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7)
136.
수진은 자리로 들어와선 그대로 머리를 책상에 묻어버렸다.
나희가 숨기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본 기분이었다.
유부남.....
이혼.....
아까의 상황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꾸만 생각나서
전공책에 쓰여진 활자들을 읽어도 머릿속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희의 방탕함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남자들을 여럿 동시에 만나기도 하는 그녀를 보며
수진은 부럽다거나 따라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희의 행동이
나쁘다는 생각하거나 비난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희와 그녀를 만나는 남자들은 서로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한....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녀의 생활방식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이해해 왔었다.
하지만.....
이건 아닌 듯 싶었다.
불륜?
불륜이라니....
그 남자가 유부남이었다니....!
수진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나희의 사생활이고 자신은 전혀 상관없는 제삼자였다.
하지만 어떻게 알게 되었든지 친구인 나희와 관련된 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상처받을 것은 누가 봐도 나희였다.
유부남과 젊은 여자.
거기에다가 미모의 여대생.
그들의 만남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희를 욕할 거라 생각했다.
지금, 친구인 자신마저도 나희에 대해 비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거기에다가...
불륜.
남자와 여자라는 두 사람을 넘어서서
하나의 가정이 깨지는 일이었고, 간통이라는 굴레를 쓰게 되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어찌 됐든 한사람을 바라보겠다고 서약을 하고 맺어진 관계였다.
아내를 가진 남자와 만나서 그것도 몸을 섞는 관계라니
그런 관계에 친구인 나희를 올리고 싶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을 노트 구석에 끄적거리다가 보니
어느새 공부할 진도가 제자리에 멈춰버린 지 오래였다.
수진은 뭐라고 썼는지도 알 수 없도록 시커멓게 변해버린
노트의 한 페이지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아직도 나희는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나희 너....
아직도 그 남자를 만나고 있는 거야?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나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 걱정이 되었다.
그 남자는 나희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학기에 들었단 성에 관련된 수업에서 배웠던 쿨리지 효과가 생각났다.
이미 기존에 섹스를 한 암컷보다 새로운 상대에게서
성욕이 왕성하게 일어난다더니, 그 남자는 단지 쿨리지 효과 때문에
부인이 아닌 새로운 섹스 상대인 그녀를 정복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나희는 분명 똑똑한 친구지만, 지금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금지된 사랑을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을지도 몰랐다.
친구인데....
역시...
말해야 되지 않을까?
수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아까 봤던 그곳에 그녀가 있을 거 같았다.
남자가 있다면 화를 내서 쫓아버릴 각오로 씩씩 콧김을 쉬면서 걸음을 빨리 재촉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판기 옆 휴게실에 나희가 있었다.
다행히 그 남자를 만나고 있진 않았다.
마음 한구석 남자가 있으면 어쩌나 하며 걱정하고 있었는데
안도하는 마음에 나직하게 한숨을 쉬면서 나희 곁에 다가갔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동전을 자판기에 넣어 커피를 뽑아서는 나희의 옆에 앉았다.
" 이제야 쉬려고? "
나희가 수진을 쳐다보며 웃었다.
아마 그녀도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진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응.... 공부가 안되서..... 너도 열심히 하더니..... 공부가 안 되나보다? "
" 그러게? 내일이 시험인데 머리가 복잡하네... 후후...."
"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
수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 양 시침을 떼며 물었다.
" 무슨 일은..... 후후..... 너무 오래 책을 봐서 그런가봐. "
나희는 역시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아까 본 얘기를 하기엔 역시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목격했던 불륜에 대한 얘기는
입 안에서만 맴돌고 실제 나오는 소리는 별거 아닌 일상의 일이었다.
교수님 이야기.....
학과 애들 사이 떠도는 풍문.....
얘기는 돌고 돌아 계속해서 수진은 어줍지 않은 얘기만 꺼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꺼내다 보니 말문이 막히고,
결국 벚꽃 축제에서 명록과의 이야기까지 나오고 더 이상 할 말이 떨어졌다.
어느새 말이 끊어진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진은 시선을 떨군 채 이젠 식어버린
종이컵만 만지작거리며 주저하고 있었다.
침을 한 모금 꿀꺽 삼키고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나희야..... 나...... "
나희는 눈을 깜박거리며 수진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 나.... 너 그 남자 만나는 거 봤어..."
돌을 얹은 듯 무겁게 닫혀있던 수진의 입이 열리고
말이 나오자마자, 나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귀신인 양
바로 핏기가 가시며 아무 표정 없이 굳어버렸다.
" 아까, 어쩌다가 듣게 됐는데..... 그...그 남자 유...부남이야?"
조심스런 수진의 물음에 나희는 대답이 없었다.
이미 내친 걸음이었다.
수진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 저기.... 그 남자 만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 흠...... "
어색한 나희의 헛기침.
이왕 시작한 거 수진은 말을 이었다.
" 나희 너도 알잖아.... 그런 만남은..... "
" 아! "
순간 신경질적으로 쏟아진 나희의 말에 수진은 더 계속 말할 수 없었다.
약간 붉어져 있는 듯한 나희의 볼이 그녀의 시선 안에 들어왔다.
" 응? "
" 야, 배수진! "
싸늘한 침묵을 깨고 나희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그 말투는 평상시 그녀에게서 듣기 어려운 말투였다.
" 니가 먼데 남의 얘기를 엿들어?! 그리고 넌..... 내가 바보 인줄 알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마!!!"
프레스코 화처럼 나희의 무표정한 얼굴이 쩍쩍 갈라졌다.
처음 보는 나희의 화내는 모습이었다.
수진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나희의 모습에 너무 놀라서 얼어버렸다.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며 과자를 먹던 남학생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여학생들도 그녀의 성난 목소리에
모두 수진처럼 멍한 얼굴로 나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얼어붙은 그 순간....
나희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
" 응. 잘됐다.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네. "
" 이제 고작 세과목 끝났는데 머..... "
정기 연락과 같은 시간이었다.
수진과의 전화통화.
기나긴 주말을 보내고 다시 출근했지만
회사도 명록의 지루함을 알았는지 아주 한가한 한주를 선사해주고 있었다.
일이 넘치다 못해서 숨쉴 시간도 안주던 근무시간이 덕분에 널널해졌다.
좀이 쑤셔서 미칠 것 같이.....
거기에다가 아리따운 수진이와 만나지 못한지 벌써 6일째.
평소에는 그렇게 칼퇴근을 시켜주지 않더니만
무슨 심술을 부리는 건지 이번주 들어와서는 딱딱 6시에
정시 퇴근도 시켜주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정말 신나서 회사를 박차고
뛰쳐나갔을 텐데 지금은 일찍 퇴근해도 갈 데가 없었다.
아니 모두 짝짓기에 바쁜 봄이 되서 그런지 뭘 그리 다들 바쁜 탓에
이제 일이 끝나도 잠시잠깐 같이 맥주 마실 사람 찾기조차 어려워졌다.
하긴 지난주 거의 매일 돌아가며 한잔씩 마시지 않았었나.
더이상 모일 건덕지도 없긴 했다.
점심 먹고 간단히 일을 처리하고 나니 다시 지루한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잠시 담배피러 가는 사람들에 묻어 휴게실로 나와서 수진과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왠지 힘이 없어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맥이 빠져있는 듯한 수진의 목소리에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다.
방금전 치루고 나온 시험도 그냥 잘 본 거 같다고 말했던 그녀 아닌가.
작년의 경우를 보자면 그 정도면 상당히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밝은 목소리로 크게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잘 본거 같아 했던 과목들은 나중에 그녀가 말해준
성적 결과에서 모두 A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번 시험도 결국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게 뻔했다.
근데도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흐음...
왜 그러지?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수진아 너.... 왠지 힘이 없어보인다. 많이 힘든가보네....? 몸은 괜찮아? "
" 힘들긴..... 괜찮아. "
" 흐음.... 밤새고 그래서 어디 아픈 거 아냐? "
피이 하는 그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 나만 그런가 머...... 다들 그러고 있는데..... 조금 피곤하긴 한데 아픈데는 없어. "
" 그렇구나....... "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 치고는 여전히 힘이 없어보였다.
명록의 마음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형체를 들어내고 있었다.
무언가 수진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녀를 웃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내밀었다.
물론 그 안에는 수진을 보고 싶은 그의 사심도 살짝 담겨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여는 명록의 한마디.
" 저기..... 내가 맛있는 거라도 사가지고 갈까? "
" 응?! "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는 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대개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언제나 행동으로 옮기던
명록이었기에 진짜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그녀가 말을 받았다.
" 아....아냐. 그리고 친구들도 같이 있는걸. 나만 혼자 먹을 수도 없고...... "
처음부터 어차피 갈거라면 수진의 세친구들도 챙길 생각이었다.
명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에이... 머 친구들 것도 사가지고 가지 뭐. "
" 아냐. 그렇지 않아도 평소 오빠한테 잘 얻어 먹는 애들이잖아. 맨날 비싼 거나 사주고 오빠가 무슨 봉인가? 그리고 괜히 여기까지 오빠 찾아오고 힘들잖아...... 미안하단 말이야. "
"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머. 겸사겸사 너도 보고 난 괜찮아. "
" 그래도....... 흐음....... "
수진은 입을 다물고 어느새 전화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개 이러는 경우는 거절로 끝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대답은 예상대로 였다.
" 아냐... 역시 오빠 안 오는 게 나을 거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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