는 소리와 함께 승필이 웃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명록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키득거렸다.
" 야아~~ 수진씨가 엠티 간다고 너 바람 맞혔구나? 하하하.... 짜식 그 때문에 풀이 팍 죽어서 이러는 거구만.... 미치겠네. 하하하.... "
" 아이씨! 웃지 말고 대답이나 해봐요. "
" 푸하.... 야야... 가겠다면 가게 놔둬야지 그럼 어떻하냐? 대신 나도 재미난 시간 보내면 되지. 너무 여자 친구한테 목매고 있지 마라. 녀석아. 수진씨도 결국 자기 생활이 있고 너도 네 생활이 있는데 어떻게 일일이 다 맞추면서 사귀냐? "
하....
절로 콧방귀가 나왔다.
이런 모범답안 같은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에이...
역시 괜히 물었어.....
하긴 승필 선배야 여친이 없으면 딴 여자 만났을 거 아냐!
저 바람둥이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명록은 괜히 말했다는 생각에 후회막급이었다.
승필은 계속 키득거리며 그의 어깨를 두들기고 있었다.
" 근데.... 엠티 때문에 너하고 여행을 깼냐? 푸하.... 엠티 때문에 여행 약속을 깨다니 좀 심한데? "
" 에이... 수진이는 꼭 가야하는 거라서 어쩔 수 없다구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깐요. "
비록 자신이 서운하다고 해도 누가 수진이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게 싫어서 자기도 모르게 변명하고 있는 명록이었다.
" 아쭈? 지금까지 그런 수진씨 때문에 꽁해 있던 녀석이 자기 여친 편든다고 바로 눈 동그랗게 뜨네? 푸하하..... "
" 누...누가 꽁해 있었는데요! 에이..... 그런 거 아니라고요! "
명록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볼이 살짝 홍조를 띄고 있었는데
승필의 말에 더욱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승필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낄낄 웃으며 말을 잇고 있었다.
" 엠티라.... 수진씨 대학생이지 참.... 하하.... 엠티... 좋은 때다. 이게 또 허락 받은 이성만남의 장이잖냐. 하하하..... 내가 또 대학교 때 한 활약한 게 엠티였지, 아마? 후후훗. "
이성만남의 장?
한 활약했다고.....?!
승필의 말이 갑자기 명록의 귀를 한방 때리고 갔다.
같이 여행을 가지 못하는 것만 생각했지.....
그런 것에 대해선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평행선 (3)>> 끝 => << 평행선 (4)>> 으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