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제2부. # 14화. 평행선 (1)
152.
" 야.... 우린 출장 가는데 넌 휴가 가냐? 사무실은 누가 지키냐? "
툭 치고 지나가며 던지는 승필 선배의 말이 명록의 가슴을 쿡 찌르고 있었다.
휴가 신청이 통과될까 말까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출근하자마자 잘 갔다 오라는 말과 함께 휴무표가
공지로 내려온 것을 보고 기뻐하던 참이었다.
그전엔 건성으로 어딜 갈까 생각하면서 보던 인터넷도
이젠 휴무일도 확정되었으니 본격적으로 검색하던 참이었다.
그런 명록의 등 뒤로 무슨 닌자처럼 다가와서
그를 깜짝 놀라게 한 승필 선배는 킥킥 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가고 있었다.
으휴....
암튼....
저 인간은 남 잘되는 걸 못 본다니까....
한참 자기가 연애할 땐 관심도 없더니만
슬슬 또 명록 근처를 맴도는 것을 보니 예전 버릇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물론 정미 씨한테 티 나게 대하지는 않겠지만
아직 그의 피는 예전 전설로 불리던 때와 다를 게 없어보였다.
그녀가 상처를 입지 않게 마무리 지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순간 그의 머리에 하윤이 스쳐지나갔다.
승필의 일이 그녀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도 설마 하며 머리를 휘저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갑작스런 방해에 잠시 숨겨두었던 홈페이지를 열고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예쁜 인테리어의 팬션들이
각자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홈페이지마다 뽐내는 중이었다.
어디가 좋을려나....
바다로 갈까?
아님 산?
예전처럼 제주도?
처음 수진과 갔었던 제주도의 여행이 생각났다.
짧았지만 정말 좋았던 그때의 기억.
아....
젠장.....
순간 명록의 얼굴에 쓴웃음이 스쳐지나갔다.
수진과의 첫 섹스를 앞두고 겪었던
실패의 기억이 그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참나....
아....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푸하하...
미치겠다...
흐...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여자의 입구를 못 찾아서 넣지 못하다니....
참나 얼마나 바보스러운 일인가.
그때 욕했던 에로영화 감독들.....
자신이 퍼부었던 욕만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들은 천년만년 살 거 같았다.
진시황도 괜히 불로초 이런 거 찾지 말고
그냥 에로영화나 만들었음 소원성취 했을 텐데....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제주도의 팬션들을 훑어보았다.
여전히 괜찮은 팬션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때 썼던 비용을 생각하니
조용히 마우스 왼쪽 버튼을 클릭해서 창을 닫았다.
적금도 깨서 갔었던 여행.
즐거웠던 시간도 따지고 보면 돈으로 깔아놓은 시간과 길이었다.
지금은 그런 비용을 만들어 내기 부담스러웠다.
에휴....
연말정산 나오고 보너스가
상반기 한번 거하게 나온다던데
그거 나오면 생각해보자....
역시 자금 사정상 다시 가까운 근처 여행지로 목표를 돌렸다.
만만한 건 역시 강원도.
바다나 산이든 둘 다 가까운 곳이라 가장 만만했다.
레프팅이나 번지점프 같은 것을 해볼까?
수진이는 이런 것도 좋아할까?
왠지 색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단순히 풍경만 즐기는 여행보다는 색다른 재미를 또 찾아가는 여행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웹페이지를 클릭해 가는데 순간 머리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리며
둔탁한 아픔이 느껴졌다.
이건 주로 박 과장이 서류철을 내리치며 그에게 종종 하는 행동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아니 아까 자신의 자리로 갔던 승필 선배가 씨익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심하는 동시에 한편으로 에이씨 하는 말을 삼키며
입술을 삐죽거리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야.... 아무리 일이 없다지만 그렇게 대놓고 보면 어떻하냐. 흐흐..... 나정도 되면 그래도 되지만 그러다 너 한번 눈물 쏙 빼는 수가 있다? 후후후 "
윽.....
정곡을 찔린 통에 화를 낼 찬스를 놓쳐버렸다.
하긴 이제 막 신입사원들 들어와있는 상황에서 보면 아직도 아래에 있는 명록이었다.
물론 이제 막 대리진급을 앞두고 있지만 승필에 비하면 완전 풋내기와 다를 바 없었다.
" 놀러갈 생각은 티나지 않게 하고 이따 너 회식 있는 건 알지? 이번엔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마지막까지 자리 안 지키면 너 박과장한테 완전 찍혀서 휴가까지 지옥이 뭔지 알게 될거다. 요새 너 뺀질이라고 투덜거리는 거 같으니까 알아서 해라. 흐흐. "
승필은 서류철을 들고 부장실로 향해 걸어갔다.
대충 이차정도 따라가는 척하다가 수진이를 만나러 바로 튈 생각이었는데
이미 명록의 속셈이 간파된 모양이었다.
거기에 박 과장이 노리고 있다니....
쩝....
몸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박 과장이 자리에 있는 동안 웹써핑은 금지하기로 마음먹었다.
팬션과 여행지 정보가 가득 담겨있던 홈페이지는 모두 모니터에서 사라졌다.
체...
밤에 보지 뭐.....
명록은 아쉬움에 혀를 찼지만
역시 수진과 여행을 오랜만에 갈 생각에
신바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간단히 바람 쐬러 가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여행.
색다른 추억을 잔뜩 만들어서 서울로 돌아오리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
창문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살이 수진의 살갗을 간질이고,
은은한 등나무의 향기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수업을 듣고 있던 그녀는 열심히 움직이던 팬을 잠시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 밖으로 선명한 보랏빛 꽃잎들이 풍경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5월이니깐...
꽃도 한참 예쁠 텐데...
수목원 같은 곳을 가볼까?
교수님은 강단 앞에서 수업을 계속 하고 있었지만
수진의 머릿속은 명록과 이야기 했었던 여행에 대한 생각에 마음이 둥둥 떠 있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 자 그럼 과제는 다음 주 이 시간까지 제출하도록."
수업을 마치는 교수님의 목소리에 비눗방울이 터지듯 수진의 생각이 멈췄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나 둘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학생들 사이에 끼기 위해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과제?
무슨 과제?
딴생각을 하느라 듣지도 못한 사이 교수님이 과제를 내신 모양이었다.
" 설아야 과제 뭐였어?"
옆에서 짐을 챙기는 영연이야
수업을 안 들었을 게 분명하니 그녀에게 묻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수업은 잘 챙겨듣는 설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 응? 수업 안 들었어? 웬일이람..... 후후.... 배수진이 수업 중 딴생각을 다하고? 크크...."
" 에이... 그러지 말고 빨리 말해봐... 먼데? "
수진은 놀리는 설아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재촉하듯 물었다.
그녀 특유의 깜빡이는 눈짓에 설아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 미치겠다.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주제 중 골라서 레포트 작성하래. 됐지? 후후."
수진은 설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짐을 챙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오른편으로 돌린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희를 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나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며 일어서고 있었다.
하아....
언제쯤 나희와의 사이가 풀어질까?
수진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시험이 끝나면 해결 될 줄 알았지만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아직까지 나희의 화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수진에게만 유독 싸늘하게 구는 나희의 얼굴에서 화해의 접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나희가 아니라 멀리 있는 설아에게 자연히 말을 걸었다.
약간 무거워진 마음으로 강의실에서 나오는데, 학과 사무실에서 나오는 조교언니와 마주쳤다.
" 언니, 안녕하세요."
하나 같이 인사를 하자 조교가 웃으며 그녀들을 반겼다.
" 어~ 수업 끝나고 가는 거야?"
" 네. 이제 끝났어요."
" 그래, 좋을 때지. 날도 좋은데, 학교에 있지 말고 데이트도 하고 그러라고. 한살이라도 어릴 때 놀아야 한다니깐? 호호호"
왠지 평상시보다 밝은 웃음을 흘리던 조교가
학과 게시판에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붙이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지 바라보던 수진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
<< 학과 활동에 참가하지 않는 학생들은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없음. 학과장>>
헐...
머야....????
절로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문구에 입이 벌어졌다.
순간 내용을 확인하려는데 수진 말고도 이미 몰려든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 언니 이게 뭐에요?"
옆에서 조교의 모습을 바라보던 수진 외에도
벌써 학과 친구들이 조교에게 이구동성 묻고 있었다.
" 아? 너희들 아직 안 갔어? 저번 연합엠티 때 참가학생이 너무 적었었데. 학과장님도 참석한 자리였는데... 화가 난 교수님이 이제부터 학과행사 참석 안하는 학생은 장학금에서 빼라고 하셨어."
" 엑!!! 그런 게 어딧어요?"
조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비난의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의 분노도 당연했다.
성적에 따라 준다고 익히 알고 있는 장학금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귀찮은 행사에 학생들을 참가시키려는 행위에 불평불만을 안할수 없었다.
" 교수님 맘이지, 내 맘이니...? 엠티부터 총회까지 학년 과대들에게 사진까지 찍어서 출석부 작성해 오라고 하시질 않겠니? 요즘 시대가 어느 땐대 강제 참석인지... 덕분에 나만 일이 늘어나버렸다. 에휴..... 이게 뭔지..."
조교의 말에 나희가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 언니, 그럼 이번에 가는 엠티도 포함 되는 거예요?"
" 아...그러네? 그게 처음이겠네..."
" 윽... 싫다. 무슨 엠티에서 까지 출석이래? 그런 거 하면 학생회만 귀찮아진다구..."
과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영연은 귀찮은 일이 늘었다며 불평을 토로했다.
하기사 학생회 입장에선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행사마다 과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출석을 확인하려면 시간낭비에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오기도 싫은데 억지로 끌려온 애들을 통제하며 진행하려면 배가 힘들게 뻔했다.
수진은 좀 심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학과장의 공지를 바라보다가
게시판에 붙여져 있는 연합 엠티 공지를 발견했다.
1학년 때 이후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엠티.
이번 날짜를 보며 가만 생각해보니 명록의 휴가와 겹쳐있었다.
같이 여행가기로 했던 그의 휴가일정.
순간 그녀의 얼굴에 낭패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
어떡하지?
어제도 같이 휴가 때 여행 얘기로 밤새 통화했는데....
휴가까지 신청했다고 했다.
그간 대화하면서 웃던 명록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못가겠다고 말하면 그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단할 것 같았다.
휴우....
이걸 어떡하지?
갑자기 이러면....
하아...
어떻게 말해....
장학금이 걸린 일이었다.
여행은 그녀도 가고 싶었지만 이번학기 성적에 관련된 일이었다.
엠티 참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명록을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아무래도 빨리 말하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그래야 그의 실망이 작을 거 같은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실망하는 명록의 눈에 훤하게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만 상상해도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제14화, 평행선 (1)>> 끝 => << 평행선 (2)>> 로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