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제2부. # 12화. 봄비는 벚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8)
126.
허걱!!!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여자 목소리에
찔끔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순간 한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빛으로 자기를 쏘아보는 그녀.
산중 제일 가는 맹수 호랑이의 사나운 눈도 한수 접고 들어갈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동자!!!!!!!!!!!!!!!!!!!!!
허억!!!!
수...수진이!???????????????
아까 잘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서둘러 승필 선배에게 돌아가서 사온 것을 넘겨주고
바로 잽싸게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딱 여기서 그녀와 마주칠 줄이야!
벚꽃구경을 그렇게 오고 싶어 했던 수진한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하윤과는 거리가 떨어져서 지금 그의 곁에 없다는 것이었다.
제발 수진과 자신을 보고 그냥 승필에게 돌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 오빠... 일한다며? "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그중 더 섬찟한 것은 수진의 목소리 가운데....
은은하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그마의 열기가 폭발 직전의 압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 아... 그게....."
명록은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려는데
딱히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라 어물어물 뒷말을 삼키고 말았다.
하필 수진과 마주치다니......
아니 그녀와 같은 벚꽃 축제장을 오게 된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승필 선배의 마수에 빠진 순간
수진에게 미리 사정을 말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머뭇거리며 미리 전화로 말하지 못한 게 잘못이었다.
아까 수진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제대로 말을 못한 게 후회막급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간으로 날아가버리고 싶었다.
" 여기가 회사야? 일 한다며?!"
그사이 다시 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단히 오해를 했는지 수진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명록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있는
모습에 눈물이 살짝 고인 듯 젖어있는 것을 보자 더욱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몸이 굳어져 갔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될까?
승필 선배?
그런 아까 통화할 때는 왜 말 안했냐고 하면......
잠깐......
설마......
하윤 씨와 같이 있었던 것도 본건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지금 저렇게 화가 난 이유가 딴 여자와 같이 있는 자신을 본거라면
더더욱 어떻게 풀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반드시 말해야했다.
제대로 차근차근 설명해서 이 엄청난 오해를 풀어야 했다.
이대로 있으면 일이 더욱 커질 게 뻔했다.
" 수진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어느새 그녀의 뒤로 친구들이 몰려와 있었다.
영연, 나희 그리고 설아.
수진의 응원군까지 서슬푸르게 등장하자
명록의 어깨가 순식간에 반쪽으로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평소 애교 많던 영연이었는데 지금은 웃음기 하나 없었다.
아니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눈매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었다.
그건 뒤에 서있는 나희와 설아도 마찬가지였다.
따듯한 봄날이 순식간에 한겨울 시베리아 벌판으로 바뀌었다.
그 옛날 수진이네 집에 놀러갔다가 급하게 숨었던 베란다가
인생 최고의 살벌했던 추위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시간을 갱신하면 당당히 일등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과 함께 맹추위가 느껴졌다.
수진과의 통화 중 친구들과 같이 놀고 있다고 하더니
그거 하나만은 확실히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아..
제발 오해하지마....
승필 선배가 꾸민 일에 나도 휘말린 거야.....
나도 오늘 여기에 올 줄 몰랐어.
그리고 아까 내 옆에 있던 여자는......
여자.....
아직 하윤에 대해 수진이 말도 안했는데 먼저 얘기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승필 선배가 여직원들을 고셔서 놀러왔다는 얘기도 안 해도 된다는 얘기였다.
차라리 다른 핑계를 댈까?
뭐라고 말하면 괜찮을까?
여자와 같이 있었던 나를 못 봤을지도 몰라.....
단순히 벚꽃 축제에 같이 오지 않고
지금 여기에 내가 있는 것을 화내는 건지도.....
근데 손에 들고 있는 이건 뭐라고 설명하지?
명록의 머리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꼬이면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화려한 영업멘트를 만들어내던 그의 머리가
순식간에 에러가 난 컴퓨터처럼 아무 것도 출력하지 못했다.
삐삐삑...
삑삑...
에러 메세지만 가득 머릿속을 채워버렸다.
순간 수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 왜.... 왜 말을 못해?! 왜! "
덜컥.....
그녀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저 멀리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명록씨....? 명록씨 뭐해요 여기서? "
으악!!!
하필 이때에......!!!
하윤의 목소리.
그리고 이내 그녀가 사람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최악의 순간.
최악의 시간에 그녀가 나타났다.
검은 봉지를 들고 명록 곁으로 다가오자
수진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떨어질 거 같은 표정으로 앙칼진 목소리가 바로 터져 나왔다.
" 오빠.... 이래도 변명을 말할 셈이야?! "
헐....
천둥번개소리가 이보다 더 클 수 있을까.
그렇게 크지도 않는 수진의 목소리였는데
지금 명록의 귀에는 이 세상 어느 것보다
더욱 크고 더욱 매서운 목소리가 되어 짱짱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결국 인파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온
하윤 덕분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느낌이었다.
아니 이미 수진이 명록을 발견하고 만난 그 순간부터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시간이었다.
꿈이었다면 이쯤에서 깨어나고
안도의 한숨을 쉬어도 좋으련만 이건 엄연한 현실.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명록은 우선 승필 선배가 데리고 나온 일부터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하윤과 같이 벚꽃 구경을 하며 느꼈던 시간을 생각하면
그 역시 마음에 찔리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는 벌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며 말했다.
" 아니 그게......"
순간 옆구리에 누군가 쿡 찌르는가 싶더니 하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에요? 이 분은...?"
하윤이 그의 옆에 서서 입을 여는 순간
수진의 얼굴 표정이 더욱 굳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붉은 기운이 싹 사라지고 하얗게 질려 있는
그녀의 얼굴이 무서운 것을 떠나서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명록도 그녀의 등장이 수진에게 더욱 안 좋은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미 수진 뒤에 서있는 세친구들의 눈도 완전 도끼눈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그럼 당신은 누군데요? 남이 누군가 묻기 전에 자기가 누군지 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니에요?"
날카롭게 울리는 영연의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수진이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친구인 그녀가 먼저 나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윤은 갑자기 자신에게 네 명의 여자들이 보내는 시선이
왜 이리 사납고 공격적인지 알 수 없다는 듯
찬찬히 바라보고는 다시 명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그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하긴 졸지에 휘말린 하윤이 무슨 죄가 있으랴.....
이런 상황으로 만든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자신의 탓인 것을......
명록은 수진의 손을 잡고 비분강개하는 영연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아... 영연아... 먼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이 분은....."
더듬거리며 그가 말을 꺼내자마자 영연이 바로 쏘아붙였다.
" 오빠! 지금 저 여자 편드는 거예요?! 오빠는 수진이도 안 보여요? 어떻게 딴 여자 편을 들 수 있는 거예요?! 네?!!! "
허억!!!
영연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명록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언제나 생글거리며 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말을 하던 그녀였다.
이미 도끼눈을 하고 보고 있는 얼굴도 낯설은데
이렇게 날카로운 칼과 같은 말은 쏘아붙일 줄 아는
여자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전 남자친구와 오랜 시간 사귀었었는데
결국 남자가 바람을 펴서 헤어졌다는 얘기를 수진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믿었던 남친에게서 받은 상처가 마음에 아로 새겨져 있어서인지
지금 이 상황이 수진을 대신해서 더욱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벚꽃 구경을 하며 지나던 인파들이 힐끔힐끔 자신들을 보며 주변에 슬슬 모이는 것이 보였다.
하윤과 명록 자신.
그리고 수진을 비롯한 네 명의 여자.
서로를 바라보며 대치하는 듯한 모습이
분명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명록은 우선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것이 창피하기도 했지만
수진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하기에도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자리를 피해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수진아..... 우선 우리 다른 곳에 가서 이야기하자...... 여기서 우리 이러지 말고...... 흠.... 내가 다 말해줄께....."
그러나 수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살짝 젖은 눈망울을 한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옆에서 서있던 하윤이 그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 그래요. 우선 자리를 옮겨서 얘기해요. "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수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그 옆에 친구들도 더욱 사납게 하윤을 쏘아보고는
수진의 옆에 가까이 붙어서 소곤대고 싫은 듯 뿌리치려는 그녀의 손길을 잡고
서서히 발길을 이끌고 있었다.
어찌됐든 걸음을 떼는 수진을 보며 명록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는 하윤이 그를 보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왠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에는 웃음이 섞여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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