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0화 〉제2부. 13화. 바람이 분다. (11) (140/195)



〈 140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11)

140.



" 아직도 쓰고 있어? 그러게 미리 공부를 했어야지, 쯧쯧... 누가 시험 시간에 공부를 하니? 자 빨리 내. 늦게 내면  받아 줄 테니깐..."



한 글자라도 더 써보려는 학생들과, 일 초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조교와의 실랑이는 짧은 시간 끝에 종결되고 겨우 한 과목 시험이 끝나 버렸다.

길다고 생각했던 시험 시간은 너무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후딱 답안을 작성하고 나간 몇몇 애들 빼고는 거의 대부분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조교가 답안지 뭉치를 들고 강의실을 나가자
그 뒤를 학생들이 줄지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  강의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여기저기 뭉쳐서 시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복도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그런 애들 사이를 헤치고
수진은 유난히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얘들아! 우선 점심 먹고 도서관에 올라가자."



" 흐~~ 점심이로구나~! 오랜만에 칼질이나 해볼까?"



" 무슨 돈가스야, 넌 시험 잘 봤나봐? 천천히 밥 먹으려는 걸 보면 말이야...  같으면 그렇게 천하태평하지 못  텐데, 넌 역시 대단해. "




" 흥~! 남말 하시네. 큭큭...... 간지러워! "

밥 먼저 먹자는 나희의 말에 영연과 설아가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수진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  빠질래... 아침부터 영 힘드네..... 소화도 안 되고..."


" 그래? 그럼 못 먹겠네.... 넌 쉬고 있어. 우리끼리 먹으러 가지 뭐."



수진의 말에 나희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평상시와는 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무미건조하게 수진을 잘라내는,
싸늘함이 배어있는 말이었다.

아마 평소라면 어디 많이 아프냐고 물어봤을 나희였다.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어도 걱정하거나 자세히 묻지도 않고
애들을 데리고  먹으러 가겠다는
나희에게 섭섭함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아...
누구 때문에...
이러는 건데......
나도 좋아서 들은 건 아니란 말이야.....
그래도 친구라고 걱정되어 제대로 공부도 못하고....
시험도 망친 거 같은데.....
나희 넌.....
정말....
너무해......








**************







평소 그렇게나 눈치 빠르던 영연도 제 코가 석자라고
지루한 공부와 씨름하느라 전혀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설아는 시험 때문에 만원인 도서관에 자리를 늦게 잡느라
아예 멀리 따로 앉아서 공부를 하는 통에 수진들과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쉬자고 찾아오는 것도 시험이 점점 어려운 과목으로 갈수록
뜸해지고 식사시간이나 지금처럼 시험을  뒤에나 같이 모일 수 있었다.

덕분에 수진과 나희 둘 사이의 이상기류를 전혀 눈치 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나희의 싸늘한 말도 영연과 설아 둘이서
오랜만에 만나 투닥거리며 장난만 치고 있느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외톨이가 된 기분...
세상에 홀로 떨어져버린 느낌이었다.

결국 수진은 식당으로 가버린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터덜터덜 도서관으로 향했다.

홀로 올라가는 길,
기분은 최저로 내려앉은 상태였다.
시험은 모두에게 어려웠다.
나와서 쑥덕거리는  중 대부분이 몇 개나 풀었냐....
-며 서로에게 물어보는 말들이었다.

평소 수진이라면 시험이 끝나고 나면 잘 봤다
혹은  봤다는 감을 잡을  있었는데
이번 시험은 결과를 전혀 짐작하기 어려웠다.
문제 모두를 풀지 못하고 나온 시험은 처음이었다.


당혹스러움.


역시 공부하는 동안 집중을 못한 탓으로
얼핏 본 듯한 기억만 자꾸 떠올라 결국 문제를 완벽하게 풀지 못했다.
이제 결과는 채점을 하는 교수의 손에
이번 학기 성적이 달렸다는 사실이 수진을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다.

하아....
집중했어야 했는데...
좀 더 확실하게 외웠어야 되는데.....
너무....
어설프게 봤어.....

문제를 푸는 동안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내용들이 뜬구름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던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지만,
그 일들 때문에 시험을 망쳤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기는 싫었다.
그렇게 하나 둘 자신과 타협하다보면 결국 나태함에 빠질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시험 시간 내내 느꼈던 자신의 불성실함을 자책하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는 건....
시험이 끝난  대부분 애들의 표정이 어둡다는 거였다.
특히 언제나 수진과  수석을 다투던 재희도
새초롬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도서관을 향해  나가버리는 거 봐선
그녀 또한 별로  본 거 같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이 아닌,
남들이 못 보는 요행만을 바라며
높은 성적을 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어부지리로 따는 성적이 이번 학기 결과물이라면 정말 최악의 기분이었다.


결국 지금의 불확실성은 레포트와 기말고사로 만회해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훌륭한 레프트를 작성해야 할까.
기말고사는 또 얼마큼 잘 봐야
확실한 A 학점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벌써 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거렸다.
안 그래도 공부 문제로 명록과 가볍게 다퉜는데,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자신보다 레포트에 매달리고 있는....
수진의 모습을 명록이 좋아  것 같지 않았다.

레포트 쓰느라 못 만난다고 하면....
오빠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시험도 결과가 안 좋은데 미래마저 어두컴컴한 상상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걸으니 발이 더더욱 무겁게만 느껴졌다.
도서관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끝에 걸려서 넘어질 뻔 했다.



아....
싫다.....
싫어.....


수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주저앉았던 다리를 쭈억 펴서 일어섰다.


모두 다 그만두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곧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질끈  꽁지머리가 채찍처럼 그녀의 뺨을 때려댔다.

안 돼.....
힘내자 배수진....



그녀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다시 층계를 올라가는데, 갑자기 주머니에서 지잉하고 떨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 진동.

순간 바로 꺼내서 액정을 보니 명록이 보낸 문자였다.
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 밥은 먹었니? 끼니 거르지 말고.... 힘내서 언제나 화이팅! 공부 열심히 해. ]


휴대폰을 확인하는 수진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명록에게서 온 짧은 응원 문자.
왠지 메시지를 읽고 있자니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비록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멀리서 명록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왠지 힘이 났다.


수진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어깨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하~
그래!
힘내야지.
으샤! 으샤!

이제 여름의 기운마저 느껴지는 따뜻한 오후였다.
저 멀리 수진의 시험이 하루빨리 끝나길
학수고대 하는 명록도 왠지 지금 수진이 보는 하늘을 보고 있을 거 같았다.
수진은 시험을 자기 혼자 치루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도 나 만나고 싶은 거....
이렇게 참고 있잖아.
보고 싶은데  시험 잘 보라고
이렇게 잘 참아주고 있는 걸......
시험만 끝나면.....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험이 끝나면 이런 좋은 날씨에 명록과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싶었다.
아니 멀리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교외에 바람이라도 쐬러가자고 그에게 말해볼 생각이었다.



나중에...
홀가분하게 오빠와의 시간을 보내자.
그러기 위해선 역시 중간고사를 잘 보는 방법 밖에 없잖아.
후딱...
해치우는거야....

우선 집중에 방해되는 나희의 일은 잠시 구석으로 밀어두자고 다짐했다.

한번...
두번...
계속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생각 저편으로 묻고 있었다.

물론 나희를 소홀히 하는 건 아니지만,
한창 연애에 빠져 있는 수진에겐 지금 친구보단 명록의 우선 순위가 더 높았다.

나희야, 미안....
시험 끝나고 술자리라도 만들어서 얘기해보지 머.....


시험 끝나고 모이자고 하면 군말 없이 친구들은 찬성할 게 뻔했다.
영연과 설아가 온다고 하면 나희도 같이 따라올 테고
술을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녀들이 만난 것도 결국 신입생 환영회 술자리 아니었던가.


수진은 철없던 신입생 시절이 생각나며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까보단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자신의 자리가 있는 열람실 문을 열었다.





**************






사무실 시계가 어느새 6시를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한주 참....
정말 길었다....

진작 일이 끝난 사람들은 슬슬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퇴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명록은 뒤적이던 서류들을 한데 모으면서 주변을 보고 있었다.



그나마 내일은 결혼식이라도 있으니.....
좀 나으려나.....




토요일 사촌형의 결혼식이 있었다.
아마도 가면 허드렛일하고 심부름하다보면
대충 저녁 늦게까지는 이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낼  있을 것이다.

수진이 시험보지 않았으면 데러갈 수 있었을까?



대학동기 결혼식에는 데려간 적이 있었지만 친척들이 다 모이는 자리였다.
아직 부모님께 소개도 안했는데
가자고 하면 수진이 부담스러워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교제라는 단계를 밟아가는 가운데에서도 너무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슬슬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욕망도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의 여자....


내 여자친구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이렇게 예쁜 아이가 내 반쪽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마...
부모님이 제일 깜짝 놀라시겠지만...
친척들...
특히 자신 또래의 남자애들한테는
부러움과 시기가 적절히 섞인 시선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생각 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광경에
한번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역시 시험공부에 여념이 없을
그녀에게 이런 얘기는 꺼낼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수진이 가질 부담감도
엄청날테니 역시....
다음 기회로 미뤄야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웃긴다 방명록....
만나러 가지도 못하는데 무슨....
말도 안되는 꿈이냐...
히휴......



명록은 한숨을 쉬면서 서류철을 정리해서 꽂아 넣었다.
사무실에는 아직 아무도 퇴근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상사가 가라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럴 땐 누군가 총을 메야하는 법.
역시 승필 선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박 과장 자리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



" 어.... 그래. 다음  보자고. "



자리에 앉아서 혼자 무언가 하고 있던 박 과장은 고개를 들어 답했다.
승필은 다시 한 번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서서 명록을 향해 씨익 웃으며 사무실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한명이 용감히 선발대가 되어 퇴근을 하자마자 모두들 인사를 하고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야근이라도  거 같은 박 과장도 어느새 가방을 챙기고 퇴근하는 중이었다.


" 어이. 명록. 퇴근 안하나? "



옆을 지나던  과장의 말에 명록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아... 가야죠. "




" 그래그래..... 할 일 없이 사무실 남아있지 말고 빨리빨리 퇴근하라구. "

박 과장은 어깨를 툭툭 치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하...
다들 누구때문에
퇴근을 못했는데 저런 말을....


명록은 한숨을 쉬고는 책상을 정리하던  마저 치우고 있었다.
평소 정리를 해서 별로 치울 것도 없는 책상이었다.
그마저도 금세 끝나버리고
어느새 사무실에는 그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무실 시계를 올려다보니 아직도 7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 하아..... 슬슬 가볼까? "

아무리 둘러봐도  이상  일도 없는 사무실에 있다는 것도
할 짓이 못되는 터라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뒤 걸쳐 두었던 겉옷을 입었다.
가방을 메고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순간 휴대폰을 두고 온 것을 깨닫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는데 찾으러온 휴대폰이
책상 위에서 드드드 소리를 내며 떨고 있는 중이었다.

어라...
수진이한테 온 건가?


별 생각 없이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명록은 순간 눈이 꺼지고 있었다.
발신자는 <<하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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