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3화 〉제2부. 13화. 바람이 분다. (14) (143/195)



〈 143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14)

143.



상영이 끝난 영화관에 불이 들어오고
하윤과 명록은 천천히 일어나 통로로 나오기 시작했다.


나름 영화는 괜찮았다.

적당한 웃음.
깔끔한 스토리.
그리고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이 올라가면서 느끼지는....
잔잔한 감동.


나름 영화의 여운을 즐기며 사람들 사이로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극장 안 로비엔 어느새 가득 찬 사람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하윤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저 잠시 좀.... 갔다 올게요. "



" 아....네. "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는 하윤을 보면서
한적한 포스터 앞 공간에 기대서 명록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수신된 문자나 부재중 전화는 있지 않았다.
어젯밤 마지막으로 수진에게 온 문자 메시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어제 피곤했던 그의 일상을 듣고는
늦잠을 잘 수 있게 배려한 수진의 마음인  싶었다.




오늘도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갔으려나....?



월요일 보는 시험이 어렵다고 말하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잠깐이라도 보자고 어렵게 꺼냈던
명록의 말도 결국 망설임 끝에 거절했던 수진의 대답.
시험이라는 것이 쉬운 것이 있겠냐 만은
그녀가 자신 없어하는 목소리엔 그만큼 무거운 부담이 지워져 있는 듯 싶었다.

시험에 완벽한 준비라는 것이 있을 리는 없었다.
몇번을 보고 전부 외웠다고 해도
잠시 책에서 손이 떨어지면
걱정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것이 시험공부 아니던가.

특히...
자신의 경험으로도 여자는 더욱 그런 스트레스에 약했다.


대학 시절...
그 털털하던 연주도 중간, 기말고사때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는 굶주린 사바나 암사자 같았으니까.
시시껄렁한 농담에도 깔깔깔 웃어주던 그녀조차
 시험기간에는 살벌한 아우라가 뿜어져서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전학기 올A를 노리는 수진이야 아마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명록은  널널한 대학생이었다.

A학점이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마음 먹고 룰루랄라 학교를 다녔으니....
지금 수진의 모습을 보면 자꾸만 보자고 하는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너무 수진과 오래 함께 했었는지....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미칠 듯 심심했다.
예전엔 어떻게 혼자서 잘도 버텼는지 용할 지경이었다.


하아....
모르겠다 나도.



한숨을 쉬고는 다시 호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왠지 세수라도 하고 싶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며 얼굴에 물을 적셨다.
비치되어있는 화장지로 물기를 닦으며 거울을 보았다.

약간 피곤해 보이는 듯한 자신의 시선을 보며
휴지통에 젖은 화장지를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오자
하윤이 어느새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보고는 씽긋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 배고프죠?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여기서 좀 떨어져 있긴 한데 괜찮죠? "


그러고 보니 아침 일찍 나온 터라 살짝 허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는 같이 걷는 하윤의 손길을 따라 전철역 쪽으로 걸음을 걷고 있었다.


팔뚝에 느껴지는 그녀의 감촉.
가볍게 낀 하윤의 손가락의 느낌이 명록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녀의 긴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 바람 사이로 좋은 향기가 명록 쪽으로 흘러들어왔다.


수진과는 다른 향수를 쓰는 걸까?
아님 그녀만의 향기?


알 수 없는 좋은 느낌의 향기에 취한 그는 하윤과 걸음을 맞춰서 걸었다.
식사비는 자신이 낸다는 것만을 기억하며
어떤 곳으로 안내할지 하윤이 그를 데려갈지 궁금했다.
엄청 비싼 곳으로 갈리는 없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수진의 경우를 볼 때 허름한 한식당 같은 곳은 분명 아니라고 생각했다.



좀 떨어진 곳에 있다라....


옆얼굴로 보이는 그녀의 입가의 미소가 왠지 모를 기대감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언제나 수진에게 맛집을 안내하던 그였는데
누군가 자신을 새로운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아마.....
수진도 이런 기분이었을지 모르겠네......
흠....




잠시 그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맛집으로 데려가는 동안
기대에 찬 시선으로 명록을 바라보던 수진의 얼굴.

하아.....
역시 쩜....




명록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떠오른 생각을 떨쳐 내려는 듯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혹시나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까
옆으로 살짝 내려다보니 하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듯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앞에 전철 개찰구가 보이고
둘은 서로 갈라져서 나눠졌다.
줄줄이 안으로 들어서고 먼저 통과한 명록 옆으로 서둘러 하윤이 붙었다.

다시 팔짱을 끼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전철을 타기 위해 사람들 뒤를 쫓아 걸으며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퓨전 한식 레스토랑.

민트 색을 테마로 한 신선한 느낌의 인테리어가
싱그러운 숲에 들어와 앉아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해줘서 그런지 몰라도
상당히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분위기였다.

한식이라는 것 자체가 뚝딱 해치우는 집밥의 이미지가 있기는 했지만
코스 요리식으로 즐기는 한정식집을 생각해보면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 맞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한식 레스토랑도 코스 요리로 천천히 맛을 즐기면서
시간을 들여 먹도록 컨셉을 잡았기에 내부 인테리어 또한 고즈넉한
숲 속의 풍경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거기에다가 손님들도 꽤 많은 게,
제법 입소문이 타고 있는 것 같은 집이었는데
가격대도 나름 생각보다 그리 비싸지 않았다.

그래서 하윤의 안내대로 명록도 부담 없이 정식 코스를 주문했다.

보통 한식이란 한 상 가득 차려 나오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결국 차가운 음식을 먹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퓨전 한식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양식처럼 한식을 하나의 코스 요리로 내어 오는데,
하나하나 식탁 위로 올라오는 그릇마저 신경을  듯
한국음식 특유의 색채를 살리는 우윳빛 도기 접시 위에
전채요리가 앙증맞게 올라가 있었다.

딱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너무 보기 좋으면 맛이 생각보다 그리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처음 음식을 본 명록은 약간은 거부감이 들었다.
그림처럼 너무도 예쁘장한 음식이 오히려 맛에 대한 우려를 불러왔다.
그러나 애써 이곳을 골라온 하윤을 생각해서 예의상 한 젓가락을 입에 넣었다.

순간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그의 선입견은 바로 깨어졌다.
생각보다 아삭거리는 채소와 새우의 맛이
입안에서 어울리며 절로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명록이 날름  접시로 나온 전채를 다 먹는 것을 보자
그제야 하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하윤도 어느새 자신의 앞에 있는 접시를 비우고는 웃으며 명록에게 말했다.


" 이제 메인 요리가 나올 거예요. 천천히 드세요."

너무 급하게 먹었던 걸까,
하윤의 말에 명록이 머쓱하게 웃었다.


상에 올라오는 음식들은 다들 익숙한 재료지만,
처음 먹어본 요리라 그런지 맛을  때 마다 감탄하며 말없이 자꾸 요리만 먹게 됐다.
말상대가 없이 심심했을 하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식탐이 큰 사람처럼 보였을까봐 부끄러웠지만,
하윤은 그런 명록의 태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흐음...
만약 수진이었으면
지금 살짝 삐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명록은 저도 모르게 하윤의 모습에서 수진을 겹쳐서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윤의 말이 무섭게 여러 장식으로 잘 구워진 녹두전과 연근 튀김이 나왔는데
장식으로 올려져 있다 생각한 것들과 함께 잘라 먹으니
퍼석할 거라 예상과는 달리 입안에서 묵직한 맛과 함께 녹아들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연근튀김은 아래 놓여진 달콤하고 시원한 소스 맛에 한입에 사라졌다.

호오....
한식도 이런 식으로 만들 수 있구나.....
멋지네....

한식의 세계화라는 문구를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서양요리와 합쳐져서 맛을 낸다는 게 신기했다.

하윤은 어떻게 이런 곳을 알았을까?
혹시 남자친구?




나름 수진과 함께 맛집을 많이 다녔다고
생각했던 명록이지만, 이런 식당은 처음이었다.

명록은 조용히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하윤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트색의 벽지와 수수한 듯 보이는 그녀가 한편의 그림처럼 꽤 잘 어울렸다.
음식을 입에 넣는 하윤의 모습을 감상하던 명록과 하윤의 시선이 마주쳤다.



" 흠..."

명록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하윤의 입술이 살짝 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 목이 막히시나 봐요. 물 좀 드릴까요? "



" 아뇨... 괜찮습니다.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



장난스럽게 놀리는 하윤의 목소리에
명록이 음식에 대한 감탄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가 감탄하는 사이 계속 접시가 날라지고 있었다.


처음엔 감질나게 조금씩 나오는 음식을 보고
명록은 다 먹어도 배고프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음식이 나올 때마다 서서히 차오르는 포만감에 결코 적은 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세 입에 바로 먹을 수 있는 양으로 나오는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제대로 하나하나 나왔으면
절반도 못먹고 벌써 배가 빵빵해져서
바로 코스이탈하고도 남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맛을 음미하고 있는
명록의 표정이 우스웠는지 하윤은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며 과거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거 같아서 명록은 기분이 묘했다.


하윤이 그를 식당으로 인도 할 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수진을 데리고 그가 찾아낸 맛집에서
그녀가 먹으며 감탄하고 신기해하는 것을 보며
또 하나의 즐거워했던 자신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하....
누군가가 즐겁게 나를 본다는 것도 재미있구나....
누군가의 안내를 받는다는 거.
그리고 자신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본다는 것.

언제나 남자가 모든 것을 알아서 준비하고
여자를 위해 해줘야 된다는 생각을 해왔던 명록에겐 신기한 체험이었다.
당연히 남자가 다해야한다 생각한 것을
반대로 하윤이 하고 자신은 즐기기만 한다는 것이
마치 역할 바꾸기 체험처럼 재미난 시간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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