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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화 〉제2부. 13화. 바람이 분다. (10) (139/195)



〈 139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10)

139.




야.... 방명록! 대충 보니까 새로운 계약이 여러  동시에 맺어질 거 같더라. 아마 조만간 정신없이 바빠질 거야. 그러니까 한가하다고 놀지만 말고 미리미리 거래처 관리 해두고 요새 기획 컨셉안이랑 기획들 정리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멍한 표정 짓고 잡생각 하지 말고 있으라고. 후후..... "


승필은 작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사무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헐....


그가 던진 작은 돌이 큰 파문으로 커지는 중이었다.


승필 선배의 말대로라면 아마 매일 야근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특히 거래처와 정산도 가까워지고
새로 일을 맺어야 할 수도 있기에
그의 말대로 관리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막상 일이 터지고 나면 정신없이 매달려야 하는데
그런 잡무까지 생기면 귀찮아지기 마련이었다.

뜻밖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웬일인가 싶었다.


역시.....
요새 여자를 만나더니 좀 배려라는 게 생겼나?


벚꽃 사건이 발생하는 그날 저녁...
프랑스 요리 메뉴를 자상하게 설명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나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듯한
승필의 모습이 요새 많이 유해진  같기는 했다.
확실히 정미를 만나면서 까칠했던 그의 주변에
봄날의 따사로움이 감도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아....
승필 선배는....
정미 씨하고는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을까?

문득 드는 호기심.
아니....
야릇한 상상.
정미와 함께 팔짱을  채 걸어가던 승필의 모습이 생각났다.

여자에 관해서는 달리 승필 선배가
전설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지금까지 손만 잡고 쎄쎄쎄 만 했을 리는 없는 그였다.


순간 정미의 몸매를 떠올리는 명록이었다.
제법 큰 컵의 가슴.
날씬한 허리.
약간 두꺼운 듯 보이지만
건강해 보이는 허벅지.
힐이 잘 어울리는 종아리.
그리고 눈웃음치며 길게 늘어지는 도톰한 입술까지......
왠지 모를 색기가 흘러나오는 그녀의 모습이 승필과 얽히면서
야동에서나 나옴직한 모습으로 머릿속에서 그려지자
순간 가슴 속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뜨거워졌다.


헐.....
머냐......
이건.....



일할 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정미에게 여자를 느끼는 것이 명록에겐
당혹스러움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이 붉어지는 거 같아
순간 고개를 돌렸는데 사무실 여직원과 눈이 바로 마주쳤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는 명록의 시선에
짐짓 자연스럽게 다시 모니터로 피해버리고 명록 또한 바로 고개를 숙였다.
몰래 야릇한 잡지를 보다 걸린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는 자신이 왠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얼굴은 아직도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놔...
내가 왜 이러지?



명록은 왠지 모를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괜히 자판을 힘껏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진과 만나지 못하고 풀지 못한 욕정이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지금은 봄.
만물이 발정기에 접어든다는 계절.
비록 여름으로 넘어가는 중이라
점점 더워지고는 있었지만 분명 봄이었다.


봄은 모든 생물의 발정기이자
새생명을 잉태하는 짝짓기의 시간 아니었던가.
식물도 동물도 생명의 태동을 느끼며 짝짓기에 여념이 없는 계절.
인간에게 발정기는 사라졌다지만
 옛날 포유 동물로써의 본능이 남아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발정기....
인간도 동물인데 영향을 안 받을 리 없어.....
그렇지 않고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할  없지.....
암...



명록은 혼자 중얼거리며 자신을 추스르고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건 수진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 때문에 보지 못하던 거와는 달리 수진의 이유로
자기가 보러 가지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답답하게 느껴질 줄이야.
회사 일에 쫓겨서 바빠 수진과 만나지 못할 때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수진의 벗은 몸.
탱탱하고 탄력 있는 그녀의 감촉.
함께 했던 뜨거운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두근거리며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순간 딩동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명록은 깜짝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정체를 찾았다.
한참 야한 동영상을  때 열리는 방문처럼
갑작스런 기습에 명록은 붉어진 얼굴로 살펴보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사무실 낮은 칸막이 아래 보이는 정경에서 누구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딩동.

다시 들리는 소리에 가만히 아래를 살펴보니
자신의 컴퓨터, 작은 스피커에서 나고 있었다.
모니터를 내려다보니 업무용 메신저에서 알림 표시로 느낌표가 깜빡거렸다.

어라, 뭐지???


업무상 언제나 출근하면 접속해있는 메신저였다.
하지만 이건 개인용 메신저라 별도 연락이 올 곳이 있지 않았다.

누구지?




서둘러 내용을 확인하는 그였다.
순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메신저의 상대를 보자 명록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하윤.
그녀였다.




**************





[ ㅎㅎ 안녕하세요? ]

[ 하윤씨 오랜만이에요.]

[ 그러게요. 갑자기 이렇게 말을 걸게 되서 죄송해요.]

죄송하다니 천만의 말씀.

명록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판을 두들겼다.

[ 무슨 말씀을요. 자~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반은 장난치는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글을 치고 있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왠지 그녀에게 이런 가벼운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지금 그에게 시간을 조금이라도
같이 덜어갈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 후후, 그냥 명록씨 보고 싶어서 한 건데 업무 얘기 아님 연락하지 말  그랬나 봐요? ]

헉!
보고 싶어서?!




순간 당황한 명록은 뭐라고 답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가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긴 했지만
당사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설마.....?


순간 모니터에 보이는 글자들.

[ ㅎㅎㅎㅎ 농담이에요. 사실 저번에 같이 했던 일 때문에 연락했어요. 초기 기획안 혹시 보관해놓은  있으세요? 시놉시스 랑 콘티 잡은 거요. 프레젠테이션 말고요. ]

가득 채워진 그녀의 메신저 글자들이 빠르게 올라와있었다.




역시 그럼 그렇지....
그랬구나......
흐음....
그랬어......

순간 농담이라는 그녀의 문자에 당연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왠지 그의 마음 한구석에 서운함이 들었다.

어휴....
대체 난 무얼 기대한 걸까?
멍청한 놈...



명록은 머리를 휘휘 젓고는 서둘러 답을 보냈다.

[ 네. 자료들 다 가지고 있어요. 초기버전부터  있는데 전부 필요하세요? ]


[ 와, 정말요! 혹시 그것 좀 다 보내주실 수 있으세요? ]

메신저 글자 위에 하윤의 기뻐하는 얼굴이 보이는 거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조금 풀리고 있었다.


[ 그럼요. 당근이죠. 지금 바로 압축해서 보내드릴게요. ]


명록은 언제나 일을 하면서 해당 과정에서 있는 모든 자료와 파일을 보관하고 있었다.
언제나 외장하드를 들고 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또한 일을 하나하나 하면서 자신의 노하우를 쌓아가는 것이므로
쌓여가는 하드들을 보면서 뿌듯하기도 했다.
자신이 피땀을 흘려 만들어낸 일들의 산물이기도 했고 소중한 자산이기도 했다.

그는 바로 해당 파일을 찾아 압축해서 전송을 시작했다.
 많은 양이라 용량이 상당했다.


그사이 하윤과 간단한 얘기를 나누었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
잡다한 우스개.
메신저로 그녀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
문득 함께 같이 갔던 벚꽃 구경이 생각났다.


그때 거하게 한턱 받겠다는 약속....
아직도 기억할까?


어느새 파일 전송이 끝나고 하윤이 고맙다고 하는 메신저가 보였다.
명록은 서둘러 답했다.

[ 별말씀을요. ㅎㅎ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


[ ㅎㅎ 이미 충분히  도움을 주셨어요. 그럼 오후업무시간 잘 보내세요. 담에 또 연락드릴게요.]

[ 네. 하윤씨도 수고하세요.]

그의 답문을 마지막으로 하트 이모티콘을 날리며 하윤이 퇴장했다.
텅  대화방을 보며 명록은 책상 위 놓여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오늘따라 더욱 수진이 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욕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의 몸이 그리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았던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이 떠올랐다.


봄날 하늘거리는 원피스 차림
또는 화사한 옷차림의 여자들 옆에서
다정히 함께 하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들.
얼마 전까지도 그들처럼 연인의 자리에 속해서 좋은 나날을 보내던 명록이었다.

하아....
그냥 보러 갈까?

처음 대학교에서 수진을 보았던 그날이 생각났다.
무작정 찾아간 학과사무실에서 만났던 그녀의 모습.
그러고 보니 은근히 수진과의 만남을 밀어주던 조교는 어떻게 지낼까?
그녀도 자신이 수진과 이렇게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려나.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오르며
그날처럼 무작정 수진이 있는 캠퍼스 안으로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나와 뜨겁게 안고 싶었다.

하지만.....

할  없는 일이었다.
아니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한참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시험공부에 방해될까봐 잠시 만나지 말자고 하던
수진의 말대로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작은  한마디에 서운함이 남았지만
결국 지금 찾아가는  그녀의 말대로 되는 것 밖에  되는 일이었다.

장학금에 대해 욕심 부리는 그녀.
자기 때문에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그녀의 몸에 대한 욕정이
만나고 싶은 이유라면 정말 저질스러운 일이었다.


손가락을 놀려 <<만날까....>>라고 썼던 문자를  지워버렸다.
대신 <<밥은 먹었니? 끼니 거르지 말고.... 힘내서 언제나 화이팅! 공부 열심히 해>> 라고 적은 뒤 발송을 눌렀다.

전송완료를 보고는 사무실 시계를 보았다.
퇴근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수진의 중간고사가 시작된 이래
지구가 천천히 도는 것처럼 너무도 길기만 한 하루하루였다.






**************




" 자, 시간 됐으니 빨리 내.  시간 끈다고 좋은 성적 받는  아니야."




교탁에 선 조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다.
수강 신청을 할 때부터 선배들이  교수님 수업의 성적은
 나오기 힘들다고 입을 모아 얘기하는 통에 알고는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직접 경험해 보니 대대로 과에서 내려오는 악명이
괜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험 문제는 녹록치 않았다.

수진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볼펜을 쥔 손에 땀이 가득 고여 있는 느낌이었다.

선배들의 조언을 들으며 수업을 듣지 않고 피할 수 있었으면 진작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수 과목인 탓에 피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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