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9)
138.
완벽한 거짓말을 만들고 가던 그녀에게 하나의 장해물이 생겨났다.
갑자기 학교로 찾아온다는 명록의 말에 수진은 깜짝 놀랐다.
이미 목소리만으로도 그녀의 상태를 알아맞혔는데,
직접 표정까지 보인다면 여태까지 했던 거짓말을 들킬 게 뻔해 보였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그가 오는 건 왠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희가 본다면 더 상황이 나빠질 거 같았다.
수진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 아....아냐. 그리고 친구들도 같이 있는걸. 나만 혼자 먹을 수도 없고...... "
" 에이... 머 친구들 것도 사가지고 가지 뭐. "
앗!
핑계가 너무 허술했다.
친구 때문이라니....
좀 더 그럴 듯하고 절대 올 수 없는 핑계를 댔어야 했어야 했다.
수진은 이런 바보 같은 이유를 생각해낸 자신을 원망하며 입을 열었다.
" 아냐. 그렇지 않아도 평소 오빠한테 잘 얻어먹는 애들이잖아. 맨날 비싼 거나 사주고 오빠가 무슨 봉인가? 그리고 괜히 여기까지 오빠 찾아오고 힘들아...... 미안하단 말이야. "
"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머. 겸사겸사 너도 보고 난 괜찮아. "
" 그래도....... 흐음....... "
이렇게까지 명록이 말을 하니, 수진이 안 된다고 말하기도 곤란해졌다.
그의 말에 꼭 오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거 같아 더욱 그랬다.
차라리.....
오라고 할까.....?
그가 보고 싶은 건 수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렇게 답답한 마음에 머리까지 복잡한 지금....
특히나 그라도 보고 수다라도 떨고 싶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명록이 퇴근하고 오면 늦은 저녁이니,
어쩌면 어두워서 친구들도 그와 만나는 것을 눈치 채기 힘들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 아냐... 역시 오빠 안 오는 게 나을 거 같아. "
명록이 오게 되면, 그의 말대로 분명 친구들이 먹을 것까지 사가지고 올게 뻔했다.
결국 친구들과 함께 자리를 만들게 될지도 몰랐다.
둘이서만 만나면 모를까.....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동석하고 어울렸던 그들이었다.
뻔히 도서관에 그녀들이 있는데 보지 말라고 하면
목소리 만으로 걱정하던 명록이 금세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을 거 같았다.
거기에 나희와 어색한....
자신의 모습이라도 보게 된다면?
순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수진은 서둘러 거절했다.
영연과 설아야 지금 당장은 시험이라 정신이 없어서 그냥 넘기고 있지만,
혹시라도 명록이 둘 사이가 전과 같지 않다는 걸 눈치 챈다는 상상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장 친하다는 친구와의 냉랭한 관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명록에겐 늘 자신의 좋은 면만 보여주고 싶은 게 수진의 마음이었다.
그녀의 거절과 함께 수화기 너머 짧게 침묵이 흘렀다.
오빠가 섭섭해 하고 있겠지.....?
분명 오고 싶어 하는 거 같았는데.....
수진은 미안함도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차피 거절해야 한다면 그냥 이렇게 잘라 말하는 게 나을 듯 싶었다.
" 흐음.... 그래. 알았어. 너무 힘들면 좀 쉬고 공부해. 피곤한데 억지로 앉아있음 잘 들어오지도 않더라. "
침묵의 시간이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거 같이
불편하게 느껴지는데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렇지 않게 보듬어주는 듯한 명록의 말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어오자 수진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다행히 넘어가는 듯 보였다.
생각처럼 많이 실망하는 목소리도 아니라 더욱 다행이었다.
명록이 수진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럴까?
그는 늘 수진에게 한발 양보해주었다.
" 밥 잘 챙겨먹고 쉬엄쉬엄 공부해. 슬슬 나도 사무실로 들어가야겠다. "
그러고 보니 통화가 길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할 때면 언제나 짧게 통화하던 그였는데
이렇게 오래 잡아두어도 되나 싶어 서둘러 말을 이었다.
" 응. 고마워, 오빠. 오빠도 힘내고 나 못 보는 사이 아프면 안 돼."
" 하하.... 나야 튼튼하잖아. 그럼 이따 문자 보낼게. "
밝은 그의 웃음소리.
수진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속삭였다.
" 응, 나두. 오빠..... 사랑해. "
그에게 너무 미안해서, 사랑한다고 이야기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수진이 가진 미안함을
모두 덜어주는 것은 아닌데, 그녀의 입은 잔망스럽게 사랑을 담았다.
" 그래. 나도...... "
멀리서 들리는 명록의 목소리와 함께 짧은 통화가 끝나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수화기의 음성이 적막함을 불러왔다.
시험도....
나희의 일도....
그리고 아빠의 퇴직 문제도...
아아...
어서 끝나버렸으면...
명록을 만나지 못한지 6일 째, 수진은 그가 지금 너무 보고 싶었다.
오지 말라고 한 건 자신이었는데 전화를 끊자마자 밀려드는 그리움에 마음이 시큰거렸다.
천천히 도서관으로 들어와 다시 자리로 들어가는데
멀리서도 나희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그녀의 뒷모습,
그리고 그 위로 화를 내며 뛰쳐나가는 나희의 모습이 겹쳐졌다.
하아....
몰라 몰라.....
수진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녀의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주의를 해도 의자가 바닥이 끌리며 덜그럭 소리를 냈다.
가슴을 울리는 듯한 소리에 수진은 가슴이 덜컥 했다.
그녀의 기척이 한번 쳐다 볼 법 하지만, 나희는 여전히 수진을 쳐다보지 않았다.
나희와 수진 사이.
5센티도 안 되는 나무 칸막이가 삼팔선처럼
그녀가 있는 공간을 잘라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은 일들 이것만 지금에 와선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며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딱딱한 나무의자의 감촉이 엉덩이에 느껴지며
책상 위 올려놓은 팔꿈치 아래 전공서적의 모서리가 눌리며
아프게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또 성큼 흘러버렸다.
수진은 다시 독하게 마음을 먹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
지금은 이것저것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차라리 하나하나 풀어 나가자...
이러다가 정말 시험도 망쳐버리겠어...
다음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복잡한 생각에 아직 한번 밖에 훑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이대로 가면 이번 시험마저 망치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수진은 다시 한 번 머리를 꽉 잡아 묶었다.
팽팽해진 머리칼을 느끼며 흐트러진
마음과 펜을 다시 잡고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놀리는 그녀의 손놀림에 금세 연습장 페이지가 깨알 같은 글씨가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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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시계는 그래도 흘러간다 라는 말이 있다.
지루하고 느리게만 느껴지는 군 생활도
어느 순간 흘러 흘러 제대를 맞이하는 순간을 맞이한다는....
언제나 군대에서 머리를 스쳐 지나가던 문구였다.
얼차례.....
정말 인간말종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박박 갈던 선임병의 갈굼 속에서
얼마나 하루하루가 길었던가.
개구리 마크라고 일컫는 예비군 마크를 달고
오랜 시간 몸 담았던 병영을 나오는 순간 느끼던....
바깥 공기의 신선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실제는 병영 안의 공기와 다를 바 없었겠지만
그날 아침에 가득 허파로 빨아드린 시원함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했다.
명록은 제대할 때의 시간을 되새기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애초 국방부 운운하는 생각 자체가 들은 이유가
업무용 컴퓨터를 켜면서 보았던 날짜 옆에 보이는 요일 때문이었다.
어느새 목요일.
내일 하루만 지나면 다시 주말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안 간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토요일이라니......
수진과 만나지도 못한 채 회사도 한가해진 탓에
아주 죽을 맛이었던 그로써 이렇게 변함없이
다시 주말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참 예전부터 느끼던 사실이지만
시간이라는 것은 요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직장인들이 기다려 마지않는 주말이
코앞인데도 전혀 반갑지 않는 명록이었다.
지난주 할일 없는 주말이 얼마나 길고
좀이 쑤시도록 지루했는지 충분히 체험한 그였다.
아....
이번 주말은 대체 뭘 하고 보내지?
다음 주까지 수진은 시험이 계속 되고 있는 터라 만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와 연락하기도 그런 것이
수진과의 연애가 시작되면서 거의 연락두절 상태가 되어버린 그였다.
만나서 술 한 잔 하자고 연락주면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거절하고는
휭 하니 수진과의 데이트를 즐기는 바람에
어느새 친구들도 그와의 연락을 끊고 거의 뜸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가 연락한다고 해서 반가움에 옳다구나 나올 친구들 얼굴이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대충 보니 각자 연애에 빠져서 바쁜 모양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비춰볼 때 연락해봐야 나올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순간 등 뒤에서 승필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야.... 아무리 일이 없다지만 그런 멍한 표정 짓지 말아라. 박 과장이 보는 날이면 없던 일도 생기겠다. 자샤. 표정 관리 하지 못해? "
헐.....
이 인간이 왜 갑자기 시비지?
한참 정미와 놀아나느라 그의 관심에서 멀어져 살맛나던 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침 일찍부터
명록의 자리에 강림해서 트집 아닌 트집을 잡고 있었다.
박 과장은 오전에 외부 업체 협의 건으로
일찍 자리를 비운 것을 알고 있기에 마음 편히 놀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승필 선배는 싱글벙글 웃으며 명록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 야~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아라 . 흐흐. 농담이다. 박 과장은 아마 오후에나 들어올 거다. 맘 편히 놀아라. 하하하. "
으허.... 진짜 이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악당이 분명했다.
속으로 으르릉 항의하는 명록이었다.
이미 놀구 있는 중이었다고요.
당신이 오기 전까지 아주 평안히!
눈으로 욕하는 동안 주인의 허락도 없이
승필은 명록의 책상 위 서류들을 뒤적뒤적 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야.... 이번 주 너 완전 놀았구나? 암튼 회사는 쓸데없는 곳에서 비용을 줄이려고 애쓴단 말이야. 이렇게 농땡이 치는 사원 급여를 관리하면 아마 비용절감 효과를 극대화 시킬 텐데.... 안 그러냐? "
하!
선배.....
남말 할 때가 아닐 텐데!!!
이번 주 내내 정미 씨와 메신저 하면 논 것을 뻔히 아는데 말이야!!!
당신 양심은 있는 거유? 없는 거유?
그러나 이것 또한 속마음에서나 외치는
허망한 외침일뿐 명록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 아.... 나름 자료도 정리하고 그랬어요. 박 과장님이 날 그냥 놀게 놔둘 분도 아니고 시킨 일도 있고 받는 돈만큼 충실히 일했다고요. "
" 아쭈! 너 많이 컸다? 말대꾸도 다하고? "
승필 선배는 쿡쿡 웃으며 여전히 명록을 애 다루듯 하고 있었다.
하긴 이미 현장일 부터 해서 그의 경력에 비하면
명록은 이제 막 초보를 벗어난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승필의 능력에 비해 직급이 낮은 것도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도 모두 그가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 수 있는 지금 자리에 만족하고 있는 터에
괜히 승진해서 더 많은 일거리를 맡고 싶지 않다고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일에 대한 맥을 짚는 것은 확실히 빠른 그였다.
배울 것도 많고 명록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는 터라
종종 고맙기도 한 존재였지만 가끔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
자기 점수를 깎는 것이 단점이랄까?
어떤 때는 군대에서 보기 싫었던
어떤 선임병 생각이 나게 하는 행동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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