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5)
134.
주기적인 행사처럼 도서관은 이번에도 중간고사를 앞두고
역시나 한산함을 잃은 채 공부하는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이미 시험에 돌입했지만, 공식적인 중간고사는 내일부터가 시작이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학생들은 평상시엔 찾지도 않던 도서관으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난리를 피해서 몰려든 피난민 마냥 넘치는 사람들 때문에
열람실에 자리를 맡지 못한 학생들은 책을 읽으라고 만들어 놓은
서가의 책상까지 점령하고 시험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공무원도, 회사원도 모두 쉬는 일요일이지만,
당장 시험을 앞둔 학생들에겐 의미 없는 휴일일 뿐이었다.
수진과 세친구들도 예외 없이 학교에 나와 공부를 하고 있었다.
특히 나희는 지난주부터 계속 도서관에 박혀서 공부하는 모양이었다.
제법 이른 시간....
일찌감치 도서관에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나희를 보고 수진은 혀를 안 찰 수 없었다.
대단한 년.....
에휴...
독한 뇬.....
하지만 그녀를 보면서 감탄할 시간도 아까웠다.
이내 자리를 잡고 수진도 공부를 시작했다.
영연도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았고 설아는 이미 꽉차버린 그들의 곁을 떠나
빈자리를 찾아서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랜 시간 앉아 있어서인지 집중력이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찌뿌둥해진 몸 때문인가 싶어서 기지개를 피며 팔을 쭈욱 뻗었다.
두두둑 거리는 소리가 관절과 관절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수진은 허리를 쭈욱 피면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 속으로 여전히 나희가 머리를 숙이고 책장을 넘기며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헐.....
저 독한 년 좀 봐......
아침에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한곳도 변함없이 마치 조각상인양 공부하는 나희를 보고 있자니
평상시 유유자적하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감탄 아닌 감탄을 하고 고개를 돌리니 또 한명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영연이었다.
어쩜 수진의 양 옆에 앉은 두 사람이 이렇게도 차이 나는지....
수시로 휴대폰을 쳐다보며 부스럭거리는 영연은 애초 공부와는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산만하기 짝이 없는 영연과 다르게
나희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름 수진도 집중력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 앞에선 한수 접어야 할 거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수진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체......
공부하면 나 배수진이라고.
흥흥!
기지개를 펴느라 잠시 한눈을 판 자신이 왠지 나희에게 지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 한번 나희를 홀겨봐주고는 수진은 바로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나희의 공부하는 모습이 대단한 건 인정하지만, 결국 수진에겐 경쟁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수진이 앞서 왔었다.
과 안에서 전체 장학금을 받는 학생의 수는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학년 별로 따지자면 많아야 둘 셋이었다.
전체 장학금을 꼭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번 만큼은 나희가 친구보다 경쟁자로 느껴지고 있었다.
수진은 다시 자세를 잡고 책을 보았다.
그렇게 집중력을 불태우며 공부를 이어갔다.
우선 목표로 정해놓은 진도를 반쯤 뺐을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진의 눈이 조금씩 뻑뻑해지고 아파오고 있었다.
안경을 걸친 귀도 아파오고, 머리도 지끈거리기 시작하자
눈앞에 글씨가 가물가물거리고 결국 손에 쥔 펜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한 번 휴식 없이 요약하며 외우느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목도 저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 안에서는 이제 쉬자고 아우성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긴 시간 공부를 위한 잠깐의 휴식!
수진은 피로해진 눈을 위해,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목뼈 마디마디가 뚜두둑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머리뼈마저 저리는 듯한 느낌에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자
자연스럽게 돌아가던 시선에 도서관 창문 밖 풍경이 들어왔다.
어느새 밖에 보이는 풍경은
어둑어둑해진 하늘과 함께 점점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나둘 전등불이 켜지는 것을 보니 점심도 채 먹은 것도 없이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이거 밖에 공부 못했는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린 거야???
수진은 믿을 수가 없어서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디지털시계에 보이는 시간은 이미 여섯시를 훨씬 넘긴 시간이었다.
하아...
벌써 이렇게나 됐어?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잖아......
본의 아니게 끼니를 넘겨버린 탓에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뱃속에서 자명종이 울리듯 꼬르륵 소리를 내는 거 같았다.
신맛을 생각하면 침이 고이는 것처럼...
잊고 있었던 공복감이 밀려오자
빈속이 더욱 허전하게 느껴지며 배가 급 고파왔다.
아까까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던 허기가 저녁 먹을 시간임을 알자
밀려오는 것을 보며 마치 자신이 파블로프(Pavlov)의 개가 된 것처럼
느껴지며 수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왠지 모를 우스움이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하하.....
아빠의 퇴직은 걱정하면서도 배는 고프구나.
상주도 꼬박 밤새고 굶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새우잠을 자더라도 조금씩 눈을 붙이고 미음도 챙겨먹으며
장례를 치른다고 하던데 왠지 수진은 자신이 그런 상주가 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시작된 허기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며
같이 애들과 함께 밥 먹으러 가야겠다 생각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조용한 열람실에 그녀의 배에서 울리는 ....
우렁찬 꼬르륵 소리가 널리널리 울려 퍼질 것 같았다.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려는데,
옆에 앉았던 영연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엎드려서는
세상 까맣게 잊어버린 채 자고 있었고,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희도 보이지 않았다.
에???
어라....?
나희가 어디 갔지.....?
쉬러 나갔나???
보이지 않는 나희의 모습을 찾아 자리에서 일어나 열람실 구석구석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왔다 갔다 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먼저 밥을 먹으러 간 모양이었다.
으휴...
기집애.....
같이 갈 것이지.....
어쩌면 수진이 너무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아 혼자 나희가 밥 먹으러 갔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아까 몇 번 기지개를 펴며 쉬러갈까 고민했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나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꾹 참고
다시 공부했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희도 시험기간에는 꽤 열심히 노력하는 여학생 중 하나였다.
수진처럼 전체 장학금을 타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장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학생 중 하나였다.
나희가 자세히 이야기를 해 준 적은 없지만,
수진은 그녀가 집에서 나와 따로 독립을 할 수 있었던 조건 중 하나가
장학금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장학금을 타지 못하고 성적을 엉망으로 받으며
그녀는 대학을 더이상 다니지도 못하고 집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종갓집 맏딸로 태어나 이래저래 엄격하게 자랐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있었다.
여자가 대학에 가는 것도 사실 엄청난 반대를 뚫고 또 자취하겠다는 것도
간신히 여러 가지 조건을 들어 허락받았다고 말하며 웃던 나희의 미소가 쓸쓸하게 보였던 술자리 모습.
뭐 그 뒤로 자신의 얘기를 다시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시험기간마다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나희의 모습이
왠지 한편으로는 지금 이해가 되는 듯 싶었다.
어쩜 나희는 여러 남자를 만나고 자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시험기간이면 미친 사람처럼 공부에 매달리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나희.
종갓집 여러 가지 집 안의 세습에 묶여서 꼼짝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학에 합격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있는 모습은
그 뒤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나희의 정성과 피나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우습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한 동기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그런 그녀가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는 수진이었다.
어찌 됐든 나름 라이벌로 생각했던 나희가
먼저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것을 알자 조금은 마음이 느긋해졌다.
단 한 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던 나희도
쉬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도 커피를 마시며 한숨 돌리고 싶어졌다.
깊게 잠든 영연을 바라보며 어쩔까 고민하던 수진은
너무도 달게 자는 영연의 모습에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고는
조용히 혼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 있는 설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홀로 식사를 해야할 상황이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줄 저녁을 먹기 위해, 그리고 또 먼저 자리를 비운 나희도 찾을 겸
입구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도서관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여름으로 가는 늦은 봄이지만, 해가 지면 뜨거웠던 한낮과는 다르게 쌀쌀하게 온도가 떨어졌다.
환절기라고 하지 않던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컸기에 감기에 걸리기 쉽다는 기상캐스터의 말이 생각났다.
유난히 낮은 덥고 밤은 쌀쌀했다.
수진은 혹시나 해서 들고 온 가디건을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쌀쌀한 저녁 날씨에 차가워진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뒷목이 서늘해진 그녀는 아직은 따듯한 커피를 홀짝거리며 도서관 주변을 빙 돌며 천천히 걸었다.
반 바퀴쯤 돌고 약간 후미진 건물 모서리를 지나는데 문뜩 인적이 드문 그늘 아래 두 남녀가 보였다.
왠지 눈에 익숙한 것 같은 남녀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맞추었다.
역시나 저 멀리 어둠 속에 익숙한 인형이 보였다.
남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는 분명 나희였다.
먼저 저녁 먹으러 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그곳에 서있었다.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자 자연스레 수진의 눈은 남자를 향해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나희의 앞에 있는 남자도 왠지 눈에 익었다.
응???
저 남자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낯익은 남자의 모습.
어둠에도 눈이 익숙해지면서 나희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얼굴이 확실히 보이자 깊이 묻어두었던 수진의 기억 너머로 남자의 정체가 떠올랐다.
가끔씩 늦은 술자리....
나희를 데리러 나오던 그 남자였다.
앞좌석 차문을 열어주며 나희를 태우던 매너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대치를 하는 듯 떨어져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냉랭하기까지 보였다.
왠지 보기 힘든 그들의 모습에 수진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천천히 벽에 붙어서 다가가자 그들의 모습이 더욱 커지며 말소리가 들리는 듯 싶었다.
살짝 보이도록 얼굴 반쪽을 내밀며 살펴보았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확실한 표정을 읽기는 어려웠지만 이미 한눈에도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순간 나희의 낮고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 일요일인데 가족과 있어야죠. 여기가 있을 곳이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담담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 아내한테는 이혼하자고 얘기했어. 너만 좋다고 하면 이혼서류 법원에 낼 거야."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앙칼진 나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게 소리는 줄이고 있었지만 충분히 그녀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당신보고 이혼하라고 했어요? 이젠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보고 싶지 않으니까 다신 이렇게 나를 찾아오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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