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제2부. # 12화. 봄비는 벚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11)
129.
명록은 그녀가 삼켜버린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언제나 시원시원한 성격의 수진이었다.
이렇게 말하려다가 삼키는 건 그녀답지 않았다.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입을 열었다.
" 흐음..... 뭐 말하고 싶은 거 있어? 하하.... 왜 갑자기 말을 가리고 그래? 하하하. "
장난스럽게 웃는 그의 말에 수진이 발끈해서 말했다.
" 아...아냐! 치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말을 막하는 거 같잖아..... 치...... "
" 하하...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뭐 말하고 싶은 거 있음 말해..... 잘못했으니까 어떤 거라도 들어줄께. "
" 엥? 머 해달라고 그러는 건 아니야. 그게 아니라...... "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려다가 말았던 것으로 생각했는데
수진은 뜻밖의 얘기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로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잠시 눈을 좌우로 굴리더니 마침내 다시 말을 이었다.
" 저기..... 또 하나 오빠한테 미안한 게 있어. "
" 응? "
수진은 침을 한 모금 삼키더니 어렵게 입술을 열었다.
" 나..... 오빠가 바람피운다고 생각했거든...... "
순간 명록의 마음이 살짝 시큰하며 시려왔다.
하윤과의 시간을 은연 중에 즐기던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수진은 발끝으로 땅을 톡톡 차며 말을 이었다.
" 오해라고는 하지만...... 내가 오빠를 못 믿었잖아...... 그래서..... 미안해. "
말을 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고 있는
수진을 보고 있자니 명록은 왠지 더 모를 미안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
그는 왠지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되는 것이 싫어서 말을 돌렸다.
" 아냐.... 내가 오해하게 했잖아. 그나저나 영연이...... 화내니까 완전 무섭더라..... 하하..... 영연한테 그런 면이 있을지 몰랐어. 하하...... "
명록의 말에 수진은 풋 소리 내며 웃었다.
" 후후.... 그러게 말했잖아. 영연 걔 남자한테 완전 내숭덩어리라니까. 후후후. 오빠 많이 놀랐구나? "
수진은 그의 옆에 껴서 팔짱을 꼈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의 탄력이 팔에 가득 느껴졌다.
" 그래도 나름 착한 친구야. 아마..... 전 남자친구가 바람피운 일이 있어서 더 화를 냈을지 몰라. 그러니까 나중에 봐도 어색하게 대하면 안 돼..... 알았지? "
" 하하.... 그래, 알았다. "
그렇게 둘은 몸을 밀착시킨 채 벚꽃이 가득 피어있는 나무 사이를 걸었다.
명록은 살짝 옆을 보니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수진의 얼굴이 보였다.
행복에 젖어있는 듯한 표정.
어찌 됐든 그녀가 그렇게 조르던 벚꽃 구경을 이렇게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여의도 공원에서
갑자기 그녀와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녀가 원하던 소원도 같이 들어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줄 확률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수진과 그간 보냈던 시간을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순간 몸이 뒤로 끌리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니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명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참..... 오빠 우리..... 여기서 같이 사진 좀 찍자. "
" 엉? 아.... 그래. 나무에 서봐. 내가 찍어줄께."
" 아..아니. 후후..... 어렵게 왔는데 우리 같이 사진 찍었음 해서. "
수진은 아무래도 함께 같이 사진을 찍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요새 같이 사진을 찍은 게 언제인지 싶었다.
이 시간을 사진에 남기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여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는 씩 웃고는 바로 앞에 지나는 커플에게 바로 다가갔다.
" 저...저기 죄송한데 사진 좀 찍어 주실래요? "
여자는 이런데 강한 걸까?
모르는 타인에게 무언가 묻거나 부탁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게 아닌데 수진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연인들은 서로 통하는 건지 남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수진이 내민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 고맙습니다. 여기 누르시면 되요. "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바로 쪼르르 명록 옆에 와서 서는 수진이었다.
팔짱을 끼고 살포시 어깨에 기대서는 그녀를 보고는 휴대폰을 들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찍을게요. 하나. 둘. 셋! "
카운트에 맞춰 명록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김~치
찰칵!
휴대폰에서 사진 찍는 소리가 들리고 수진이 달려가 휴대폰을 받아왔다.
고마운 남녀는 킥킥 웃으며 명록과 수진 곁에서 떠나가고
둘은 그들이 멀어지자 바로 액정을 찍어 찍힌 사진을 보았다.
작은 화면에 잘 보이지 않아서 줌을 하자 두 사람의 얼굴이 크게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 약간 어색해 보이는 미소의 명록과 환하게 웃고 있는 수진의 얼굴.
역시 사진 속에서도 빛이 나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수진은 조금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 아.... 역시 사진기가 아니라서 좀 흐린 거 같아.... 흐음..... "
" 넌 예쁘게 잘 나왔는데 머..... "
" 에이.... 아냐. 역시 밤이라 휴대폰으로는 잘 안 찍히는 거 같아. 아깝다. 사진기를 가지고 올 걸. "
속상해하는 듯한 그녀를 보자 명록은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말을 꺼냈다.
" 우리 그럼 낮에 다시 올까? 내일은 금요일이니까 힘들 거 같고 토요일 날 다시 오자. "
그의 말에 수진이 놀라며 말했다.
" 토요일에? 사람들 엄청 많을 텐데......? 오빠 지난 주도 쉬지 못했잖아. 많이 피곤 할 텐데...... "
명록은 살짝 주변을 훑어보았다.
밤이 깊어서 사람들도 많이 줄어있었다.
가까운 곳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수진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명록의 포옹에 놀라며 수진이 화들짝 놀랬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는 앙탈부리지 않고 속삭였다.
" 오빠... 갑자기 왜 그래? 짐승 같아. "
명록은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하나도 안 피곤하거든? 우리... 오늘 같이 있을까? 설아 말대로? "
순간 수진의 얼굴이 빨개졌다.
설아가 남기고 간 말이 다시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안고 있는 그녀의 몸이 왠지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눈을 내리깔며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보자 명록의 마음도 같이 달아오르는 거 같았다.
품 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몸이 부드럽고 풍만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귓불에서 열기가 뿜어지는 거 같았다.
**************
쏴아아아.....
강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수진의 긴 머리칼이 휘날리고 벚꽃 잎들이 흩어져 날리기 시작했다.
까만 밤.
그 검은 배경으로 하얀 꽃잎들이 화려하게 날아가더니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며 다시 땅으로 내리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수진은 그간 오랜 세월동안 품었던 하나의 로망이 이루어져 행복했다.
사랑하는 명록과 함께 올해의 벚꽃을 온몸으로 가득 느끼고 있었다.
가까이 명록의 심장고동소리를 들으며 품에 안겨 있는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했다.
낮의 벚꽃도 아름답다.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토요일에 같이 와서 꼭 보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일 년 뒤 아니 이 년이 흐른 뒤에도 명록과 자신은 늘 함께 있을 테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한낮에 보는 벚꽃의 아름다움은 내년의 즐거움으로 미뤄두는 것도 로맨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봄.
낮은 따듯했지만, 해가 진 밤은 아직 동장군의 손끝이 채 다 지나지 못했다.
겨울을 머금은 찬바람이 불어오며 벚꽃나무를 세차게 흔들곤
장난꾸러기 찬바람이 수진의 긴 머리칼을 들추고 지나갔다.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벚꽃 잎들이 흩어져 날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밤은 어둡지 않다.
벚꽃 잎들이 해끗대며 날리는 모습이 불빛 아래에서 더욱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명록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이대로 그와 같이 밤을 보내고 싶었다.
오빠.....
수진은 작게 속삭이며 그의 가슴 안으로 파고들었다.
**************
토요일 아침이었다.
명록은 수진과의 데이트를 위해 일찍 일어났다.
어제 금요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벚꽃 구경을 하며 긴 거리를 걷기도 했지만
그 뒤 수진과의 시간이 분명 몸에 무리를 준 것이 분명했다.
명록은 크게 하품을 하며 찌뿌둥한 몸이 뚜두둑 소리를 냈다.
어제도 웬만하면 같이 벚꽃 구경을 위해 가고 싶었으나 일찌감치 봄비가 내렸다.
장마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는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내렸다.
비도 내리고 축척거리는 거리를 보며 오늘은 꽃구경은 틀렸구나
생각하는 가운데 수진도 어제는 피곤했는지 오늘 토요일의 약속을 기약하고 일찍 집으로 들어갔다.
명록은 깔끔하게 차려입고 거리로 나섰다.
수진을 만나기 위해 도로를 걸어가는데 가로수로
심어놓은 벚꽃이 하룻밤 사이에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서있었다.
갑자기 옷을 벗어버리고 겨울을 맞은 듯 헐벗은 벚꽃나무를 보니 명록은 마음이 싸해졌다.
목요일 밤 그렇게 수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올해 그녀와 함께 벚꽃을 보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랬다면 일 년 수진에게 잔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
아니 그녀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며 달래느라 진땀을 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나.....
승필 선배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날 저녁에 있었던 해프닝을 생각하면 뽀드득 이를 갈아야 할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벚꽃나무들을 보며 감사해야 된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었다.
명록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오늘은 오랜만에 같이 바다를 보러 갈 작정이었다.
벚꽃을 보면서 생각해보니 같이 사진도 찍고 바닷바람 쐰 지도 너무 오래된 거 같았다.
극장, 카페, 레스토랑, 그리고 모텔.
이런 곳에서 벗어나 멀리 그녀와 같이 여행을 가볼 작정이었다.
홈쇼핑에서 산 디지털 카메라가 든 가방을 어루만지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침 바람이 왠지 더 싱그럽게 느껴졌다.
역시 비온 뒤라.....
도시의 공기도 상쾌함을 전해주고 있었다.
**************
명록을 만나기 위해 버스에 오른 수진이
차창 밖 뒤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를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려하게 피어 있던 벚나무였다.
한나절 내렸던 비에 이토록 애처롭게 보이도록 헐벗은 나무가 너무 가엽게 보였다.
봄은 아이처럼 변덕스럽다.
화사함으로 물들었던 따스한 기운을 하루라는
짧은 시간 만에 지워버리고 한차례 내린 봄비가 세상을 가득 덮었던 벚꽃을 모두 훔쳐가 버렸다.
그 덕분에 눈송이처럼 하얀 벚꽃을 무겁게 매달고 있어야 할
벚나무는 가벼워진 가지를 하늘하늘 흔들고 있었다.
봄비는 어떤 이에겐 겨울부터 이어진
건조함을 촉촉이 적셔줄 단비겠지만 지금 수진에게 아쉬움이었다.
하아....
그래도....
벚꽃이 지기 전에 오빠랑 데이트를 해서 다행이야.
그 날이 아니었으면 올해에 벚꽃을 보며 데이트를 하진 못했을 테니.......
수진은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순간 그날 찍은 사진이 보고 싶었다.
저장된 두 사람의 사진.
행복함을 담고 있는 그 순간의 시간이 담겨 있는
사진을 열어서 보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벚꽃.
어쩌면 그 날의 데이트도,
휴대폰 속 단 한 장의 사진이 아니었다면
꿈이라고 치부해도 좋을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으로 남자친구와 같이 한 벚꽃구경.
결국 함께 천천히 거닐며 꽃구경도 하고 둘만의 사진도 찍었다.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시간이었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름다운 비눗방울처럼
톡하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내년 봄에도 같이 오빠와 구경했으면 좋겠다.......
그땐 제대로 된 사진기를 들고 가야지.....
사진도 많이 찍고....
천천히 팔짱 끼고 다시 벚꽃나무 아래로 걸어보고 싶어....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자신과 명록 주변으로 흩어져 내리던 벚꽃 풍경이 떠올랐다.
야경 속...
빛나던 그 시간.
그 순간을 내년에도 함께 하고 싶었다.
어느덧 햇볕이 차창 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며 휴대폰 액정에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사진 속 그녀의 얼굴처럼 행복함이 담겨 있는 수진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명록과 있다 보면 그녀는 자꾸만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을 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을 해도...
늘 그녀가 상상하는 그 시간......
수진의 옆엔 명록이 함께 서있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걸까?
휴대폰 속 웃고 있는 명록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수진은 첫사랑을 하는 소녀의 수줍은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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