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제1부. # 11화 오빠, 우리 집에.... 놀러 와요. (5)
74.
생각해보니 그녀의 집에 명록이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녀의 현관 앞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배웅할 때도....
일층 엘리베이터 타는 곳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졌지
그녀가 사는 층까지도 올라간 적이 없었다.
물론 몇층 몇호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파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옆에서 간호하며 수진을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는 그곳이 궁금했다.
그녀가 언제나 자신과 통화하는 방.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방을 꾸며놓았는지.....
평상시 그녀가 살고 있는 그 곳이 궁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명록의 말이 끝나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침묵.
수화기 저편에서 망설이고 있는 수진의 모습이 그려졌다.
거친 숨소리가 흔들리며 들리다가 잠시후 말소리로 바뀌었다.
" 으응.... 그럼 올래? 우리집 몇호인지는 알지......? "
명록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자마 바로 말했다.
" 그럼. 당연하지. 그럼 퇴근하고 바로 갈테니까 그때까지 좀 쉬고 있어. "
" 응,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기전에 꼭 전화해주고...... 미안해. 오빠....... "
" 아니야. 괜찮아. 괜히 미안해하지말고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어. "
" 으응....... "
그녀와의 통화가 끊어졌다.
몸살기에 목감기 기운도 있는 것 같고 코감기도 같이 온 거 같았다.
퇴근후 어떻게 할지 생각하면서 무엇무엇이 필요한지 머릿 속으로 정리하고 있는 명록이었다.
**************
금요일 퇴근길이라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활기에 넘치는 거리에는 쌍쌍이 연인들의 모습도 유난히 많이 눈에 띄였다.
하아.....
원래대로라면
수진과 함께 자신도 저렇게 웃으면서
데이트를 즐겨야 하는 건데......
명록은 한숨을 내쉬면서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가 내쉰 한숨을 하얀 구름이 되었다가 곧 허공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우선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약국부터 들렸다.
감기에 좋은 약들 몇가지 사고 쌍화탕도 몇병 샀다.
그리고 비타민도 사고 나니 한봉투 가득 찼다.
명록은 계산 끝난 약봉지를 코트 앞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약국을 나와서 근처 죽집을 찾다가 보니 과일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가게에 떡 하니 보이는 커다란 멜론.
감기에 걸리면 탈수증상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것에 멜론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또한......
옛날 그가 심하게 감기 걸렸을때
어머니가 급하게 사온 멜론을 먹었는데
마른 입술 가운데에서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래.....
저것도 사가지고 가자.
주인과 흥정해서 하나 들은 멜론은 꽤 묵직하게 느껴졌다.
으....
왠지 작은 수박 같은데......?
우선 한손에 멜론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와 죽집을 찾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밥도 못먹고 있을 수진에게 죽이 좋을 것 같아서 사가지고 갈 작정이었다.
개똥도 쓰려고 하면 안보인다고 평상시 그렇게 많이 보이던 죽 파는 곳이 단 한개도 보이지 않았다.
전철역 근방 블록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연신 왔다갔다 하는데
마침내 저 아래 사거리에서 드디어 죽전문점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훅하고 따듯한 공기가 느껴졌다.
" 어서오세요~ 식사 하시고 가실 건가요? "
유니폼 차림의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바로 다가와 그를 맞이했다.
명록은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 아뇨... 혹시 포장 되나요? "
평상시 죽을 별로 사본 적이 없던 터라 자신없게 묻는 그의 질문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답했다.
" 당연하죠. 우선 메뉴판 드릴까요? "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바로 메뉴판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생각보다 많은 메뉴의 죽들을 보면서 명록의 머리는 또다시 복잡해졌다.
아니....
무슨 죽이 이렇게 많아......
명록은 메뉴판을 펼치자마자 헉 하는 느낌이었다.
그냥 대충 보아도 이십여가지 넘는 죽이 목록에 나와있었다.
팥죽과 흰쌀죽만 생각했던 그로썬 이런 죽들 중에 수진에게 무엇을 사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흠......
망설이는 그의 옆에 있던 아주머니는 또 새로 들어온 손님을 맞아 떠났다.
명록은 홀 구석에 서서 메뉴판을 벌써 세번째 보고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전복죽이었다.
가끔 횟집에 가면 나왔던 죽이 꽤 맛있고 고소했다.
여직원들도 꽤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서 익숙한 이것으로 살까 생각했다.
순간 아래 메뉴에 있는 죽이 보였다.
닭죽.....
그러고보니 아픈 사람한테는 닭죽이 더 좋은 거 아닐까?
닭이 소화도 잘되고 영양가도 높다고 하잖아......
삼계탕 못먹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이걸로 할까?
가만히 양쪽 메뉴를 저울질 하던 그에게 또다른 메뉴가 눈에 들어왔다.
흠...
여자니까....
야채죽을 좋아하려나?
아니야.....
호박죽도 있네......
근데....
이건 좀 너무 달지 않던가.....
그리고 밥으로 먹기엔 좀......
거....거기에다가...
임산부한테 좋다고 했던 거 아니던가?
사실 정확히 호박죽이 어디에 좋은지는 알수 없었다.
몸튼튼 마음튼튼 명록이 병에 걸려 골골대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근래 수진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것 말고는 그렇게 아파본 적도 없던 그였다.
그러니 죽과 자연히 친할 리 없었고 관심도 없었으니
뭐가 좋은지 수진에게 어떤 죽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점차 메뉴판 속에서 머리가 아파오는 가운데 명록은 결심했다.
에잇.....
귀찮아......
다 사가면 되는 거 아냐.....
남으면 내가 먹지 뭐......
순간 마음을 정한 명록은 아주머니를 불렀다.
바로 달려오는 직원 아주머니한테 전복죽, 닭죽, 그리고 야채죽 세개를 모두 주문하고 있었다.
**************
명록의 전화에 서둘러 수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엘레베이터 타기 전에는 전화를 하라고 했더니
융통성 없이 정말 엘레베이터 앞에서 전화를 한건지
수화기 너머 명록의 목소리가 차가운 벽에 부딪히며 울리고 있었다.
바보 오빠!
아직 샤워도 못했는데....
수진이 명록의 전화를 대충 끊고선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갔다.
아픈 몸이지만 엉망인 모습을 명록에게 보인다는 사실이
그녀의 고통을 잊게 만들었는지, 빠르게 세수를 하고 산발이 된 머리를 새로 묶었다.
거울 속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초췌해 보여서
지금이라도 명록에게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를 오라고 한건 그녀 자신이었다.
몰골이 영 아니어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가 옆에 있었음 하는 마음......
두개의 마음이 서로 계속 교차되면서
어느 것을 택하고 싶은 건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시 휘청거리는 현기증을 느끼며 수진은 두꺼운 안경으로 얼굴을 가렸다.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수진 서둘러 화장실을 나가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흔들거리는 걸음에 아픔을 다시 찾아왔다.
뇌를 누가 눌러 압축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두통이 느껴졌다.
거기에 핑 도는 느낌까지.
순간 벽을 짚은 수진은 가까스로 현관문을 열어주고 명록을 맞이했다.
아픔이란 사실 굉장한 내숭쟁이나 어리광쟁이가 아닐까?
명록을 보자 마자 갑자기 수진의 다리가 풀어지며 휘청하는 것을
명록이 서둘러 앞으로 뛰쳐나와 그녀의 몸을 붙잡아주며 지탱해줬다.
" 아..... 오빠.... 안녕? "
수진이 그의 품에 안겨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명록이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서둘러 그녀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 수진아 네 방은 어디야?"
아...
이제 막 일어나서 엉망일 텐데......
급하게 일어나느라 이불도 그녀의 잤던 흔적도
그대로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에 부끄웠지만 수진은 손가락으로 열려 있는 방을 가리켰다.
명록이 그녀를 방에 데려가서 침대에 눕혔다.
방이 지저분한데.....
아....
머리카락이라도 굴러다니는 거 아닐까?
우선 아픈 자신의 상태보다 방의 모습이 더 신경쓰이고 있었다.
혹시 이상한 냄새라도 나면 어쩌지.....
방청소 했던가.....
수진이 온갖 걱정을 하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지만 명록의 시선은 오직 그녀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
애수가 담겨 있는 그의 얼굴.
명록은 조심스레 누워있는 수진의 이마를 손으로 덮으며 열을 재는 듯 올려놓았다.
그녀의 이마에 닿는 서늘한 손끝에 그의 마음이 하나하나 담겨 있어 점점 수진의 마음도 포근하게 가라 앉았다.
" 열이 있네.... 밥은 먹었어? "
어릴 적 아픈 그녀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못했던 엄마,
그리고 그때로 돌아 간 것처럼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수진이지만
이번에는 그녀를 걱정하는 엄마가 아닌 연인이 그녀를 간호하고 있었다.
남자친구.....
애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
듬직한 그가 수진의 옆에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수진이 아이가 된 듯한 기분으로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 약을 먹으려면 뭐라도 먹어야지... 흐음...... 전복죽 사왔는데 좀 먹을래? "
그의 말에 또 수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리광쟁이가 된 그녀의 모습에 명록이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 잠깐만 기다려. 죽 챙겨 올게."
명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힘없이 눈을 감고 있자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하며
그릇들이 부딪히고, 이내 고소한 냄새가 방안으로 풍겨져 왔다.
달그락 달그락....
혼자 누워있었던 시간과 달리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슬그머니 뜨자 명록이 쟁반에 죽과 반찬을 챙겨 들어오고 있었다.
사실 목도 아프고 어지러워 식욕은 없지만
걱정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정성에 조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명록의 말대로 약을 먹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다.
감기에 걸리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지 멀건 밥알들이 입안에서 몇번 해쳐지다가 목으로 넘어간다.
반그릇 정도 먹자 더는 씹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픈 머리를 빨리 다시 눕고 싶은 마음.
명록이 다시 죽을 담아 수저를 내밀었지만 수진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 알았어. 그럼 약 먹자...... 잠시만? "
그는 수진의 입에 가져 갔던 수저를 내리고 그릇을 치웠다.
그리고 언제 사왔는지 약을 손바닥 위에 올려 준다.
그리고는 물을 따라 그녀 앞에 건넸다.
어렸을때의 수진이면 때를 쓰며 쓴 약을 먹지 않겠다
한창 엄마와 실랑이를 벌였겠지만 이제 어른이 된 수진은 약을 받곤 훌렁 입안에 털어 넣어 넣었다.
명록이 주는 물을 받아 꿀꺽 삼키며 약을 넘기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플 때면 언제나 늘 다시는 아프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후회와 다짐을 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왜일까.......?
수진이 누워서 침대에 걸터 앉은 명록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그의 간호가, 그가 그녀를 걱정하고 보살펴주는 모습이,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명록은 그런 수진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넘겼다.
" 그럼 잠시 쉬고 있어. 이것 좀 내놓고 올께."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매트리스가 쑤욱 올라가더니 명록이 자리에 일어나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약기운 때문인지 수진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무거운 이불이 답답하게 그녀의 몸을 누르고 그녀의 의식은 점점 수면으로 가고 있었다.
앗, 차거워.
갑자기 차가운 것이 그녀의 이마를 덮었다.
갑작스런 느낌에 졸음이 가시고 바로 깰 만도 할텐데 그녀의 눈은 여전히 떠지질 않았다.
뜨겁게 달아 올랐던 그녀의 머리는 놀람에서 점점 시원함으로, 열에 막막해졌던 것이 조금 가시는 듯 했다.
이 느낌은.....
물수건인 듯 싶었다.......
하지만 열이 난다고 이렇게 찬물로 수건을 적셔서 이마에 올려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시 멀어지는 그녀의 의식 속에 머리를 쓰다듬는 명록의 손길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담아주는 그의 손짓에 차츰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해지고 있었다.
오빠...
남산에 자물쇠로 잠겨놓고 온 내 반쪽......
첨엔 갑작스런 그의 등장이 달갑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점점 옆에 있는 게 당연한 사람.....
수진은 마음 속에서 여러가지 감정이 섞이며 하나의 이름으로 바꿔가는 것을 느꼈다.
안심.
고마움.
사랑.
그리고 행복.......
가슴을 두드리는 따듯함과 함께 수진은 기분 좋은 잠에 빠져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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