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제1부. # 11화 오빠, 우리 집에.... 놀러 와요. (13)
82.
" 수진이... 너!!! "
낯선 중년여자의 목소리.
분명 수진의 어머니가 확실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소리가 명록을 깜짝 놀래키고 있었다.
서....설마
내가 보인 걸까?
아님 내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해서 여기 있었다는 흔적이라도 남겼나?
실로 머리카락이 쭈삣거리며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순간 바로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베란다 화분들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의 심장은 이미 쿵쾅쿵쾅 뛰면서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하며 창문 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함이 거의 바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춥게 느껴졌다.
시멘트 상자곽이 한겨울 날씨에 꽁꽁 얼어붙어서 차라리 이건 냉장고 같았다.
거기에다가 지금 입고 있는 건 흰 티, 그리고 팬티뿐이었다.
구두는 발자국 소리가 날까봐 신지도 못하고 있었다.
벌써 발바닥이 시려워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집이라지만, 옷차림이 이게 뭐니?! 다 큰 애가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브라자를 안 하고 있어!"
아~!
순간 수진이 노브라에 원피스만 입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자신이 베란다로 뛰어드는 순간 옷을 챙겨서
수진이 자신으로 방으로 가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녀도 급박했는지 그냥 들고 있던 원피스와 팬티만 챙겨 입은 모양이었다.
평소 집에서 그렇게 입지는 않았는지 그녀 어머니의 목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수진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자....자다가, 엄마 때문에 깨서 서둘러 나온 거란 말이야.......! 어쩔 수 없었다고....... 아...아파서 다...답답한 걸 어떡해! "
" 그럼 위에 가디건이라도 걸쳐야지! 에궁..... 조심성 하나 없어가지고..... "
어머니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며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워졌다.
어찌됐든 거실 베란다 쪽에서 멀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안 들리네?
어머니만 오신 건가.....?
같이 삼박사일 온천으로 여행가셨다고 하는데 왜..... 어머니 혼자만 오신 거지???
역시 지금 자신이 들킨다면 가장 무서운 건......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베란다라는 장소 자체가....
절대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도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는 이유였다.
그 순간 언젠가 자신을 향해 말하던 승필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 한순간 잘못했다간 너 그 여자애 아버지한테 죽는 수가 있다. 크크크....... "
젠장......
암튼.......
소금에 후추까지 뿌리는 데는 도사라니까......
마치 지금 이 모든 사태가 승필 선배의 한마디에서 시작된 것 같았다.
예언가 승필 선배.
뽀드득....
하지만 불행히도 그 예언은 거의 현실로 실현되기 직전이었다.
거의 벌거벗은 남자가 자신의 집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니 단둘이 야리야리한 원피스 만을 그것도 노브라 차림으로 있던 딸래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 세상 어느 부모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우선 어머니 같은 경우야 헤치고 도망칠 수 있을 거 같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면 그건 분명 유혈사태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으으......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밖은 추운 겨울.
무사히 도망쳐서 밖으로 나갔다고 쳐도 이 차림으로 길거리를 뛰어다니다간 십분이면 동태가 되어버릴 게 뻔했다.
거기에 이 아파트 주민들이 보기라도 하는 날이면 바로 경찰에 신고가 들어갈 지도 모른다.
하긴 팬티바람에 흰티 하나 걸치고 뛰어다니는데 신고를 안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변태.....
미친 놈......
별의 별 소리를 들으며
이 동네 사람들의 구박을 이 한 몸 다해서 받아내야 할 게 뻔한 일이었다.
아냐아냐.....
혹시.....
어머니가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서 혼자 오신 걸 수도 있잖아?
순간 명록의 머리에 희망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그냥 급한 일 때문에 오신 거라면 갑작스런 어머니의 등장이 이해가 되고 있었다.
또한 빠른 퇴장도 기대할 수 있었다.
볼일 보시려고 바로 나갈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금세 꺼져 버렸다.
두 분이 같이 여행 갔는데 어머니만 오셨겠냐!
멍청한 놈....
분명 아버지도 오셨겠지......
근데 왜 목소리나 기척이 안 들리는 거야?
다시 명록의 마음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한순간 한순간 열대의 날씨처럼 급폭풍과 맑은 하늘이 번갈아 나타나듯 변화무쌍하게 바뀌고 있었다.
어찌됐든 그녀의 부모님께 이런 몰골로 첫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다.
오돌오돌 떨면서 제발 이 순간이 꿈이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지만
비극적인 것은 지금 이 순간이 분명 현실이라는 점이었다.
또 그것이 그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아흐.....
오줌 마려워......
젠장......
갑자기 밀려오는 요의(尿意)에 더욱 마음이 조급해지는 명록이었다.
**************
수진이 괜찮은 모습에 엄마가 한시름 놓고선 주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엄마의 시선에 죽 포장이 눈에 띄었다.
" 죽.....? 왠 죽이지? "
가디건을 걸친 수진이 거실로 나와 보니, 엄마가 부엌에서 죽 포장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아차!
범죄(?)의 현장에서 급하게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빠서 미처 생각 못한 것이었다.
아....
미리미리 설거지도 하고
포장도 바로 치워버리는 건데.......
순간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생각났다.
가끔 베짱이가 옳은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분명 부지런한 개미의 승리가 확실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미처 치우지 못했던 죽이 싱크대 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보였다.
난감......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아팠던 사람이
혼자 걸어서 사왔다고 말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아....아 배..배달...."
너무 당황스러워서 수진이 급하게 둘러대곤 곧 바로 후회했다.
엄마는 흐음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 흐음 그래? 이 집이 배달도 되나....? 그러고 보니 나도 오랜만에 죽이 먹고 싶네......? 수진아, 이 시간에도 여기 배달 해준다니? "
악!
배달이 되는 죽 집이 있을 리가 없는데........
급하게 자신이 둘러낸 소리에 바로 죽을 배달해 먹으려는 엄마의 말에 그녀는 마음이 급해졌다.
수진이 가슴이 터질듯 뛰는 것을 느끼며 안돌아가는 머리를 최대한 굴리며 대답거리를 찾았다.
순간 답을 찾은 수진이 입을 열었다.
" 아.... 그게 아니고! 아.... 치...친구가 내가 아프다고 하니 집까지 배달해준거야. 응! 친구가 사다준 거야! "
이번엔 스스로도 말이 되는 것 같아서 슬쩍 웃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죽은 분명 명록이 사가지고 온 거니까.....
다만 친구가 남.자.친.구.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그 배달원이 속옷 차림으로 헐벗은 채 숨어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거기에다가 지금 말하며 말을 살짝 더듬은 게 마음에 찔리는 중이었다.
" 그래? 그렇구나..... 근데 네 친구도 이상하다. 저 많은 죽을 너 혼자서 어떻게 먹어? "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엄마의 말에 수진의 얼굴이 곧 굳어버렸다.
날카로운 지적.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고도 남는 엄마의 지적이었다.
무언가 들킨 거 아닌가 하고 놀란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그냥 지나가듯 쏟아낸 말이었는지 별 생각 없이 남은 죽을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진이 바로 입을 열었다.
딴데로 빨리 엄마의 주의를 돌려야했다.
" 엄마 안 씻어? 온수 눌러 둘까? "
평소 안하던 살가운 짓을 하는 수진의 행동에
엄마가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싫지는 않았는지 그래라 대답하고는 욕실로 향하였다.
수진은 낼름 보일러를 키기 위해 거실로 가는데
순간 안방에서 나온 아빠가 베란다로 나가려고 문을 열고 있었다.
바로 거실 보일러 급탕 버튼을 누르고 수진은 달렸다.
다다다다~!
으아~~~~~!!!!!!!!!!!!!!!!!!!!
아빠.....!
완전 놀라서 토끼 가슴이 된 그녀가 크게 아빠를 불렀다.
" 아빠~~~~~~~!!! "
또하나의 자아는 명록을 부르는 중이었다.
제발 오빠, 어떻게 좀 해봐!
아.... 안 돼!
악악!!!
피해....
도망쳐~~~~
오빠!!!!!!
할 수 있다면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질러대며 경고를 쏟아내고 싶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명록이 베란다에 숨어 있을 텐데, 지금 그곳에 아빠가 들어가는 중이었다.
수진의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주마등처럼 명록이 아빠에게 걸리고 벌어질 일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인생의 마지막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오~ 마이갓!
이미 사색이 된 수진의 호출에 아빠는 순간 멈칫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굵은 목소리.
" 에구! 이 녀석아~ 이웃집에서 다 놀라겠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
막상 아빠가 물어보는데 할 말을 잃은 수진이었다.
더듬거리며 입에서 나오는 데로 말을 이었다.
" 아... 아니 날도 추운데 아빠 베란다에 머하시게요?! "
" 날이 추워서 화분 좀 들여 놓으려고 그러지...... 오늘 너무 춥더라. 이런 날 베란다에 두면 상하는 애들이 있어요. 안에 옮겨놔야 되는 거란다. "
말을 마치자마자 수진이 말릴 틈도 없이 이미 아버지가 베란다로 나가버렸다.
허억!
악!!!!
큰일 났어......
어떻.... 어떡하지?
수진은 눈을 가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다.
아니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제 아빠가 명록을 발견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어디 피할 데도 없는 베란다.
그렇다고 숨을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아버지 손에 질질 끌려나올 명록이 눈앞에 훤히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지워져 가고 소스라치게 놀란 수진은
이제 매 맞을 차례가 된 아이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 배수진! 이...이게 대체.... "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
현기증으로 세상이 핑글 도는 느낌.
아버지의 심상치 않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수진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마침내 걸렸구나!
아......
나도 오빠도......
오늘부로 밝은 태양아~
안녕~~~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그녀를 부르는 아빠의 불호령에 수진이 고개를 푹 숙이고 베란다로 걸어갔다.
대체 뭐라고 해야 조금이라도 덜 혼날지 바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 어떻게 해,
뭐라고 해야 되지?
적당한 핑계거리가 없을까?
아냐...
분명히 홀딱 벗고 있을 텐데...
핑계가 통할 리 없지...
차라리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볼까?
이러다가 집에서 쫓겨나면 이젠 어떻게 하지...
히잉....
흑.....
베란다로 나가는 동안 수진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며 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지......
그게 나잖아.....
그래 차라리...
빌자...
" 죄....죄송해요, 아빠. 정말....."
" 역시, 너였구나 너였어!!!! 에구. 이것아! 이...이게 얼마짜린데 그랬냐! 이런.... 아까운 거......"
고개를 푹 숙이고 비는 수진의 귀에 이상한 단어가 들렸다.
에?
얼마 짜리냐니?
명록을 발견한 거치고 아빠의 음성이 그리 크게 화나거나 놀란 기색이 아니라는 것도 이상했다.
고개를 살짝 들자 아빠가 말하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베란다 놓인 화분 중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 아.... 하하, 그게... 아까 빨래를 걷다가 그만 그랬나 봐요.... "
수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빠는 넘어진 화분에서 흙을 끌어 모으며 화분을 살펴보시고 계셨다.
그러나 그런 아빠의 모습보다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명록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까 분명히 그가 베란다로 달려가는 걸
그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 같은데,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
지금 이곳에는 쓰러진 화분을 세우며 안타까운 듯 쳐다보는 아빠와 수진 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 붙은 부엌에 계속 엄마가 계셨기 때문에
그가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도, 틈도 전혀 없었는데,
대체 어디로 갔을까???????
수진은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춘 명록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설마 마법이라도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아.....
암튼 다행이야.
오빠....
나이스!
지금 이 순간이라도 그가 그런 능력이 있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어찌 됐든 그가 없다고 안심 할 건 아니었다.
혹시 모를 일은 대비해서 아빠를 여기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아빠... 제가 화분 들여 놓을 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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