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제1부. # 외전 이야기 셋. 질투는 섹스를 부른다. (1)
108.
명록은 오랜만에 수진과 영화를 보러 시내에 나왔다.
커다란 홀에 사람들이 꽤 많이 붐비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고른 영화는 요새 한참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였다.
둘이서 웃고 즐길 수 있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었지만
나름 인터넷에서 관람한 사람들의 평도 좋았고
주변에서 보고 온 이들의 말도 본전 생각날 일은 절대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꽤 기대를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그의 호주머니에서 부르르 진동이 울렸다.
평소 수진과 만날 때는 진동으로 바꿔놓았던
전화기가 온몸을 흔들며 새로운 연락이 왔음을 울어대고 있었다.
발신자를 보니 저장이 안 된 전화번호.
엥?
누구지.....?
영업도 겸비하고 있는 터라 모르는 번호라고 무조건 무시할 순 없었다.
중요한 거래 전화도 간혹 저장 안 된 새로운
전화번호로 연락이 오는 터라 절대 어떤 전화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땅 사라는 등 좋은 만남이 기다린다는 등
온갖 스팸전화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체념하고 있었다.
아마 이 직장을 그만 두지 않는 이상.....
아니 영업에 관련된 일을 그만 두지 않는 이상
아마도 계속 될 슬픈 운명이려니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명록은 잠시 수진에게 전화 왔음을 눈짓으로 표시하고
잠시 그녀에게서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영업상 통화를 들려주는 건 민망하기도 했거니와
주변이 시끄러운 가운데 통화하기 힘들어서 조금 조용한 장소를 골랐다.
그리고 바로 통화를 눌렀다.
" 여보세요~ 방~명록 입니다. "
" 아하하하~~~ 여전히 그렇게 전화를 받는구나? 하하하~ 그 말투 참 오랜만이다..... 하하하하~ "
어라????
여자 목소리?
그것도 활기차고.....
아주 친근함을 담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라니......
누...누구지?
명록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을 잘 아는 듯 한데
거기에다가 누구세요...?
-라고 묻는다는 것은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친한 듯 말하고 있는데
영 모르겠다는 듯이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그녀에게도 물론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수화기에서 밝은 여자의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 애~ 모하니? 전화 받다가 어디 간 거야? 여보세요? "
하지만 전혀 생각안나는 상대에게 친한 척을 할 수도 없고 결국....
명록은 할 수 없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 여...보세요? 저기..... 혹시 누구신지? "
그의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침묵이 이어졌다.
윽....
썰렁한 이 느낌.....
역시 괜스레 말했나 싶어서 후회가 되고 있었다.
그냥 아는 체하면서 이어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간 깔깔깔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하하하~~~ 야.... 이거 완전 섭섭한데? 하긴 우리가 너무 오랜만이긴 하다..... 작년 동창회 때 보고 못 봤구나.....? 일 년에 두세 번 볼까 말까 하니까...... 그래도 못 알아보니까 쪼금 마음이 좋지는 않다, 얘."
동창회???
순간 그의 머리에 스치는 여자의 얼굴들.
그중 한 얼굴이 팍 하고 멈추었다.
설마....!
" 연주!? "
" 에이.... 이제야 생각났어? 후후후.... 잘 지내지? "
명록은 대학시절 옆에서 같이 공부하던 여학생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졸업 후 동창 모임에서도 종종 보곤 했지만 언제나 그에겐 그녀는 대학 시절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발랄하고 언제나 살짝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그녀.
약간 주근깨가 있는 듯 하는 콧등에 웃는 얼굴이 시원한 여름바다 같았던.....
연주라는 여자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듯 싶었다.
서연주.....
학교 다닐 때는 꽤 자주 어울려 다녔지만
졸업 후에는 대학 동창들이 그러하듯
각자 흩어져서 제 갈길 가기 바빠서
동창회나 모임을 빌어서 아주 힘들게 얼굴이나 보고 지냈었다.
갑자기 왠 연락이지......?
아.....
순간 바로 짚이는 것이 있었다.
저번 동창 통해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드는 감정의 색깔은 그녀의 이름처럼 연둣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명록의 목소리가 약간 잠겼다.
" 나야... 머 잘 지내지. 너.... 웬일이냐? 이렇게 어려운 연락도 다하고. "
" 후후후..... 에이.... 알면서 그러는 거지? 쑥스럽게...... "
웃음기 가득 젖어 있는 연주의 목소리에 정말 수줍음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대학 시절에 이런 모습을 본 적 있던가?
언제나 씩씩하고 싹싹한 모습만 보이던 그녀였다.
여성스러움 보다는 약간 보이쉬한 느낌이 가득했던 추억의 모습과는
다른 색을 띄고 있는 목소리에 명록은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 먼데.....? "
끝까지 시침을 떼기로 하는 명록의 답변에 연주가 말을 받았다.
" 치이..... 너 은근히 사람 곤란하게 한다.....? 후후후.... 그래 말한다... 말해. 나..... 결혼해..... 후후....... 그래서 하객들 오라고 홍보 중이야. 너 올 거지? 내 결혼식. "
결혼......
역시......
이미 얘기는 대충 들었다.
대학교 삼학년 때부터 사귀었던 준석 선배와 마침내 결혼한다는 얘기.
캠퍼스 커플로 잘도 사귀더니 긴 연애 끝에 결국 웨딩마치를 울리게 된 모양이었다.
하긴 졸업하면서 바로 결혼하는 것 아닐까....
했던 커플이 이제서야 예정되었던 관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 언제인데? "
" 훗.... 18일 다음 주 토요일이야. 서울에서 하니까 꼭 와라. 내 신부 화장한 모습, 아마 뽀샵해서나 볼 수 있는 미모로 바꿔있을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후후후....... "
녀석.....
저렇게 좋을까.....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시원스레 보여주던 연주였다.
밝고 활달한 그녀.
그녀 주변은 언제나 햇살이 비추는듯 따스하고 명랑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었다.
" 어..... 그렇구나..... 축하한다..... 흠.... 가야지. "
" 그래. 후후후...... 꼭 와? 일부러 내가 직접 연락도 했는데 안 오면..... 나 완전 서운해 할지도 몰라. 청첩장은 메시지로 바로 보내줄께. 꼬옥 참석해야 돼? 그럼 그때 보자. "
" 그래..... 연락줘서 고맙다. 그날 보자. "
웃음기 가득한 밝은 목소리로 그녀는 인사를 마치고 전화가 끊어졌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처럼 명록을 스치고 지나가는 연주의 전화통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만지작거리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수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의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수진이 물어왔다.
" 왜 그래....? "
"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 "
수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눕히며 입을 열었다.
" 오빠... 그 전화 누구한테 온 거야? "
**************
데이트의 메카답게 주말의 멀티플렉스 극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얼마 만에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는 건지.......
매일 명록과 만나면 모텔만 갔던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별도의 장소로 데이트하러 온 것만으로도 수진은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영화 티켓을 손에 들고 얼마 남지 않은 상영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명록이 움찔하더니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금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어려운 전화인가 싶어 수진이 괜찮다는 듯 받으라고 하자
그제야 명록이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으러 그녀의 곁에서 살짝 떨어졌다.
명록이 전화를 받는 동안 할일을 잃은 수진이 영화 팸플릿을 읽으며 팝콘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의 통화가 영업용 전화치곤 꽤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엄습하는 불안.....
언제나 좋은 시간에는 호시탐탐 불행의 손길이 노리고 있으니 방심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
혹시 말로만 듣던 주말 출근?!
오랜만에 온 영화관람이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한번 시작된 불안은 마치 폭풍처럼 그녀를 엄습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초조해진 수진은 통화를 하는 명록의 근처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중요한 전화인지, 그녀가 다가온 것도 모르고 명록이 집중해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 뭐 잘 지내지. 너.... 웬일이냐? 이렇게 어려운 연락도 다하고. "
어라.....???
회사에서 온 전화인줄 알았는데 전화를 받는 명록의 입에서 반말이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그의 목소리가.....
누구지?
회사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수진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러면 안 되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의 전화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 어..... 그렇구나..... 축하한다..... 흠.... 가야지. "
수화기에서 얼핏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거 같았다.
아니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활발해 보이는 목소리......
역시 일과 관련된 통화는 아닌 것 같았다.
왠지 명록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그에게 미안했지만 그녀의 예감이 찌릿하고 울리고 있었다.
에이...
설마.....
그럴 리 없잖아.
오빠가......
글구 바람 피우는 거면 어떻게 내 앞에서 전화를 받겠어.
수진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에게 혼잣말을 하였다.
의심의 먹구름을 애써 지워내고는 팝콘을 입에 넣으며 전화통화를 하는 명록을 지켜봤다.
하지만 자신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져 있다는 것은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 그래..... 연락줘서 고맙다. 그날 보자. "
마침내 명록이 어색한 목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짧지 않았던 통화가 아쉬운 듯 명록이 휴대전화를 들고 멈춰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영화에서 봤던 한 장면 같았다.
흐음....
무슨 장면이었더라...?
머릿 속에서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전화를 끊고
그를 쳐다보던 수진과 눈이 마주치자 명록이 깜짝 놀라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마음에 먼가 쿵하고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뭔가 있어.
수진의 감각, 여자 만의 예감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들으면 그녀가 의부증이라며 놀릴지도 모르지만
깜짝 놀란 듯한 명록의 모습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 왜 그래....? "
"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 "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색하게 웃는 명록의 얼굴 옆으로
한 편의 만화 장면처럼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착각이었지만 수진의 눈에는 그만큼 그가 의심스럽게 보이고 있었다.
애인을 믿지 못하고 추궁하는 여자들......
케이블 채널에서 그런 여자들을 보며 왜 저렇게 하면서 애인을 사귈까...
-라고 욕을 하곤 했었는데 막상 자신에게도 일이 닥치자 그녀도 다르지 않은지, 명록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수진의 목소리에 은근히 날이 서있었다.
" 오빠... 그 전화 누구한테 온 거야? "
" 아, 대학 동기야. "
모든 것에는 타이밍이 있다.
연애에도 타이밍이 필요하고, 성공한 인생에는 적절한 타이밍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답에도 타이밍이 있었다.
적절한 어조, 너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그의 대답.
하지만 명록의 대답은 지나치게 빠르게 돌아왔다.
마치, 수진이 물어볼 것을 예상하고 준비한 듯한 답변에 냄새가 풀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근데 왜 그렇게 불편하게 받아? 그냥 옆에서 받아도 되는데.... 뭐라고 하는데? "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스파이를 밝혀내기 위해
심문하는 장면의 수사관처럼 수진이 날카롭게 물어봤다.
한 번 맡은 의심의 냄새는
열 가지 이상의 아니라는 증거가 있어야 사라질 수 있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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