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제2부. # 14화. 평행선 (2)
153.
명록이 퇴근 후 만난 두 사람은
저녁 겸 술자리로 삼겹살집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회식이 잡혀 있었는데 엠티 관련해서 수진에게
빨리 말하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딱 취소가 되어 만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만날까.... 하는 그의 연락.
수진은 망설이다가 결국 이렇게 저녁시간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잘된 일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여행 취소를 알려야 되는 상황이라 빨리 만나야겠다....
생각을 했지만 그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어찌 됐든......
이렇게 예정에도 없는 만남을 가져서 그런지
명록의 얼굴은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수진의 속은 더욱 바짝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기대에 차서 좋아하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어야 하는
미래가 그녀의 가슴에 밤송이를 넣은듯 따갑고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와 함께
삼겹살의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치킨엔 맥주, 파전에 막걸리가 있다면, 삼겹살엔 소주가 있었다.
지글 거리며 불판에서 노릇하게 구어 지는 삼겹살의 향기에 차가운 소주만큼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속이 타는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살짝 살얼음이 얼어있는 찬 소주병이 놓여졌다.
그 덕분에 수진은 이제 꺼내려는 말을 쉽게 내뱉지 못하고
자꾸만 앞에 놓인 소주잔만 비우고 있었다.
" 왜 이렇게 많이 마셔? 시험 끝났다고 그러는구나? "
명록은 웃으며 쌈을 작게 싸서 그녀의 입에 넣어줬다.
수진은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갑자기 시험기간 중 그가 찾아왔던 밤이 생각났다.
그때 쌈이 아니라 초밥이었다.
그리고 가졌던 뜨거웠던 기억.
어떻게 보면 잠시 미쳤었던 순간이었지만
그 시간 덕분에 시험을 무사히 마쳤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막에 내리는 비처럼 달콤하기만 했던 마음으로
이번 여행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는데 같이 웃고 신나서 얘기하던
요 입으로 뒤집어야하는 지금 이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 어때? 맛있지? 우리 제주도 갔을 때도 내가 싸주는 쌈이 맛있다고 했었잖아. 이번에 여행 갈 때도 싸 줄테니깐 기대하라고."
넉살스럽게 웃는 명록의 얼굴을 보며 수진은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 미뤄봐야 그의 실망만 커질게 뻔했다.
일이 더 진척되기 전에, 그의 기대가 더 커지기전에 말을 해야 했다.
수진은 다시 채워진 소주를 원샷하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소주의 쓴 맛이 반쯤 얼린 가운데도 강하게 느껴졌다.
" 오빠... 미안해.... 나 여행 못가."
" 응?"
명록이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무슨 소리야 하는 눈빛을 보내며 수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깜빡이는 그의 눈동자를 계속 불 수 없어서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 나..... 학교 엠티에 가야 하는데, 하필 날짜가 오빠 휴가랑 겹쳤어..."
그제야 어떤 의미인지 깨달은 명록이
웃음이 서서히 걷히며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수진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눈썹이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들리는 그의 목소리.
" 엠티..... 꼭 가야 되는 거야? 안가도 되잖아 그런 거....."
그런 거.....!!!
순간 수진의 마음이 쿵 소리를 냈다.
하긴 공지를 보기 전까지는 엠티라는 것이 그녀에게도 꼭 가야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아마 그 공지를 보지 않았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어버렸다.
" 나도 가기 싫은데, 교수님이 엠티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장학금 안주신다고 하잖아... 어쩌겠어... 가야지... 오빠..... 정말 미안해... 그치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우리.... 여행은 다음에 꼭 가자. 응?"
" 헐.... 강제 참석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들어본 적도 없다. 뭐. 흠..... 가지마. 그런 건 그냥 협박이지 진짜 그럴 순 없을 거야. "
그의 말은 단호하기까지 했다.
명록이 실망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딱 잘라서 반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수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직이 한숨을 쉬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 오빠가 우리 교수님을 잘 몰라서 그래. 그 교수님은 한다면 진짜 하는 걸. 나도 엠티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야..... 응? 오빠가 좀 이해해 주면 안 돼? "
그녀의 말에 명록도 속이 탔는지 앞에 놓인 소주잔을 바로 비웠다.
빈 소주잔이 탁자에 내려지며 내는 탁 소리가 날카롭게 수진의 마음을 울렸다.
" 수진아... 난 이번 여행 가려고 휴가까지 냈는 걸. 한참 사람들 출장으로 자리도 비우기 힘든데 간신히 허락도 받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못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해...?"
결국 수진이 가장 염려하던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직장 생활을 해보지 못한 그녀지만
회사라는 곳이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라는 건
평소 명록의 모습을 보면서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도 그녀가 원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래야 하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싫게만 느껴졌다.
" 오빠..... 나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미안해 정말... 하지만 이건 엠티라고.... 나도 가기 싫어. 나도 오빠하고 같이 여행을 가고 싶은 걸....여행을 못 가게 되서 나도 실망했단 말이야. 나도 엠티 가기 싫어. 그치만..... 장학금을 받으려면 꼭 가야 한단 말이야. 중간고사때 우리 만나지도 않고 참았던 게 다 허사가 되도 좋아? "
속상한 마음이 말에 섞여서 흘러나온
그녀의 말에 명록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변했다.
그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지는 듯 하더니 낮게 울렸다.
" 장학금? 장학금 때문에 그래? 그러면 내가 도와줄게. 다음 학기 등록금 내가 보태줄께. 그거 얼마나 된다고... "
약간 화가 난 듯한 명록의 말.
그러나 그 말이 이번에는 수진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 뭐?!"
미안함은 미안함이지만....
명록의 말을 들은 수진은 어이가 없어 명록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명록은 수진의 기색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쏟아냈다.
" 성적이야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런 것 때문에 너 힘든 거 같으며 내가 도와줄게. 장학금을 학교에서 받나 내가 주나 똑같은 거잖아? "
다시 들리는 명록의 말에 수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태까지 그가 했었던 이야기 중에 이번만큼 그녀를 화나게 한 말은 없었다.
숨이 저절로 거칠어졌다.
" 오빠가 도와줘? 왜? "
" 너 맨날 장학금에 목매잖아. 성적이야 잘 받을 테고 장학금 타는 것이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해결해 줄께. 그렇게 힘들게 매달려가며 탈 필요는 없어. "
장학금에 목을 맨다고?
명록이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니.....
실망감과 함께 화가 불꽃처럼 확 솟구치고 있었다.
캡슐이 깨지고 흘러나온 약이 감정의 끈을 끊은 것처럼 화르르 불타올랐다.
"아니 오빠가 왜 내주냐고. 내가 오빠한테 왜 등록금을 받아야하는데?!"
수진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 우리가 남이야? 내가 주면 어때서?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건데?"
명록도 갑작스럽게 커진 그녀의 목소리만큼 같이 커지고 있었다.
"그렇잖아. 등록금이 한두 푼이야? 그게 얼마 안 돼? 그리고 그게 뭐야! 동정도 아니고, 남한테 내가 왜 돈을 받아야 하는데?"
"남?! 너랑 내가 남이야!"
명록이 이번엔 수진의 말에 발끈하고 있었다.
순간 남이라고 말을 하면서 수진도 아차 했지만 이미 내친 걸음이었다.
장학금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버린 명록에 대해
화가 나버린 지금 자신의 실수 따위는 금세 지워져버렸다.
등록금 때문에 걱정하던 부모님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나서 더욱 그랬다.
몇 백만 원이나 되는 그녀의 등록금 때문에 얼마나 깊은 한숨을 쉬던 엄마.
그리고 아빠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리는 거 같은데
그게 얼마나 되냐고 쉽게 말하다니......
수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명록을 쏘아보았다.
그 또한 씩씩대는 숨소리를 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발원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커진 불은 두 사람의 이성마저 태워버리는 중이었다.
" 그럼 오빤 내가 기쁘게 받을 줄 알았어? 오빠가 내 등록금 내준다고 하며 얼씨구나 하고 받을 줄 알았냐고! "
수진은 화가 나서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났다.
테이블 위, 잔에 담긴 소주잔이 그녀가 일어나며 치는 바람에 쓰러져 타원을 그리고 굴러갔다.
명록의 잔에 채워진 소주가 파문을 그리며 흔들리고 넘쳐 그의 바지로 튀고 있었다.
더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 됐어. 이런 얘기..... 그만해 우리. 나 먼저 집에 갈께."
수진은 빠르게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누가 봐도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일어나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날카로운 구두 굽으로 찌르며 걸어 나갔다.
그 뒤로 명록도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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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 사원들이 모두 모인 회식자리가 결국 열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부장님도 참석하는 자리인지라
어떻게는 경직된 자리였지만 나름 화기애애하게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 상무님도 참석한다는 소리가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바쁘신 일정으로 오지 않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록은 웃고 즐기는 사원들 모습에 낄 수 없었다.
수진과 엠티 관련해서 싸우고 냉전이 계속 이어지는 중이었다.
여행은 여행대로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수진과 다툼 이후로 계속 되는 신경전 속에서 답답함이 계속 쌓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계속 명록의 마음에 남아 맴돌고 있는 그녀의 말.
남.
남한테서 내가 왜 돈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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