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15)
144.
수진과 같이 하는 동안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시간들.
하긴 학생인 그녀가 이런 식당을 알게 되고 그를 데리고 와서 산다는 것이
힘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기에 지금 하윤의 모습이
더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밥까지 다 먹고 나니 이미 배는 빵빵하게 불러 있었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처럼
입과 함께 눈도 맛을 느끼는지 평소보다 배부름이 두 배로 느껴졌다.
더 드릴까요 묻는 서빙 직원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 흔들자 웃으며 다음 디저트를 가지고 나왔다.
콩가루가 묻혀진 인절미 같은 떡과 하얀 서리가 서려 있는
선홍빛 젤리 같은 게 큰 스푼에 놓여있었다.
이미 배가 불러서 떡은 별로 먹고 싶어 않아
젓가락을 놓고 있었는데 하윤이 한번 먹어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그녀의 권유를 거절하기는 뭐 해서 하나들어 입 안에 넣었는데
콩고물의 고소한 가루가 흩어지자마자 눈 녹아버리듯
싹 사라지는 시원한 맛이 입 속에 번졌다.
마치 존재감이라곤 하나 없는 듯
순식간에 시원함을 남긴 채 사라진 떡이
너무 신기해 눈을 껌뻑거리자 하윤이 킥킥 웃었다.
하나 더 드셔보세요 라고 말하며 권하는
그녀의 말에 젓가락으로 하나 더 집어 먹었다.
마찬가지로 콩가루가 입에서 번지고 그 안에 든 하얀 설기 같은 부분은 금세 녹아 사라졌다.
" 후후.... 공기떡이래요. 어때요? 맛있어요? "
푸하....
공기떡이라....
정말 일순간 공기가 되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정말 잘 지은 이름이었다.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함박눈처럼
입속에서 확 녹아 사라지며 퍼지는 맛이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마무리 콩고물....
두개를 먹어도 그 신기함과 맛은 또 먹고 싶어졌다.
그래도 원래 하나 나오는 떡을 서비스로 또 받아먹은 주제에 더 달라고할 염치는 없었다.
그리고 옆에 함께 나왔던 스푼에 담겨 있는 것도 남아 있었다.
호기심에 먹어보니 살짝 얼린 홍시였다.
오미자차가 곁들여진 홍시를 후룩 먹으니 그 또한 신선한 맛이었다.
마침내 자기 잔에 나오는 산수유차를 마지막으로 코스가 끝났다.
찬찬히 차를 마시는 동안 하윤이 말했다.
" 후후.... 맛있게 드셨나 모르겠어요? "
명록은 약간 호들갑스럽게 답했다.
" 아... 정말 맛있었어요. 어느 거 하나, 맛없는 게 없네요. 이런 음식은 첨 먹어봐요. "
그의 말에 만족했는지 하윤은 함박웃음을 지며 말을 이었다.
" 하하.... 입에 맞아서 다행이에요. 여자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이라 안 맞을까봐 조금 걱정했거든요. 후후..... 사실 저도 처음 방송에서 보고 왔어요. "
" 방송이요??? "
" 네. 분자요리 전문점이라고 소개하더라고요. 원래 방송에서 나오는 맛집 같은 건 별로 신뢰하고 그러지 않았는데 그 뒤 알아보니까 평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와봤죠. 후후.... "
순간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분자요리요???? 복분자가 들어가는 요리인가 봐요? 근데... 어디 복분자가 쓰였지? "
순간 그의 말에 하윤이 호호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명록이 멀뚱멀뚱 쳐다보자 입을 가리며 하윤이 설명했다.
" 하하.... 분자 요리는 복분자를 쓰는 요리는 아니고..... 새로운 요리기법이래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음식을 분자 단위까지 철저히 분석해서 새로운 스타일의 요리를 만드는 것을 얘기하는 거래요. 근데 한식을 이렇게 먹어보니 맛있더라고요. 한번 누군가 같이 와서 먹어보고 싶었는데 그게 명록 씨가 처음이 되었네요. 후후후..... "
" 아하..... "
분자 요리에 대해 처음 들었던 명록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대목은 처음 데리고 왔다는 하윤의 말이었다.
처음이라....
왠지 그 말에 가슴이 설레였다.
음식을 먹으면서 수진과 함께 다시 와야겠다 생각하던 그였다.
맛있는 음식과 정갈한 분위기.
깨끗하고 요리 하나하나가 신기해서
데리고 오면 좋아할 수진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하윤의 말에 약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이라는 그녀의 말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거 같았다.
산수유차도 다 마시고 레스토랑을 나오니
너무 느긋하게 즐겼는지 오후 두시가 갓 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휴일이 한참 지나가는 오후였다.
햇살도 좋고 날씨도 쾌청한 바깥 정경에 왠지 헤어지기가 뻘줌하게 느껴졌다.
이미 공식적인 일정은 다 끝났지만
이대로 그냥 헤어져서 집으로 가기 아쉬워 망설이는 명록이었다.
순간 하윤이 입을 열었다.
" 명록씨.....? 여기 가까운 곳에 생태공원이 있는데 같이 갈래요? 운동도 할 겸..... 산책 어때요? "
왠지 조심스러움이 묻어있는 그녀의 말이었다.
집에 가봐야.....
할 일도 없는데 머.....
명록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수진은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만나 같이 들어갔다.
나희는 이미 밤을 샌 상태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두른다고 해서 일찍 도서관에 갔지만,
역시 사람들이 많아서 결국 한명씩 떨어져 앉게 되었다.
원래 한번 자리를 잡으며 계속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시험기간이 되면서 무조건 12시가 되면 빈자리 짐들은 한곳에 모아서
처분한다고 공고까지 붙어있었다.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수진도
토요일 밤에 집에서 하루 자고 나온 것이
결국 새로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저런 극약 처분이 나온 것도
시험 기간 동안 자리 점유하며 비켜주지 않는 얌체족들 때문에 나온 조치였다.
덕분에 매번 도서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해졌지만
나름 하루에 몇 번 오지도 않는 애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은 없어져서 학생들도 전반적으로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어찌됐든 그 덕분에 수진과 세 친구들은 서로 각자의 자리를 잡아 흩어져버렸다.
서로 앉은 자리가 멀어서
이제는 하루에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어졌다.
왠지 떨어져 앉아서 공부하자니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게 되어서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수진에게는 차라리
나희가 시야에서 안 보이는 지금이 집중하기엔 더 좋을지도 몰랐다.
거기에다가 운도 좋게 수진은 나름
<<로얄석>> 이라는 창가 쪽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운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오후가 되면서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듯한 햇볕이 간질거리며 그녀의 공부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따스하게 등을 덥히는 가운데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하아....
얼마 만에 느끼는 나른한 햇살일까?
수진은 어느새 햇볕을 즐기며 생각에 잠겼다.
오랫동안 시험에 시달리느라 봄을 잊고 있었다.
비록 여름으로 지나가는 길목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봄이었다.
창밖에 보이는 초록의 캠퍼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이 왠지 수진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차가 없는 한산한 캠퍼스 덕에 귀에는 사각 거리는 펜 소리만 들리고
작은 웅성거림 가운데 한들한들 흔들리는 나뭇잎이
날씨 좋은 일요일 오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모두 경쟁심에 불타고 있는 도서관을 제외한
창밖의 캠퍼스는 이질적으로 휴일의 평화로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이었다.
휴일...
주말.....
일요일....
명록과 만나지 않고 보내는 휴일이 얼마 만일까.
언제나 그와 함께 보내던 주말 시간들.
당연한 것처럼 만나고 같이 보내왔던 시간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도서관에서 처박혀서 책이나 파고 있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화창한 날씨만큼 처량하게 느껴졌다.
하아.....
오빤 지금 뭐하고 있을까?
공부에 방해될까봐 문자도 조심스레 보내던 명록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도 그의 문자는 아침에 한번 오고는
점심때 식사하라고 보낸 문자 외엔 따로 연락이 없었다.
한참 집중하며 공부할 때 울려대는 진동이나 벨소리처럼
맥을 끊는 것이 없기는 했지만 지금 창을 보고 있자니
그런 그의 배려가 조금 아쉽기도 했다.
지금쯤 오빠도 이렇게 좋은 날씨를
바라보며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전에 만나자는 말을 거절한 자신을
조금 원망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왠지 그녀의 마음에 후회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 명록이 일하느라 만나지 못하는 시간.....
수진이 홀로 보냈던 지겨웠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친구들마저 다들 그녀를 버리고 즐겁게 놀러가 버리고
부모님도 여행가서 혼자 집을 지키며 얼마나 심심했던가....
그녀처럼 명록도 비슷한 주말을 보내고 있을 거란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미안한 마음.....
그에게 일방적인 양보를 받아낸 거 같아 미안했다.
문뜩 벚꽃 축제이후 명록과 함께 놀러갔던 바닷가가 생각났다.
그땐 이른 봄이라 그런지 아직 싸늘한 바람이 해변에 불고 있었다.
추워하는 그녀를 위해 겉옷을 벗어주던
그의 모습이 그려지며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아마 지금은 초여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따듯하니,
다시 간다면 아마 더 즐겁게 바다를 즐길 수 있을 거 같았다.
바람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
바로 코앞에서 날고 있는 갈매기들......
통통통 소리를 내며 바다를 가르고 지나가는 작은 어선......
그리고 발이 쑥쑥 들어가는 모래사장의 느낌들.
푸르른 하늘을 보고 있자니 바닷가의 풍경이 잡힐 듯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수진은 절로 길게 한숨이 내쥐어졌다.
아아....
이런 날 오빠랑 같이 바다 보러 가면 딱 좋겠다...
수진이 어느새 전공 책에서는 시선이 멀어져
감상에 빠져버린 시간, 누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게 느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따로 공부하고 있던 설아였다.
설아는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말없이 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진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공부 중에 몰래 놀다 걸린 아이처럼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는 그녀를 올라다보았다.
" 얘! 명록오빠 생각 그만하고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영연이도 좀이 쑤신지 엉덩이가 들썩거리더라.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설아의 말에 영연의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하긴 점심 먹고 지금까지 쉬지 않았으니
그녀 성격 상 좀이 쑤셔서 죽을 지경이 되었을 게 뻔했다.
킥킥 웃는데 생각해보니 설아의 이야기 속엔 나희가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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