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제2부. # 12화. 봄비는 벚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10)
128.
뜨거운 밤이라는 설아의 발언에
얼굴이 금세 빨개진 수진은 잡았던 나희의 팔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내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하는 설아를 쫓아
나희와 영연도 내일 보자~! 라는 말을 남기며 서둘러 그들 곁에서 멀어져갔다.
벚꽃이 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지는 가운데 어느새 둘만 서로를 보며 서있었다.
온통 얼굴이 빨개진 수진.
명록은 설아의 마지막 말에 자신의 귓불도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밤.....
침대....
" 흠흠....!!! "
명록은 헛기침을 하고는 수진의 손을 잡고 말했다.
" 그...그럼 우리 가볼까? "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작게 외쳤다.
" 어...어딜 가자고.....! 여..여긴 모텔도 없지 않아?! 온통.... 아파트 뿐이잖아......"
그녀의 말에 순간 명록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수진도 설아의 마지막 말에 자신처럼 온통 같은 생각에 빠져있었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그간의 일들이 사라지며 크게 웃었다.
" 하하하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하하......"
갑작스런 명록의 웃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수진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빠르게 말했다.
" 왜.....왜 웃고 그래! 나 아직 화 다 안 풀렸어! 흥! "
순간 빠른 걸음으로 나가려는
수진의 몸놀림에 명록은 더 빠른 속도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몸 쪽으로 당기며 와락 껴안았다.
아직 사람들이 붐비는 공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품에 안긴 수진이 발버둥 치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명록은 더욱 힘주어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 왜.... 승필 선배도 봤잖아. 이제 오해도 다 풀렸는데 왜..... 화가 안 풀렸는데? "
웃음기 가득 담은 채 물어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수진이 그의 가슴을 밀치며 중얼거렸다.
" 그...그래도 흥!!! 다른 여자와 벚꽃 구경하고 있었잖아! 나.....나랑은 오지도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아직도 화를 내는 것처럼 투정은 부리고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절박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명록은 그런 수진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 하며 속삭였다.
귀여운 그녀의 자존심을 토닥거리며 안아주었다.
" 미안해..... 나도 여기로 올 줄은 몰랐어. 나도..... 여기 오니까.... 네 생각 많이 나더라. 내일은 꼭 같이 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
수진은 그의 말에 밀치던 손에서 힘을 빼고 명록을 올려다보았다.
명록의 부드러운 시선.
그의 단단한 팔뚝.
그리고 가벼운 입맞춤.
둘이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명록은 개의치 않은 채 수진의 눈동자 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수진도 부끄러움을 잊고 명록만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나직하게 물었다.
아직 딱딱한 듯 말했지만
그 안에 아까와는 다른 감정이 녹아 있었다.
" 내 생각을 하긴 했어? 치이..... 거짓말...... 하윤....이라고 하던 여자랑 신나서 놀고 있었던 거 아니고? "
수진의 질문에 명록은 마음 속 한구석에서 찌릿 하는 가책을 느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할 때는 전혀 못 보던 모습을 보여주던
하윤과 함께 있던 시간이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색다른 그녀의 매력.
하윤의 미소가 약간의 흔들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남기고 간 한마디가 다시 떠올랐다.
" 분명 약속하신 거예요? 그 말 책임 지세요? 후후후.... 나중에 한턱 제대로 얻어먹을 테니까 그때 가서 딴말하기 없기에요. 후훗. "
그 말 만을 남긴 채 장난스럽게 웃으며 돌아서던 하윤의 뒷모습.
찰랑거리며 물결을 그리던 그녀의 웨이브진 갈색 머리카락이 선명하기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지워버리고 표정을 관리하며 명록이 서둘러 답했다.
" 아...아냐. 내가 이렇게 예쁜 너를 두고 내가 무슨..... 신날 리가 없잖아..... 수진이 네가 없으니까 벚꽃도 별로 보고 싶지 않더라...... "
약간의 거짓말.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직 만이
가장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던
어떤 이의 말을 떠올랐다.
사실 사회생활하면서 명록 또한 그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적당한 거짓말.
다독이는 약간의 꾸밈은 인간관계를 부드럽고 돈독하게 만들었다.
명록은 이 정도의 거짓말은 괜찮을 거야....
자신을 다독이며 수진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수진은 여전히 치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는 어느새 살짝 초승달을 그리고 있었다.
" 거짓말..... 이제 오빠도 순 능구렁이 같아. "
입술이 오므라들었다가 다시 펴졌다하는
수진을 보면서 명록은 다시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가벼운 뽀뽀.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거짓말....
능구렁이......
아마 수진은 그냥 입버릇처럼 내뱉은 말이었을 거다....
하지만....
명록의 가슴 속 숨겨둔 작은 거짓말을 보았다면
이렇게 장난스럽게 얘기를 할 리는 없으리라.....
가끔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세상에 대한 글이 생각나곤 하였다.
누군가의 마음 속을 보지 못해서 답답하던 시절.
옛날 학창시절......
좋아하던 그녀의 마음 속에 나의 위치는 어느 정도 될까.....
궁금함과 함께 들여다보고 싶어서 미칠 거 같던 시간에는
타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던 거울이 너무도 가지고 싶었다.
아니....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세상에 대해 동경을 가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이 되자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세상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수진이라도.....
얼룩진 자신의 마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마....
수진도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는...
그런 마음도 가지고 있으리라.
명록은 팔을 풀고 수진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잡아끌었다.
어느새 양손바닥이 서오 맞닿으며 이어졌다.
그렇게 그녀의 손을 잡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 우리 좀 시간이 늦었지만...... 벚꽃 구경하러 가자. 이렇게 만나서 차라리 다행이다. 너와 이렇게 벚꽃 구경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하...... "
수진은 아직 붉어진 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걱정스런 말투.
평상시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 오빠... 피곤하지 않아? 요새 계속 야근했잖아....... "
그녀의 말에 힘을 얻은 명록은 좀 더 크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 네가 있잖아. 하하.... 전혀! 안 피곤하다. 널 보니까 피로 그딴 거 싹 가시는 거 같아. 하하! "
과장스럽게 웃으며 으쓱거리는 명록을 보자
수진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피이.... 허풍쟁이...... "
하지만 이내 그의 팔짱을 끼며 수진이 머리를 명록의 어깨에 기대며 속삭였다.
" 후후.... 그래도..... 정말.... 오빠랑 같이 구경하고 싶었어..... 피곤해도 같이 있어줘? 알았지.....? "
명록은 그런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옆으로 기대며 말했다.
" 안 피곤하다하다니까..... 그러니까 같이 구경하자고 하지. 너하고 천천히 올해 벚꽃 구경 제대로 하고 싶어. 나도...... "
잠시 기대고 있던 둘은 그렇게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서있었다.
**************
밤이 깊었지만 여전히 벚꽃이 하나 가득 피어있는 가로수 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물론 명록이 처음 왔을 때보다는 사람들이 줄어있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시간을 생각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가로등 아래 하얀 송이송이 핀 벚꽃을 보며
봄의 향취를 즐기는 중이었다.
그 아래를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거닐고 있는 명록과 수진이 있었다.
뜰을 산책하듯 바람에 날리는 꽃잎을 보며 천천히 걷는 중이었다.
" 오빠....? "
잠시 가졌던 침묵을 깨고 수진이 입을 열었다.
" 응? "
머뭇거리며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오빠.... 미안해...... "
미안하다니......
뭐가?
" 응??? "
명록은 갑작스런 그녀의 사과에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진이 미안해할 일이 뭐가 있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오해를 하게 만든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사과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수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다시 말했다.
" 회사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오빠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싶어서..... 아까.... 미안해....... "
하긴 방명록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다짜고짜 부르기도 했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냥 이름을 바로 불렀을까?
왠지 그때의 수진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화가 나면 수진도 이런 모습도 있구나....
싶어서 자신이 모르는 수진의 다른 얼굴을 본 듯한 뿌듯함이 있었다.
하긴 잘 수습되지 않았을 때를 생각하니 그리 웃을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디서 남자와 여자는 연애를 하면서
아무리 나이 차가 있더라도 나중에 결국 친구처럼 된다는 말이 생각났다.
정말....
시간이 지나면 수진과 반말을 섞어가며 싸울 일도 있을까?
왠지 가로등 불빛 아래 보이는 그녀가 더 앳되게 보였다.
이런 수진과 야야 하면서 말다툼할 미래를 생각하니 다시 웃음이 번졌다.
칠년 아니 팔년이란 세월의 차이가 어느새 동급으로 되는 순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생각만 해도 코웃음이 새어나왔다.
순간 수진의 토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 치.... 남은 힘들게 미안하다고 하는데 왜 웃고 그래? 오빠.... 지금... 되게 얄미운 거 알아? "
명록은 그런 수진을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어리게 보는 거 같아서 싫다고
머리를 도리질 칠 수진이 웬일인지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아드리고 있었다.
뚱한 표정으로 있는 수진의 표정이 뭐라 말할 수 없이 귀여웠다.
예쁘기도 하지만 역시 아직 나이가 어린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싱그러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명록은 부드럽게 말했다.
" 미안...미안..... 네가 미안할 게 머가 있어..... 내가 잘못한 거지..... 미안해 하지 마...... "
순간 수진의 얼굴이 쭈삣거리며 입술이 달싹거렸다.
분명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삼킨 듯한 모습이었다.
명록은 궁금함에 눈을 크게 꿈벅였다.
으응?
또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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