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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화 〉제2부. 12화. 봄비는 벚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2) (120/195)



〈 120화 〉제2부. # 12화. 봄비는 벚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2)

120.



하아...


생각만으로도 한숨이 나오는.....
그런 인파 터지는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수진과 함께 단둘이 모텔에서 오붓하게 보내고 싶었다.
둘이서 알몸으로 누워서 서로를 느끼며 보내는 게 더 좋았다.


단순히 섹스를 하기 좋다....는 의미보다는
같이 체온을 느끼며 쉴 수 있는 시간이 그가 더 원하는 바였다.


거기에다가.....
4월이 시작되면서 갑작스럽게 몰려든
회사의 일거리들이 그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난주는 주말마저 출장으로 날려버려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번 주를 맞이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일이 바빠지면서 퇴근 후 수진도 볼 새가 없었다.
밤에라도 잠깐씩 보곤 했는데
이젠 그 " 잠깐 " 이라는 시간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갔다.


그런데 그 와중에 만나서 벚꽃 구경이라니.....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진은 연신 명록에게 벚꽃 구경을 졸라대고 있었다.




같이 꼭 보고 싶어.
오빠하고 같이 걸으면서 벚꽃도 보고......
사진도 찍고 싶고 그래.....
가자....
응?
오빠~~



전화 통화를  때마다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끈질긴 요청사항......


휴우.....
쩝......

명록은 새삼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아마 오늘은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게 문자에서 느껴졌다.

퇴근하고 찾아오겠다고 하고 있는
수진의 문자 메시지에서 그녀의 강렬한 포스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기획건 막바지라 오늘도 야근이 예정되어 있었다.
승필 선배와 같이 진행하는 건이라 한참 빡시게 일하는 중이었다.

악마 같은 승필 선배의 착취가 하늘을 찔렀다.
아마 조선시대...
아니 과거 어떤 시대의 소작농도 이렇게 부려먹었다간
바로 민란이라도 일으켰을 강도의 노동을 강요하고 있었다.


멀리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방명록! 오늘은 거래처 가야하니까 퇴근은 늦을 줄 알아. 그리고 4시쯤 나갈 테니까 사무실에서 해야 할 일은 미리미리 해둬라. 나중에  소리 하지 말고. "

으으.....
요새 왜 저리 일을 열심히 하지?
평상시 농땡이 치면서 만만디(慢慢的)의
날라리니나노 선배 답지 않는  근로의욕은 대체 뭐야!?????




멀리 보이는 승필 선배는 휘파람을 부르며 서류를 챙기고 있었다.
활기찬 그의 모습에 밝은 목소리.
명록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저럴 때마다 귀찮은 일이 딸려오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예정대로 야근 확정이었다.
거기에다가 외근까지.....
역시 부려먹을 사람으로 자신이 내정되었을 때부터
고생길이 활짝 열렸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죽었다를
열댓번은 복창해야 할 판이었다.

명록은 한숨을 쉬며 문자메시지를 작성했다.


[나 외근에 야근까지 있어. 오늘 퇴근 언제 할지 몰라. 벚꽃놀이는 담에 가자.]


전송.


평소 같으면 바로 답문이 올 텐데 수진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저 편에서 그녀의 실망이 전해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한참 뒤에 도착한 메시지.

[ 응.]

딱 한 글자였지만....
그 한 글자에서 느껴지는 수진의 감정은 충분히 전해왔다.
실망하면서 거친 숨을 내쉬는 그녀의 얼굴이 함께 수신된 느낌이었다.
역시나....
오늘은 꼭 가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휴우우우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자 친구를 사귀다보면 따라서
당연히 귀찮아도 해야 할 일이 생기는 법이라고....
승필 선배가 누누이 얘기하고 했었는데 그게 이제서야 공감이 되었다.
아무래도 한번은 가야할 거 같았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진을 떠올리며
내일은 어떻게 하든 꼭 같이 가야겠다 생각하는 그였다.


어찌됐든 오후에 나가려면 서둘러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마무리 져야했다.
식어서 쓴맛만 나는 자판기 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컵은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애꿎은 종이컵만 처참한 꼴로 찌그러져 사라졌다.
그러나 그런 종이컵에게 애도의 마음 따위 표할 여유 따위 명록에게 있을  없었다.
곧바로 모니터에 머리를 처박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바쁘게 놀리기 시작했다.



**************





명록을 만나기 전에 집에 들러서
어떤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까 고민하며 즐거워하고 있던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도 갈수 없다는 명록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설레고 있던 수진의 마음이 찬물을 맞은 듯 단번에 사라져버렸다.




설마......
나랑 벚꽃놀이 가는 게 귀찮아서.......
외근 나간다고 거짓말 하는 건 아니겠지?


명록이 그럴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알고 있지만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망상일 뿐.
그동안 명록이 그녀를 속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회사 일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있어서 어쩔  없는 불가침구역이었다.
명록은 사회인, 일에 관해선
그도 어찌  수 없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미 그건 작년 연말에 몸으로 체험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섭섭한 마음이 불쑥불쑥 드는 건 어쩔  없는 일이었다.
명록이 의도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자신이 화났음을 알리고 싶은 작은 심술이 꿈틀거렸다.


[ 응. ]

수진은 짧은 문자를 보내곤 짧은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가기가 힘든 거야...
그냥.....
꽃구경하러 가는 것일 뿐인데.....




일 년의 기다림,
그녀는 명록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수진이 그렇게 읽어왔던 할리퀸 소설 속에서 말하는...
사랑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없는 시간은 이제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


명록과 헤어진다는 생각은 단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해에 못 봐도 다음 해에 봐도 되는 일이었다.
다음 해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고개 드는 실망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 야!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명록오빠랑 싸웠어? "

칠판을 빠르게 두들기는 분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취업전선에 한 발 가까워진 3학년의 전공 수업시간.
그리고 곧 있을 중간고사도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여유는 있다고 하지만 그럴 수록  하고 날아오는게 시험이었다.

 때문에 다들 교수님이 칠판에 적은 것을 바쁘게 노트 위로 옮겨 적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사람, 수진 만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연이면 모를까, 늘 수업에 열심이던 수진이었다.
멍하니 넋이 나가있는 수진이 걱정되었는지 나희가 말을 걸어왔다.

" 아니... 그냥 좀... "




수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벚꽃을 보러가지 못해서라고 말하기엔 자신이 너무 철이 없는 것 같았다.
명록이 친구들과 노는 것 때문에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때문이었다.
수진은 자신의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눈치 빠른 나희가 말하길 주저하는 그녀의 태도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
-라고 짧게 말하곤 나희가 고개를 돌리자
수진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에 잡은 펜을 열심히 움직이며 잠시 밀린 필기를 적기 시작했다.




**************





나희, 영연 그리고 설아.
모두들 수진처럼  학기가 시작되고
방학동안 잊고 있었던 각자의 일들이 밀려와서
서로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수업을 맡은 교수님이 일이 있다며
일찍 끝내지 않았다면 다들 바쁜 스케줄 때문에
오늘의 술자리도 없을 뻔했다.
가뭄의 단비처럼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이 생기자,
다들 술이 고팠는지 하나 같이 술을 외치고 있었다.

" 하아, 남자 친구가 자꾸만 공부하자고 난리다. 예쁘게 꾸미고 데이트 나갔더니 손잡고 도서관으로 가질 않나, 영어 학원에 등록하자고 하질 않나. 내가 남친을 만나는지, 우리 엄마를 만나는지 모르겠어. 안 그래도 학교 수업 듣고 과제하는 것만으로도 미치겠는데, 쉴 시간을 안 준다니깐. "



남자친구에게 그간 쌓인 것이 많았는지
영연이 술잔을 털어내며 주저리주저리 불만을 털어 놓고 있었다.



남자 친구가 걱정 되서 그렇겠지. 네가 얼마나 공부를  하면 그러겠냐?"



나희가 실 웃음을 지으며 영연에게 한마디 쏘아 붙이자 영연이 곧 뾰루퉁해진다.

그래도 봐봐, 봄이잖아! 봄! 연인의 계절! 남들은 손 붙잡고 데이트 하느라 바쁜데 난 뭔 꼴이야. 지천에 꽃이 피고 있는데 난 지는 꽃도 아니고... 주말마다 도서관에 쳐 박혀 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  그래도 벚꽃이 잔뜩 피어서 밖에 나가고 싶은데 이 인간은 열람실에서  냄새나 맡고 있으니. 으으!!!! "



영연이 분개 하며 애꿎은 계란찜을 수저로 헤집어 놓았다.
새로운 취미인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설아가
영연을 살짝 째려보더니 헤집어진 계란찜의 모습을 찍었다.



대체.....
저렇게 헤집어진 계란찜이...
무슨 피사체로써 가치가 있는 걸까?

영연의 숟가락질에 엉망이 된 계란찜은
처음 나왔을 때 단정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설아의 모습은
이미 프로 작가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설아야 워낙 독특한 행동을 자주 하는 터라 다들 특별히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설아와 카메라는  어울리는 쌍이었다.
가끔 보여주는 그녀의 정신 세계는
마치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찍는 카메라 또한
찰나의 모습을 한 장의 평면으로 옮기는 기계 아닌가.

설아가 카메라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맑게 울렸다.

어찌됐든 수진은 영연의 불만을 듣고 있으니 왠지 남일 같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소주를 한잔 쭉 들이켠 그녀도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맨날 야근! 출장! 일이라고 어쩔  없다곤 말하는데, 벚꽃 구경 한번 가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벚꽃축제 가면 사람이 잔뜩 인데 그 사람들은 뭐 다들 백수인가? "




수진도 속상한 마음을 풀며 자신의 손으로 소주를 따라 다시 들이켰다.
나희도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  없이 씁쓸한 표정만 지으며 같이 술을 목으로 넘겼다.
영연도 자신의 잔을  안에 털어 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이러다가 이번 년도 벚꽃 축제 한번 못 보는  아니야?"




" 안 돼....... 히잉...... 내 로망이었다고, 벚꽃 축제는... 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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