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제2부. # 12화. 봄비는 벚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1)
119.
허억!!!!!
아니 어떻게 여기에.......
명록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수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오가면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스쳐지나가는 동안
분명 보이는 것은 수진의 얼굴이었다.
아니 지금 보니 그녀의 옆에 친구의 얼굴도 보이고 있었다.
설아....
-라고 했던!!!
자신에게 잊지 못할 간호사 코스프레를 안겨준 그녀였다.
그러고 보니 뒤에 있는 여자들의 얼굴도 낯이 익었다.
나희 그리고 영연이라는 그녀들.
술 마신다고 하던 친구들과 모두 함께 수진이 이곳에 와있을 줄은 몰랐다.
인생은 예측불허.
그렇게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확실히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놀라기도 하고
스릴 만점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은 확실했지만 하나도 재미없었다.
아니 이건 최악이었다.
" 저기...... 명록씨? 왜 그래요? "
옆에 있는 그녀가 갈색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찰랑찰랑 흔들며 그의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하윤.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거리며 명록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게 칠해진 마스카라 덕분에
더욱 크게 보이는 눈망울이 우주와 같이 예쁜 그녀였다.
하윤은 한손에 검은 봉지를 들고 그를 향해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명록의 양손에도 시원한 맥주 캔들과 음료수가 들어있는 봉지가 들려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그림자 뒤로 물러서며 숨다보니
어느새 정장의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고 있는 하윤 뒤에 숨고 있는 명록이었다.
그런 그를 뒤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하윤.
반짝반짝 금가루라도 뿌려있는 듯한 선홍빛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물어왔다.
" 어머.....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
하윤이 명록의 시선이 있는 곳을 향하며 두리번거리자 그는 당황하며 말했다.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기 이대로 앞으로 가죠. "
그녀의 등 뒤에서 앞으로 미는 명록의 손길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걸어가는 하윤이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
" 왜 그래요....? 누구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 피하는 것처럼..... 뒤에 숨어서......"
어느새 수진들의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았다.
인파에 휩쓸려 저편으로 멀어진 모양이었다.
그제야 한숨을 쉬며 허리를 꼿꼿이 펴는 명록이었다.
그가 일어서서 자세를 바로하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하윤이 이어 물었다.
" 흐음...... 혹시 여자 친구라도 봤어요? 대리님 얘기 들어보니 애인 있다고 하던데......."
" 아하하하~~~ 아니에요!!! 하하 그럴 리가요? "
한참 힘이 들어간 명록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어색함이 듬뿍 들어가 있는 그의 목소리.
과장된 얼굴의 표정이 우스웠는지 하윤이 풋 소리를 냈다.
" 하하.... 제대로 맞췄나본데요? 쿡쿡..... 명록씨 얼굴이 완전 이상해요. 하하하하~ "
맑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터져 나왔다.
아......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이람.......
하긴 처음부터 시작이 꼬여있던 밤이었다.
하아.....
방명록의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내 체면이 말이 아니네......
쩝......
수진의 눈을 피해 구차하게 몸을 숨기는 자신의 모습이나
그런 자기 모습을 보며 단박에 여자 친구 때문이냐고 묻고는
깔깔 웃어대는 하윤을 보면서 새삼 한숨을 쉬고 있는 명록이었다.
가로등 아래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가운데
시원스레 불어온 바람에 하얀 꽃잎들이 휘날렸다.
마치 옅은 분홍빛 눈이 내리는 것처럼 날리는 꽃잎들이 춤을 추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
추운 겨울이 지나고 개나리와 함께 다가온 봄은
어느새 캠퍼스 곳곳에 활짝 핀 벚꽃을 장식해두었다.
3학년이 된 이후로 본격적인 취업 준비가 시작되고
2학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전공수업과 많은 과제 때문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수진이었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캠퍼스에 활짝 펴있는 벚꽃을 볼 때면 언제나 가슴이 설렜다.
중학교.
아직 단발머리 찰랑거리며 교복을 줄여서 멋을 내던 그 시절.
한참 사춘기에 빠져 사랑을 꿈꾸던 그때 책가방을 등에 매고 걸었던 벚꽃길.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햇빛 아래 쏴아아아 소리를 내며
하얀 눈송이처럼 흩어져 날리던 아름다운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바닥에 아름답게 깔린 꽃잎을 보며....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벚꽃 가득한 나무 아래를 함께 손잡고 걸으리라......
어린 수진의 마음 속에 소중한 로망으로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건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지금은 입시에 시달리고 있어도 대학생이 되면 그때부터는 멋진 연애를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힘들었던 고삼 시절을 지나고 나름 괜찮다고 인정받는 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시작된 대학생활.
모든 게 새로웠던 신입생 시절.
뭐든 마음 먹은 대로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던 그때도
폭풍처럼 정신없는 3월을 보내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새 벚꽃은 지고 난 후였다.
남자친구는 커녕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사이
야속한 벚꽃은 순식간에 져서 한차례 부는 봄바람에 사라졌다.
그 뒤 학교를 다니는 동안 꿈꿔왔던 멋진 연애도 그녀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어느새 일 년이 후딱 지나가버리고 2학년이 되었다.
2학년이 되어도 이뤄지지 못했던 그녀의 소망.
벚꽃이 그렇게 지고 여름이 지나버렸다.
하지만 지금....
수진의 옆에 명록이 있었다.
22살의 봄.
거기에다가 일찍 시작된 봄의 영향으로 벚꽃도 빨리 개화를 시작했다.
아침마다 지나오는 여의도에는 아름답게 핀 꽃망울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꿈꾸던 소녀의 로맨스가 마침내 이뤄지려는 참이었다.
오늘은 꼭 가자고 말해야겠어......
따뜻한 날씨 때문에 벚꽃이 핀지도 벌써 일주일을 넘겨 버렸다.
그전부터 벚꽃을 보러 가자고 말은 했지만 명록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게다가 그렇게 기다리는 주말동안 지방 출장을 가버렸다.
바빠서 평일에 못 만나는 것도 억울했는데 주말마저 그를 빼앗기다니......
하아....
속이 상한 수진은 그날 저녁 굶어버렸다.
일요일 오후 늦게 출장에서 돌아온 명록을 보고
벚꽃을 보러 가고 싶다고 살짝 말을 흘려두긴 했지만,
출장의 피로 때문인지 선뜻 가자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 이후도 명록은 일이 바쁜지 늦게 끝나서 늦은 밤 잠시 얼굴을 보는 게 고작이었다.
잠깐 시간을 내서 만날 때면 잦은 야근 때문인지
늘 피곤해 보이는 명록의 모습에 수진은 꽃구경 가자고
조르지도 못하고 애써 참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캠퍼스의 벚꽃도 어느새 만개해 있었다.
꽃망울만 보여주던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활짝 핀 꽃이 연분홍빛으로 나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둘 꽃잎이 떨어져 날리고 있었다.
곧 꽃들이 질 날이 얼마 안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 곧 사라질 벚꽃을 보며 수진은 조급해졌다.
이번 주가 피크.....
아마 다음 주면 벚꽃이 모두 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 주말.....
이날을 놓치면 또다시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 오빠 오늘은 벚꽃놀이 가는 거지? 퇴근할 시간에 회사 앞으로 갈게. ]
바빠진 마음이 그녀를 움직였다.
수진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며 명록에게 보낼 문자메시지를 쓰고 있었다.
**************
[오빠 오늘은 벚꽃놀이 가는 거지? 퇴근할 시간에 회사 앞으로 갈게.]
흐음.....
어쩐다......
방금 온 문자를 보고 있는 명록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며칠째 계속 되는 그녀의 요구.
봄이 오고 여린 연둣빛의 싹이 핀지
얼마 지난 거 같지도 않은데 벌써 4월 두 번째에 들어섰다.
유난히 날씨가 금세 따듯해진 덕분인지 서울에 벚꽃이 예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수진은 계속 꽃구경을 가자고 졸라대고 있었다.
벚꽃.
Cherry Blossoms.
대체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벚꽃 구경을
그렇게 했다고 이렇게 난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퇴근하며 지나가는 여의도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차던 그였다.
일본에서는 벚꽃이 피는 이 시절이면
그렇게 난리라고 하던데 그게 언제 현해탄(玄海灘)을 건너왔는지 모르겠다.
뉴스마다 벚꽃 구경에 나선 인파들을 연신 보도할 때마다.....
지방에 열리는 온갖 벚꽃 축제를 볼 때마다.....
연신 인상을 찌푸리는 명록이었다.
물론 벚꽃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연분홍빛 꽃잎.
아니 가끔 하얀 작은 꽃잎들이 포도송이처럼 뭉쳐서
피어있는 나뭇가지를 볼 때마다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언제나 앙상히 마른 가지에 피어있는
화사한 꽃들이 피어있는 것도 보기 좋았지만
질 때도 아름답게 지는 꽃이라 좋아했다.
꽃이 한창 활짝 피어있을 때는 모든 꽃들이 다들 아름답다.
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한창의 시기를 지나 서서히 퇴장할 때까지
그 여운이 유지되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꽃은
만개했을때의 화려함은 있으나
질 때는 추하게 보이기 일쑤였다.
그런 의미에서 벚꽃은 좋아하는 꽃이었다.
작지만 서로 모여서 하나의 커다란 송이를 이루는 여린 꽃.
그리고 질 때는 눈송이가 되어 바람과 함께
온 세상에 가득 멀리 퍼져서 날아가 버리는.....
마치 설녀와 같은 시린 아름다움을
가슴에 남기고 가는 그런 꽃의 이미지가 벚꽃에 대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것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과 어깨와 어깨를 부딪쳐가며 구경 가고 싶지 않았다.
북적거리는 가운데 무슨 꽃을 구경하고 여운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점심시간 커피 한 잔을 들고
잠시 동안 지켜보는 것이 더 제대로 벚꽃의 맛을 감상할 수 있었다.
뉴스 화면에서 와글와글 거리는 인파만 봐도 머리가 아팠다.
그런 인파 속에 수진과 함께 섞이고 싶지 않았다.
인파에 지치고.....
복잡함에 지치고.....
번잡스런 소란에 피곤해질 것이 뻔 한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벚꽃이 한창일 때
여의도는 지옥과 같은 혼잡을 보여주기로
그 유명이 하늘을 치르고 남았다.
으으....
깔려죽지....
저러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쮸빗 서는 풍경들.
가슴이 답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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