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제1부. # 11화 오빠, 우리 집에.... 놀러 와요. (14)
83.
수진이 망연자실한 아빠를 쳐다보며 빠르게 거실로 화초들을 옮겼다.
혹시라도 명록이 아직 베란다에 있다면 빨리 아빠가 거실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안전했다.
수진이 화초를 하나씩 옮기자, 아빠도 쓰러진 화분을 제대로 정리했는지 화분을 들고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화분을 옮기며 수진이 아빠에게 입을 열었다.
" 아빠..."
" 됐다. 많이 상하지 않았더라. 다시 잘 세워 뒀으니 신경 쓰지 말아라.... "
아빠의 쿨한 대답에 수진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 제가 나머지도 내놓을 테니, 방으로 들어가세요. 아빠 옷도 편히 갈아입으세요. 아직 외투 입고 머하세요. "
" 흐음...... 그...그럴까? 암튼 조심히 옮겨라. "
" 네에~ "
수진은 아빠의 등을 떠밀듯 안방으로 들여보내곤 다시 빠른 걸음으로 베란다로 나갔다.
" 오빠~~? "
수진이 목소리를 낮춰 명록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쥐죽은 듯 조용한 베란다.
다른 곳으로 잘 숨었나 하고 거실로 들어가려는데 베란다 저편에 무언가 보였다.
설마 하고 다가갔는데 손등 같았다.
놀라서 수진이 창문을 열고 보니 명록이 실외기 놓는 곳 옆에서 쪼그리고 매달려 있었다.
약간 턱이 있어서 발 디딜 곳이 있다고는 하지만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밖은 영하의 날씨.....
그리고 여기가 도대체 몇층이었던가.....
그녀는 얼른 명록의 팔을 잡으며 올라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베란다 턱에서 높아 넘어오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그를 보니
자신이 가슴을 졸였던 것이나 이러고 있는 상황들이 갑자기 웃겨서 웃음이 터질 거 같았다.
하지만 목숨 걸고 매달려있던 명록을 생각하면 웃을 수는 없었다.
방금 전 자신도 죽었구나 생각하고 있었던 참 아니었던가......
터지는 숨을 간신히 참으며 팔을 뻗어 그를 끌어 올려줬다.
다시 베란다에 올라온 그의 몸은 얼음이었다.
실외, 그것도 겨울의 찬바람이 쌩쌩 부는 고층에서 옷마저 허술하게 입고 얼마나 추웠을지, 그의 손이 얼음장 같았다.
수진이 입김을 호호 불며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따듯하게 한 손으로 명록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덜덜 떠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마음이 가라앉았다.
병간호로 시작된 그의 방문이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는지 수진은 명록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밖은 조용했다.
아빠는 이제 안방에 들어갔고, 엄마도 이제 씻으러 들어갔으니 지금이야 말로 가장 안전한 시간이었다.
수진은 베란다를 나와 거실의 동정을 살핀 후 잽싸게 자신의 방으로 명록을 이동시켰다.
손짓하는 수진.
그리고 후다닥 달리는 그.
숨 막히는 숨바꼭질의 대서사시 일막이 이렇게 지나가는 중이었다.
**************
아흐.....
추버어.......
그새 입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미션 임파서블의 남자 주인공도 아니고
절벽에서 매달린 듯 베란다 자그마한 턱에
간신히 매달린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다.
아흐......
덜덜덜.......
명록은 지금 이 곳이 몇 층인지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까마득한 저 아래는 보지 않으려고 무지 애쓰고 있었다.
갑자기 드르륵 소리가 나는 통에 얼마나 놀랬던가!
그리고 들리는 수진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
" 아빠~~~~~~~~~~~~!!!!! "
으헉!
아....아빠!?
그 순간 명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무조건 피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는 에어컨 실외기를 놓으라고 살짝 더 빼어놓은 베란다 옆 공간.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미 몸은 창문을 열고 냅다 그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창문을 닫으며 나는 소리 따위를 신경 쓸 새가 아니었다.
수진의 목소리와 그녀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서로 얽히고 있는 순간 피해야 된다는 생각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베란다 난간을 힘껏 움켜쥐며 턱에 구둣발로 버티고 있는데 사각팬티 틈 사이로 휭 하니 바람이 들어왔다.
아기들이 잠들어있는 알주머니를 확 오그라들게 만드는 칼바람!!!!!
아흐으으......
이러다 얼어 죽겠다......
군대에서 겪은 혹한기 훈련도 지금보다는 따듯했다.
아파트 고층에서 팬티에 흰 티 하나 걸치고 바깥 베란다에 목숨 걸로 매달린 신세라니......
거기에다가 여기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마 인터넷 신문기사가 되어 널리널리 온 천하에 그의 행적을 알리게 될 판이었다.
애인 부모님을 피해 베란다에 매달리던 방모씨 가로열고 29세 가로닫고......
여자 친구 아파트 땡땡 층에서 떨어져 사망하다........
헐헐헐......
이 무슨 개망신인가.......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이따위 기사에 자신의 이름 방명록을 남길 수는 없었다.
이미 뭐 개인 홈페이지 방명록으로 힘들게 살아온 인생 아니던가!
머리에 고리 달고 폴락폴락 하늘로 올라가면서
이 세상에 저런 식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베란다 난간을 더욱 꽉 움켜잡고 덜덜덜 떨고 있었다.
올해 가장 추운 날이라는 아까 뉴스에서 들은 소식이 새삼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휭휭 부는 바람소리에 안쪽 기척을 살필 새도 없는 가운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심장이 떨어졌다.
절망의 시간....
멸망의 순간이 마침내 열렸다.
흑흑......
이렇게 숨어있었는데......
나의 고생이 이렇게 헛되이 끝나다니.....
왠지 콧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금세 눈시울도 같이 젖어가는 느낌이었다.
허엉~~~
아버님 제가 수진이 남자친구입니다~~~
흐어엉~~~
용서해주십시오~~~~
이미 반은 울고 있는 명록의 귓가에 나지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빠~~ "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건 명록에게 천사의 호출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순간 암흑이 걷히고 하늘에서 찬란한 햇볕이 쏟아졌다.
수진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고개를 번쩍 들어 살펴보니 창문에서 바라보고 있는 수진의 애타는 얼굴이 바로 들어왔다.
순간 자신을 보는 그녀의 얼굴이 풉 하는 것으로 변하는 건
아마도 분명 추위에 정신이 반쯤 나간 명록의 착각이었으리라 믿고 싶었다.
어찌됐든 간신히 수진의 도움으로 베란다의 턱을 넘을 수 있었다.
아까는 어떻게 넘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리도 추위에 얼어서인지 턱에 올라오기가 무슨 절벽에서 올라가는 것처럼 힘이 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버텼는데 구조의 손길을 앞두고 허망한 추락은 있을 수 없다 생각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렇게 어렵게 베란다 안으로 들어오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아까 그렇게 춥던 베란다가 이렇게 따스하게 느껴질 줄이야.......
대체.....
개마고원에 사는 사람들이나 시베리아 벌판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겨울을 나는 걸까......
오줌을 누면 바로 그 형태대로 얼어버린다는 그곳에서 사는 사람의 끈질긴 생명력에 새삼 놀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 뒤는 무슨 정신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명록이었다.
그냥 수진이 이끄는 대로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으으....
따뜻해......
아......
방바닥이 이렇게 따듯하구나.....
이미 명록은 완전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의 개구리가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안의 따스함을 채 즐기기 전에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 수진아~~~ 아니 어디 있는 거야.... 수진아~~! "
갑작스럽게 그녀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둘 다 깜짝 놀라 허둥대기 시작했다.
명록은 침대 옆 공간에 납작 수그리고 그 위로 수진은 자신의 이불을 던졌다.
벽과 침대 사이 좁은 공간.....
평소 그곳에 이불을 개서 두는 건지
그녀 침대에 있던 이불 중 가장 두꺼운 이불이 명록의 등위로 올라오며 그를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었다.
이내 수진의 어머니 목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 아니, 여기서 모하는 거냐? 아버지 지금 씻으신다. 나와서 같이 밥 먹자. 너도 저녁 못먹었을 거 아냐. 에궁.... 얼굴이 홀쭉해졌네..... 어여 나와라. "
명록은 이불 사이로 들리는 그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울상을 지었다.
아.....
수진이 어머님......
흑흑.....
죄송합니다.
도저히 이런 몰골로는 인사를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언제.....
정식으로 뵙게 되겠죠.....
흑흑....
그때 말끔한 모습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흐....
추워.....
으으으으.....
그가 속으로 눈물 흘리고 있는 사이 수진이 서둘러 자신의 방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부엌에서 두 모녀의 얘기가 들리는 듯 하더니 문을 닫았다.
탁.
아....
이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명록은 우선 이불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방문이 확실히 닫힌 것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지금 숨어있는 이불 아래는 너무 불안했다.
명록은 구두를 들고 살금살금 빠르게 방에 붙어있는 베란다로 피신했다.
여기는 그래도 장판도 깔려있는 베란다라 아까 거실 쪽 그곳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한쪽 벽면에 수진의 옷들이 쭈욱 걸려있는 행거 뒤로 몸을 숨겼다.
옷 뒤에 있자니 다시 몸이 쌀쌀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거실보다는 낫다고 하나 베란다는 베란다였다.
몸이 시려오기 시작했다.
으.....
추워.......
생각해보니 팬티에 흰 티가 전부였다.
아까 방에서 얇은 이불 하나라도 챙겨오는 건데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살짝 갔다 올까 했는데 순간 방문이 삐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의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리는 거 봐선 그새 수진이 방문이 열린 모양이었다.
이젠 정말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은 명록은
그 자리에 구두를 가만히 내려놓고는 행거에 있는 옷 중 대충 자신의 몸을 가릴만한 것을 골랐다.
하나하나 골라 어깨를 감싸고 대충 가린 채 뒤에 웅크리고 앉았다.
코끝이 시린 게 감기 기운이 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재채기라도 하는 날이면 끝장이었다.
명록은 손을 비벼서 코와 볼을 녹이며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있었다.
**************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상륙한 것만큼이나 거실엔 냉랭한 분위기가 연출 되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리모컨을 누르며 채널을 돌리는 엄마와 부엌 식탁에 앉아 홀로 술을 따라 마시는 아빠.
두 분 사이에서 끼어버린 수진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아무튼 빨리 두 분의 냉전을 풀어야만 같이 주무시러 가실 거고
자신의 방에 숨어있는 명록도 밖으로 대피시킬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어떤 실마리도 찾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 엄마의 선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 아니 딸이 아픈데 계속 그냥 온천여행을 하자는 거야..... 네 아빠가.... 에휴! 무슨 아빠가 그리 딸 걱정을 안 할 수 있니? 안 그러니? 에휴...... 그러고도 지금 저렇게 툴툴 뿔나신 거 봐라..... 무정한 사람 같으니라고...... 딸이 아픈데 온천에 들어가서 몸이 무슨 효험을 보겠다고 그렇게 있자고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
넋두리처럼 시작된 엄마의 말은 수진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내심 딸이 아픈데도 여행을 계속하자고 했다는 부분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무작정 엄마 편을 들면 보나마다 세계 대전 급 큰 싸움으로 번질 것이 뻔했다.
왜 하필 엄마 전화를 안 받아서 이런 초대형 사태로 몰고 가게 됐는지 후회막급이었다.
그리고 그 뒤 전화 한번을 안 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 아니야.... 엄마도 참..... 아빠도 나 얼마나 위하는데.... 그리고 나 봐. 이젠.... 괜찮잖아."
수진에 말에 슬쩍 아빠가 끼어들었다.
" 그러게 말이다. 니 엄마 호들갑은..... 조르고 조르기에 어렵게 시간 내서 간 여행인데 굳이 이렇게 올라와야 된다고 확 짐 꾸리는 성질하고는..... 대체 이게 뭔지 모르겠다.... 으흠... 에잉! "
아빠의 말에 금세 엄마가 치고 들어왔다.
" 어머머~~ 아니 딸이 전화를 안 받는데 걱정도 안하는 아빠도 있다니?! 요새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네 아빠가 이렇단다. 아프지 않더라도 연락이 안 되면 당연히 걱정을 해야죠! 걱정을! 그러고 보니 너 왜 전화를 안 받았어! 이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것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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