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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화 〉제2부. 13화. 바람이 분다. (4) (133/195)



〈 133화 〉제2부. # 13화. 바람이 분다. (4)

133.

" 나 이제 중간고사 시작되거든..... 이제 시험 공부해야 되서....... "

솔직히....
명록에게 이런 말을 하기 싫었다.

아쉬운 소리도 소리지만  연애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수진이었다.
자신만 조금 더 바쁘게 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예전에 장학금이란 그저 수진의 자기 만족에 가까웠었지만 이젠 꼭 받아야  이유가 생겼다.

지난 주 어느 날 밤....
수진은 자다가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텁텁한 입 안의 느낌과 함께 목이 칼칼했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부스럭 거리며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향해 있는
문을 열고 나가는데 늦은 밤이라 조용히 눈꼬리를 돌렸다.
열려진 문틈 사이로 수진 방의 불빛이 길을 만들었다.


주무시는 부모님이 깰까 봐 조심조심 까치발로 걸어 나왔다.
순간 저편에 그녀의 시선을 잡는 것이 있었다.


또 다른 불빛.
캄캄한 거실 쪽에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안방 열린 문틈으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에...?
아직  주무시나?


매일 일찍 출근을 하는 아빠도, 아빠의 아침을 챙겨주는
엄마도 늘 일찍 일어나야 해서 자정이 되기 전엔 늘 잠자리에 들곤 하였다.
언제나 이시간이면 불이 꺼져 있어야할
안방인데 오늘 따라 늦게 주무시는  같았다.

우선 갈증부터 해소하기 위해 조용히
물을 따라 마시려는데 안방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엄마의 목소리.


수진은 부모님의 대화 중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귀가 쫑긋 서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그녀의 이름을 연신 부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럼... 수진이는 어쩌구요. 대학교도 아직 이년 남았는데, 등록금이 한두 푼이 아니잖우... 그거 말고도 돈 나갈 일투성인데... "



자기도 모르게 안방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벽에 몸을 바짝 대고 서있는 수진은 왠지
몰래 엿듣는 것 같아서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심각한 말투로 말을 잇고 있는
엄마의 목소리가 신경이 쓰여 계속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신경이 온통 안방 안으로 쏠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굵은 아빠의 목소리.



" 김 부장도 작년에 좌천되고 결국 사표를 썼잖아. 이젠  동기들 중에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도 없어. 아마 이제 내 차례기 오겠지... 어떻게 보면 이번 명퇴에 신청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개월 수 관계없이 연봉도 반년 치로 챙겨주고 6개월 치 월급도 더준다고 하잖아... 어차피 써야 할 사표... "

엄마는 조금 다급했는지 아빠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 여보, 그럼... 우선 나도 일자리 알아볼게요... 일단 명퇴는 조금만 더 생각해 봐요... 당신 나이가 지금 몇이우. 회사 나오면 어디 일할 데 구하기도 마땅치 않은데 어디 갈려고 그래요.....? 아직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하고 확실하게 길이 보일  결정을 해야죠... "

" 휴우........ 연봉이랑 급여 모으며 장사라도  수 있겠지. 산 입에 거미줄 칠까. "

아빠의 깊은 한숨과 함께 자신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 에휴... 요새 같은 세상에 장사는 쉬워요? 그리고 당신은 그런 쪽에 경험도 전혀 없잖아요. 여보. 우리 조금만  생각해봐요. 수진이 졸업할 때까지는....... "


명퇴.....
아빠가 명예퇴직을 한다고?


수진은 몰래 엿들은걸 들킬까봐 물도
마시고 못하고 곧바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불도 꺼버리고 잠을 다시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지만
그녀의 머릿 속엔 명예퇴직이라는 단어만 떠올랐다.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

명예퇴직.

수진은 회사원이 아니지만 그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정년퇴직 이전, 조기에 퇴직하는 제도로, 사원의 희망에
따르는 것이 본래의 취지였지만, 사실상 온건한 정리해고와 다를  없었다.

지금 수진은 교내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긴
하지만, 늘 전체 장학금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작년 기말고사 같은 경우는 명록과 시간을 보내느라
이번 학기엔 처음으로 전체 장학금을 놓쳤다.
그리고 부족한 학비는 수진의 아빠 회사에서 내주었다.

그때....
얼마나 부모님께 죄스런 마음이었던가.

그런데 집에서 유일한 수입활동을 하는
아빠가 회사를 그만둔다면 어떻게 될까?
수진의 가족들은 안정적 수입이 끊어진데다가
매학기 사백만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일 년에 두 번이나 마련해야 했다.

 뉴스로만 들었던 남의 일이 그렇게 그녀의 일이 되어버렸다.


수진은 걱정으로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을 해보지 않았다.
간단히 아르바이트도 하곤 그랬지만 그건 방학 때
잠시 해본 것이고 학기 중엔 언제나 공부를 우선하며 보내고 있었다.

돈에 관한 것이라면 언제나 늘 아빠라는 처마 끝에서 비를 피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곧 비를 막아주던 처마가 사라져 버리고
아무런 대비 없이 빗속으로 내동댕이쳐 질수도 있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날 밤 수진은 날이 밝아질 때까지 막막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동이 뜨는 것을 보고 깜빡 잠이 들 때까지 아까 들었던
부모님의 대화는 그녀의 머릿 속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꼬리에 꼬리를 이으며 수진을 괴롭혔다.

물론 그 뒤 조용하신 거 봐선 명퇴를 하신 거 같지는 않았지만
더더욱 좋은 성적으로 전체 장학금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집안 사정을 물론 명록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



오빤 이해해 주겠지...
날...
언제나 이해해주는 사람은 오빠 뿐이야...




이미 작년에 두 번의 시험 기간 동안
군말 없이 그녀를 응원해주던 명록이었다.
학생시절 성적에 대해서도 언제나  관리해야 된다고
말해주던 그였다.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수진을  많이 이해해주던 그의 모습이
언제나 믿음직스러웠다.


자세한 사정은 아직 말  수 없지만,
이번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이해해주리라
생각하며 수진은 운을 떼었다.

그런데.....

그가 의외의 말을 하고 있었다.

" 그냥 저녁때 잠깐만 보면 되잖아...... 꼭 그렇게 보지 말자고 할 필요는 없지 않아......? "

잠깐......?

말은 쉽다.
잠시만 보고 간다.
잠시만 얼굴만 보고 간다.
하지만.....
그게 지켜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명록과 만나면 잠시 이야기하며 같이 있어도 금세 금세 시간이 지나갔다.
오늘처럼 하룻밤 같이 지내는 것도 잠깐 눈감고 떴을 뿐인데 아침이곤 하였다.
주말 하루종일 같이 있는 시간도 짧게만 느껴지는데 과연 잠시만 보고 헤어질 수 있을까?


막상 그녀가 일어서고 싶어도 명록이 잠시만 더 같이 있자고 하면
과연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일어날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렇게 일어선다면 그가 과연 순순히 받아줄지도 의문이었다.


쉽게 승낙할거라 믿었는데 명록이 딴죽을 건 듯한 대답에 더욱 속이 상해오는 수진이었다.



" 치이.... 오빠는 나하고 잠깐만 보고 갈 수 있어? 그리고...... 시험공부할 때는 딴데 신경쓰고 싶지 않단 말이야.......! "




솔직히 말하자면 수진도 명록 말대로 그러고 싶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겐 일분일초가 소중했다.
특히 시험기간이 코앞에 와있는 상황이었다.


아빠의 명퇴 얘기를 들은 뒤 자기라도
꼭 전체장학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초조해졌다.
그전에는 이런 압박감으로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전체 장학금을 받을 거야....
-라는 목표를 세우고 시험 준비를 하진 않았었다.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는 명록을 만나는 이 시간에도
다른 애들은 공부를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렇게 명록을 만나다가는 지난 학기처럼
 전체 장학금을 놓칠 것 같아 걱정도 되고 있었다.
이미 전례가 있으니 생각을 안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실제 그녀의 사정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으니
명록이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믿었던 그가
다른 소리를 하는 것에 수진은 속이 시렸다.
꼭 말하고 싶지 않은 집안 일까지 말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자존심도 상해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나름 이유가 있어서 좀 심각하게 그녀가 말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한 그의 퉁명한 대답에
수진의 기분이 상해서 말을 조절하지 못하고 툭하고 내뱉어 버렸다.

하지만 말을 던지고 나서 수진도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딴데라니.....
왜 그렇게 말했지....?
오빠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아이참......

그녀가 속으로 발을 구르는 동안 아니나 다를까
명록의 얼굴이 굳어지며 입을 열고 있었다.


" 그냥 잠깐만 보려면 보면 되지 머. 나도 공부하는 너를 길게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난..... 네가 보고 싶을 때 참기 힘들던데.....  전혀 아닌가 보다.....?! "



분명 그의 말투가 평상시와 달랐다.
그 말을 듣자 수진은 완전 기분이 상해버렸다.

" 그...그런 말이 아니잖아! 사실 오빠하고 있음 나도 놀고 싶은걸. 하지만 그러다 보면 전혀 공부할 시간이 없어.... 알잖아. 오빠도...... 그렇게 당일치기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오늘 오빠.... 이상해...... 평상시 언제나 나한테 그랬잖아...... 대학 때 성적 잘 받아야 된다고.... 그렇게 말한 건 오빠 아냐? 근데 오늘.... 왜...왜 그래? "

왠지.... 넌 나보다 성적이 중요한거 같으니까 그렇지..... 수진이 너.... 시험이 더 소중한 거 아냐? "


아니나 다를까 명록의 말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처음 그가 말했을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수진은 놀랬다.
명록이  정도까지 말을 할 줄이야.
대화가 점점 선로를 벗어나 뜻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느끼며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명록에게 회사가 있듯이 수진에겐 학교가 있었다.
그도 회사일 때문에 야근을 하고 출장을 가면
수진은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아쉬운 마음으로
짧은 시간을 그를 만나곤 했었다.
아니 못 만날 때도 억지로 참으며 기다리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자신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일과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그리고 또 나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명록의 모습도 좋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명록은 그녀의 학업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와락 쏟아낼  같은 기분으로 수진은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오빠는...... "



오빠....는
날  정도 밖에 생각하지 않는 거야?



그녀의 미래는 관심도 없이 자신 만을 바라보길 원하는
명록의 모습에 수진은 크게 실망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배려는 온데간데 없고
자신도 그와의 시간을 줄이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이 싫은데 위로는 하지 못할망정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서운함이 화로 바뀌며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담아 있는 대로 입에서 튀어나가려는 말을 간신히 씹어 삼켰다.
억지로 먹기 싫은 음식을 삼키듯 침을 한 모금 넘기고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대로 명록과 대화를 한다면 큰 싸움으로 이어질 게 뻔해 보였다.

나도 시험기간에 오빠 안보는 게 좋은 줄 알아?
돈 때문에 장학금 받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싫단 말이야.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면  돼?
왜....
왜 그렇게밖에 말을 못해.....!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자신만 생각하는 듯한
명록의 말에 자꾸만 분하고 서운해서 눈물이  거 같았다.
그의 얼굴을 보거나 품에 안겨 있기조차 싫어 웅크린 채 등을 돌려버렸다.


 뒤에서 명록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한참 지난 뒤 그도 부스럭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다시 한 번 실망감을 느끼는 그녀였다.
응당 그가 잘못했다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명록이 그냥 누워버리자 더욱 마음이 시큰거리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최악의 밤.
그와 만나면서 이렇게 마음 상해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았다.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 둘의 숨소리 만이 들렸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눈을 감은 채 수진은 혼자 마음 속으로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삭이며 그에 대한 서운함을 달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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