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제1부. # 11화 오빠, 우리 집에.... 놀러 와요. (15)
84.
수진에게 말하는 듯 그녀를 매개체로 말싸움을 하더니, 별안간 엄마의 표적이 돌아가면서 수진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바로 받았다.
" 아....아파서 약 먹고 자느라고 못 받았어..... 아침에도 그런 거고..... 아이..... 약기운이 얼마나 독한데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고..... "
" 거봐~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깐?! 약 먹고 전화도 못 받을 정도 였다잖아요!!! "
달리 댈 핑계도 없어서 아파서 그랬다는 그녀의 말에
엄마가 옳다구나 하며 벼락같이 아빠에게 쏘아 붙였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라고, 이렇게 사소한 싸움이 시작되면
그녀는 보통 방안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명록이 방안에 있고, 고생하는 그를 집 밖으로 무사히 내보내기 위해선 부모님의 화해가 시급했다.
이렇게 냉전이 길어지는 가운데
혹시나 명록이 발견되는 일이 벌어지면
아아~~~~~~~~~~~~
정말 상상하기도 싫었다.
" 에휴~~~ 나 괜찮아..... 괜찮다니까? 엄마~~ 다 내가 잘못했어..... 힝.... 다 내 탓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엄마! "
수진은 엄마에게 사정하듯 빌고는 바로 소파에서 일어나서 아빠의 곁으로 다가갔다.
평소 뭐 필요한 게 있는 것이 아니면 절대 부리지 않던 애교까지 부리며 아빠의 비위를 맞췄다.
" 이잉~~ 아빠~ 자~ 화 푸세요. 저 때문에 두 분이 이러시면 제 마음이 어떻겠어요. 아빠~! 제가 술 따라 드릴게요. 여기요~~ "
수진은 빨리 이 상황을 종료하고 싶었다.
자신의 방에 홀로 있는 명록을 돌봐주고 싶었다.
아까 베란다에서 끌어올리면서 보았던 그의 몸이 무슨 생선가게 동태를 만지는 것처럼 차갑게 얼어 붙어있었다.
감기 걸린 자신을 돌봐주러 왔던 그가 이번엔 감기에 걸려 쓰러질 판이었다.
그리고 어찌 됐든 두 분이 화해해서 안방으로 같이 들어가셨음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모든 건 수진의 행동에 달려 있었다.
그녀는 빠른 상황종료를 위해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
두 분 사이를 조율하느라 왔다 갔다 하며
양쪽의 비위를 맞추고 시중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휴......
오빠...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갈게...
힝.....
어느새 그녀의 노력으로 엄마도 식탁으로 와 앉으셨다.
수진은 그저 비어 있는 술잔을 채우며 어서 이 술자리가 빨리 파하길 기다릴 뿐이었다.
**************
콧물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 말고 이렇게 콧물이 흘러내린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명록은 지금 갑자기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을 할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산 속 구덩이에서 낙엽을 끌어 모아서 풍성히 쌓고
그 위에 판초 우의를 덮은 뒤 방한복 하나에 의지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서 어차피 오지도 않을 순찰 때문에 눈을 뜨고 있으려니
점점 동태가 되서 반 가사상태에서 졸던 그 시간이 지금 바로 자신에게 찾아오는 중이었다.
거기에다가 웅크린 채 가만히 소리도 내지 말고 있으라는 고참의 명령.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러고 있으라니.....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꾸벅꾸벅 잠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 새끼야!
이대로 자면 얼어 죽어!
자지 말고 고개 들고 있어!
이 새끼 빠져가지고.....
옆에서 고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고참의 목소리가 승필 같기도 하고 박 과장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으.....
졸려....
아~~
이렇게 나는 가는구나......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어둠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따듯한 체온이 그의 얼굴, 양 볼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들리는 작은 목소리...
" 오빠.....? 오빠..... 괜찮아? 오빠....... "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수진이었다.
양 볼을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이 엄청 따듯하게 느껴졌다.
작은 전등 아래 역광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왜 이리 반가운지 명록은 가슴이 울컥해졌다.
수진은 부드럽게 그를 감싸며 속삭였다.
" 부모님들..... 이제 주무셔. 그래도 소리 내면 안 되니까.... 조심해야해? 근데..... 오빠.... 일어날 수 있겠어? 너무 많이 시간이 지나버렸어...... 많이 추웠지? 미안해.... 오빠.... 미안...... "
수진은 티슈로 명록의 코 아래를 닦아주며 말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도 없었다.
덜덜 떠는 와중에도 살았다는 생각에 한숨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어찌됐든 위험상황은 종료됐다는 소리였다.
명록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끌림대로 몸을 세웠다.
순간 바로 허벅지에서 쥐가 나면서 고통과 함께 찌르르 흐르는 전기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수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 오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오빠.....! "
명록은 종아리를 움켜쥐고 고통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쥐.... 쥐가 나서..... 아.... 아흑....... "
수진은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고는
그가 움켜쥔 발을 주무르며 땅땅해진 근육을 풀어주느라 애쓰고 있었다.
명록은 배운 대로 발끝을 잡고 피면서 갑자기 올라온 쥐를 내쫓느라 이마에서 땀이 맺힐 거 같았다.
간신히 허벅지 경직을 풀고 나서 수진은 명록을 일으켜서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벌써 베란다와는 공기가 달랐다.
다시 인간의 세상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따스한 그녀의 방 안 공기가 너무도 그리웠다.
수진은 우선 명록의 몸이 너무 차갑다고 느꼈는지
침대 위에 눕히고는 바로 따라 들어와서 그를 안아주고 있었다.
따스한 그녀의 몸을 느끼며 안고 싶었지만 너무 찬 자신의 팔에 그녀가 놀랄까봐 가만히 허리에 얹고만 있었다.
생각해보니 수진도 감기에서 나은지 얼마 안 된 몸이었다.
이렇게 차가운 자신을 그녀에게 밀착시키기 미안한 마음이 든 명록은 그냥 적당한 거리 속에서 따스함을 느끼기로 했다.
그래도 침대 위 이불 안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금세 따듯해지고 있었다.
아까 덜덜 떨던 그 시간에 비하면 여기 아프리카 초원 한가운데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따듯한 기온에 명록은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긴장 속에서 덜덜 떨고 있다가 평온한 시간에 따스함까지 더해지자 바로 노곤해지며 곯아떨어질 거 같았다.
아....
이대로 잠들고 싶다.....
수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서 그녀를 안고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그녀도 그런 명록을 보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수진이 그에게 속삭였다.
" 오빠..... 그냥.... 조금이라도 자고 갈래....? "
수진의 목소리를 들은 명록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심 그러고 싶었지만 이러다가 갑자기 그녀의 부모님이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그간 수고는 다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아니.....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아침까지 못 일어나고 내내 쿨쿨 자버릴 거 같아 불안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아냐...... 가야지...... 그러다가 또 나갈 기회 잃어버릴라....... 너희 부모님 주무실 때 가는 게 낫겠다....... "
명록은 침대에서 일어나 숨겨두었던 그의 옷을 챙겨 입었다.
수진도 따라 일어나서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분위기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갈 준비를 마친 명록을 보고 수진이 먼저 가디건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이미 집안은 모두 불이 꺼지고 조용했다.
수족관의 작은 불빛만이 비치고 있는 거실을 살짝 보고는 수진이 손짓하며 먼저 앞장섰다.
그녀의 뒤를 쫓아 나오는 명록.
살금살금 현관문을 따고는 바로 같이 바람처럼 탈출했다.
마침내 긴 위기의 시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명록과 수진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명록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 수진아~~ 간다...... 이따가 전화할게? 어여 들어가... 감기 걸려....... "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엄지와 새끼를 펼쳐 전화하겠다는 모습을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수진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탁....
수진과 헤어지고 중력을 거스르며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명록은 엘리베이터 벽면에 털썩 몸을 기댔다.
으.....
온몸이 으슬으슬한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명록은 간신히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유난히 달 밝은 한밤중에 수진의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저벅저벅 소리 나는 아스팔트의 바닥소리가 왜 그리 크게 들리는지 알 수는 없었다.
휭 지나가는 바람에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순간 다시 흘러나오는 콧물.
명록은 손으로 닦으며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아....
머리가 핑 돈다......
**************
평화로운 일요일 낮이었다.
나른한 햇살이 어제의 추위를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묘한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고 있었다.
" 으..... 으....... 으윽....... "
" 에휴~~~ 저놈의 자식은 금요일부터 어디를 싸돌아다니다가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집에 낮도깨비처럼 들어오더니만 끙끙 소리나 내고 있고..... 에그그..... 대체 뭘 하다 들어왔기에 저러는 건지...... 에잉...... "
귀익은 목소리......
그러나 오늘따라 한층 더 한옥타브 높게 집 안을 울리고 있었다.
명록은 방 앞을 지나다가 자신을 바라보며 잔소리를 쏟아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한마디도 못한 채 끙끙 대는 중이었다.
결국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오긴 했는데 그 순간부터 열이 오르며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래도 따듯한 물로 씻으면 좀 나으려나 생각하고 샤워한 것은 좋았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젖었던 머리와 몸이 마르면서 열이 더 높아지면서 두통과 열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목까지 부운 느낌이 들며 쿡쿡 쑤셔오고 있었다.
" 으으...... "
콜록 콜록 콜록~!
부워서 갈라지는 듯한 목구멍에서 마른 기침까지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이대로 젖은 머리로 누우면 큰일 날 듯 싶어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위이잉 하는 소리가 찢어질 듯 귀를 아프게 만들었지만 꾸욱 참고 물기를 털어냈다.
이대로 누우면 바로 병원에 실려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방 안에서 계속 머리카락에 뜨거운 바람을 몰아주고 있었다.
한동안 계속 더운 열기를 쬐어주자 어느 정도 머리카락이 마른 것을 느끼며 드라이기를 껐다.
귀가 먹먹한 게 아직도 윙 울리는 거 같았다.
아흐.......
어지러워.......
우으으~~
콜록! 콜록!
명록은 드라이기를 책상 위에 놓고는 깔아놓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끝없이 계속 되는 수면시간.......
그러나 그가 잠을 깬 것은 다시 위이이이잉 길게 울려대는 모터소리 때문이었다.
머리가 깨어질 듯한 두통이 지끈지끈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시끄러운 기계음까지 울려대자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하고 눈을 떴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쏟아지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콜록거리며 간신히 상체를 드니 어머니가 청소기를 돌리는 중이었다.
" 아....아흐.... 어.....엄마........! "
청소를 할 거면 문을 닫고 하셔도 될 것을
자신의 방을 열고 저렇게 청소기를 돌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이유라면 단 하나!
이제 자기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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