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제1부. # 11화 오빠, 우리 집에.... 놀러 와요. (4)
73.
어제 저녁 부터 으슬으슬하더니 기어코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일어나자마자 찡 하고 머리를 울리더니 슬금슬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서둘러 여행을 갈 준비를 하던 엄마도
수진의 멍한 표정에 바로 다가와서 이마에 손을 얹더니
서랍에서 종합감기약을 꺼내 수진에게 내밀었다.
" 추운데 매일 밤늦게 들어오니 감기에 걸리지. 남들은 춥다고 집에서도 꽁꽁 싸매고 있는데 넌 뭐가 잘났다고 매일 얇게 입고 다니니? 에그그...... 쯧쯧, 꼴좋다. 에이......."
혀를 차며 계속 쪼아대는 엄마의 타박에 수진의 머리가 더욱 심하게 지잉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절로 인상을 찡그려지며 건네받은 약을 물과 함께 간신히 목 아래로 넘겼다.
사실 엄마라고 아픈 수진에게 타박을 하고 싶겠느냐마는
안 그래도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하는데 아픈 채로 혼자 집에 있을 수진 때문에
걱정이 되어 쓴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잡은 약속인지라 취소도 할 수 없는 여행이었다.
수진도 아주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라 엄마의 말 속에 섞인 걱정을 알았다.
" 엄마,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 약 먹고 한 숨 자면 괜찮을 거야? 머...... 정 아프면 친구들 부르면 되지 뭐."
그녀도 그녀 나름의 사정이 있는 지라,
이러다 괜히 엄마가 여행을 안 가겠다고 하는 날이면
그 또한 수진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인데....
자신도 명록도 손꼽아 이날을 노심초사 기다렸던 중이었다.
약을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나서 몸이 좀 나아지면
꿈에 그리던 명록과의 외박을 위해 나갈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 여보 빨리 나와! 늦었다니깐..... 이 여편네가 대체 뭐하고 있어? 아직까지 방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거야? 여보~~~ "
현관 문 밖에서 짐 가방을 들고 서있던 아빠가 기다리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모녀의 이별을 재촉했다.
엄마도 딸의 모습에 발걸음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수진도 괜찮다고 하고 오랫동안 기대한 여행인지라 어쩔 수 없이 문 밖으로 발을 옮겼다.
수진도 밖으로 나가는 엄마를 배웅하기 위해 억지로 일어나서 엄마의 뒤를 쫒았다.
엄마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딸을 보며 말했다.
" 문단속 잘하고, 많이 아프면 전화해. 돈은 여기 두고 갈 테니깐 정 안 좋으면 바로 병원 가고.... 괜히 집에 혼자 있다고 청승 떨지 말아. 알겠지? "
" 안 타? 빨리 타, 아파트 사람들이 다 욕하겠네. "
아픈 딸을 혼자 두고 간다는 게 걱정스러운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 같은 엄마의 당부에 아버지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재촉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를 힐끔 쳐다보더니 그제야 몸을 돌려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제야 안심한 수진이 아파트 복도의 쌀쌀한 공기에 가디건을 여미며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었다.
부모님이 떠나며 일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수진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탁.
띠리릭.
문이 닫히고 전자음과 함께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비어버린 집안을 메웠다.
텅 빈 집안.
조용한 집 안에 자기 혼자 서있는 모습이 거실에 있는 커다란 거울에 비쳐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마음이 갑자기 쓸쓸해졌다.
빨리 오빠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넓은 집에 갑자기 혼자가 되니 더욱 명록이 그리워졌다.
전화라도 해볼까?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이제 막 업무를 시작했을 시간이었다.
분명 명록은 지금쯤 출근해서 이제 막 바쁜 오전을 보내고 있을 게 뻔했다.
정신없이 바쁜 시간일 텐데 괜히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하아...
아니지...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저녁에 볼 거잖아......
수진이 어질 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자신의 방, 침대로 향했다.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 침대, 수진은 두꺼운 이불을 칭칭 동여매곤 잠시 잠을 청했다.
어지러운 기색을 느끼며 눈을 감자 지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어느새 잠이 들었다.
**************
약기운 때문인지 푹 자고 있다가 외출 준비를 위해 맞춰놓은 알람이 사납게 그녀를 깨웠다.
약을 먹었으니 더 나아져야 할 텐데, 아까보다 열이 더 올랐는지 머릿 속이 지끈거렸다.
상체를 일으켜서 몸을 세우는데 천장이 휘청거리는 것이 어지러웠다.
간신히 더듬거리면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고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알람을 꺼버렸다.
이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온몸에 힘이 없고 쿡쿡 쑤셔오는 게 아무래도 몸살감기에 단단히 든 모양이었다.
아...
오.....오빠를 만나야 하는데....
하지만 이렇게 아파서야 어디도 갈 수도 없을 것 같다.
집 안에 있는 화장실은 커녕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도 지금은 버거워 보였다.
오늘을 그녀도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아마 명록은 더욱 큰 기대를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께 만났을 때도
오늘 저녁에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지 말하며 반짝이던
그의 눈동자가 얼마나 큰 기대감이 서려 있는지 짐작할 만 하였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쉬고 무리해서 나가 볼까 하고 생각 했다.
그러나 이런 몸으로 나가봐야 분명 그의 앞에서는 더 나빠져서는 골골 모드로 있을게 뻔했다.
당연히 그럼 아픈 자신을 챙기느라 명록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몸이 으슬으슬 떨려서 추운 밖에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수진은 결국 고민고민 하더니 명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지러운 머리.
자꾸 축축 쳐지는 몸.
또르르 울리는 신호음이 여러 번 그녀의 머릿속을 왕왕 울려댔다.
시끄럽게 머릿 속을 때리던 수화음이 그치고 약간의 정적.
그리고 이내 따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어, 수진아!? "
" 응..... 오빠...."
그의 말소리에 서둘러 말을 꺼냈지만
잔뜩 아래로 잠겨 갈라지는 듯한 이상한 목소리만 그녀의 입에서 빠져 나간다.
벌써 목도 맛이 간 모양이었다.
칼칼하고 아픈 통증이 식도를 타고 울려 퍼졌다.
바로 명록의 목소리가 급하게 들려왔다.
" 너, 목소리가...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 으...응, 어제부터 으슬으슬하더니 감기에 걸렸나봐... 오빠 미안한데... 나 오늘 못 나갈 것 같아...... 약 먹고 한숨자면 괜찮을 거 같은데..... 우리 내일 좀 나아지면 그때 보면 안 될까......?"
간신히 명록에게 내일 보자고 말을 꺼냈다.
실망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몸으로는 도저히 그를 만나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말도 말이지만 수진의 목소리에 명록이 깜짝 놀랐는지 서둘러 그녀에게 물어왔다.
명록의 질문에 수진이 신호음을 듣는 동안 생각했던 말들을
막 기름칠을 한 기계처럼 유창하게 생각해 냈지만,
정작 입 밖에서 빠져 나올 땐 개미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큼이나 형편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명록이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지 병원은 갔다 왔냐며 말을 했다.
엄마도 병원을 갔다 오라고 했었는데 이미 오후 늦은 시간이라 준비를 하고 가기엔 늦은 것 같았다.
그러나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명록에게 갔다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찌됐든 내일로 만남을 미루자는 말에 그녀의 말에 명록이 조금은 섭섭한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도 이렇게 일이 틀어져서 속상한데 그도 얼마나 실망했을까.
하지만 수진이 아프다는데 드러낼 수도 없을 테니
속으로 삭히고 있을 명록을 생각하며 그녀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 졌다.
그런데......
" 수진아.... 흠.... 그럼 퇴근하고 너희 집에 갈까? "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집에 오겠다는 말을 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터라 수진은 당황해서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집으로 온다는 말에 수진도 막상 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집도 아니고 부모님의 집,
그리고 그녀가 사는 공간을 보여 주게 된다는 데에서 오는....
약간의 부담감.
거기에다가 자신이 이렇게 아파서 누워 있는데
그가 집에 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든 걱정들이 순식간에 휙휙 지나갔다.
하지만 그가 침묵 속에 꺼낸 말이다.
그도 이 말을 꺼내기 위해 그녀처럼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 뻔했다.
잠시 생각해보니 몸도 아픈데 널따란 집에 혼자 있다는 것이 서글퍼졌다.
아픈 상태에서 혼자 있으니까 왠지 더욱 서럽고 슬퍼졌다.
그가 옆에서 자신을 보고 있어주기만 해도 아픈 것이 확 가실 것 같았다.
혼자 있는 게 너무도 싫어졌다.
" 으응.... 그럼 올래? 우리 집 몇 호인지는 알지......? "
수진은 결국 그를 위해 한발 물러섰다.
아프긴 하지만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그리고 아픈 자신을 돌봐줄 그의 따듯한 손길이 간절했다.
" 그럼. 당연하지. 그럼 퇴근하고 바로 갈 테니까 그때까지 좀 쉬고 있어. "
아까보다 한결 조심성이 사라진 그의 목소리에 약간의 흥분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 응,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기 전에 꼭 전화해주고...... 미안해. 오빠....... "
" 아니야. 괜찮아. 괜히 미안해하지 말고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어. "
" 으응....... "
수진은 짧지만 길었던 통화를 끝내곤 너무 피곤했는지 다시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그가 오려면 아직 세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아....
집을 치워야 할 텐데....
청소......
자신의 집으로 남자친구를 처음 초대하는 만큼 깔끔해 보이고 싶었다.
열이 나서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도 씻고 싶고, 그가 오면 뭐라도 먹일 수 있게 찬거리도 살피고 싶었다.
그가 왔을 때 혹 나쁜 이미지라도 줄만한 게 없는지 보고 정리도 하고 싶었다.
머릿 속에 맴도는 수많은 할 일들이 촤르륵 목록이 되서 가득 허공을 채우고
그 리스트를 보다보니 멀미가 날듯 흔들거리는 초점에 수진은 결국 눈을 감았다.
어둠.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돌풍이 보이는가 싶더니
바로 한참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더 이상 아무런 것을 느낄 수 없었다.
**************
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요일 퇴근 시간이었는데
오후에 걸려온 수진의 전화로 잠시 브레이크가 걸려버렸다.
아프다고 오늘 저녁의 약속을 캔슬하자는 그녀의 말......
이미 목이 잠긴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확실히 어젯밤 통화할때 조금 안좋은 기색이 보이긴 했었다.
그래도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저께 수진이 입고 나온 옷이 너무 얇아 보인다 싶더니......
몸매를 강조하게 위해 약간 얇게 만들어진 긴코트가 왠지 좀 불안하게 느껴지긴 했었다.
그날따라 몇십년 만에 불어온 한파 이런 뉴스가 온통 홈페이지에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집 안에서 있던 수진이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잔뜩 멋을 부리고 나온 것이었다.
물론 그녀의 잘록하고 볼륨감 넘치는 몸매를 잘 표현해주며
겨울 속에서도 아리따운 여름의 자태를 느끼게 하는 옷차림이었다.
그런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듯해지고 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또한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끌고 있음도 잘 알고 있었지만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얇은 가죽장갑 아래 그녀의 손이 얼은 듯해서
입부러 장갑을 벗기고 손을 마주잡고 명록의 앞주머니에 같이 손을 넣었다.
그렇게 집에 데려다 주는 동안 그녀의 입술이 파리하게 느껴지던 것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단 얘기였다.
많이 아픈 듯한 수진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지금 그녀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몸도 안좋은데 빈집에 그녀 혼자 있다니.......
명록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 수진아.... 흠.... 그럼 퇴근하고 너희 집에 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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